[기고] 초량과 북항재개발
강석환 부산초량왜관연구회장
1859년 영국인 존워드 함장은 부산항을 측량한 후 제작된 해도(海圖)에 부산항을 ‘초량해(TSAU-LIANG-HAI)’라고 기재했다. 1876년 체결된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 제4관에는 ‘조선국 부산 초량항(草梁項)에는~오랫동안 두 나라 인민이 통상하는 구역이 되었다’는 문구가 있다.
그러면 부산에서 ‘초량’이란 지명은 언제부터 사용해 왔을까? 조선 전기 1530년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초량항은 절영도 내(內)에 있다’(草梁項在絶影島之內)는 기록이 있다. 또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권율 장군의 기록에도 ‘초량항’이 보인다.
‘초량(草梁)’은 명량, 노량, 견내량, 칠천량, 착량 등 대들보 하나를 걸치면 건너갈 수 있는 좁은 바다 물길이란 뜻으로 남해안 일대에 많이 분포하는 ‘梁’(량)의 지명 중 하나이다. 즉 지금의 영도다리 아래를 흐르는 좁은 물길을 지칭하는 것이 ‘초량항(草梁項)’이었는데 지금의 중구, 서구 일대 인근 지역이 새띠풀이 많이 나는 지역이라 ‘풀 草(초)’의 이름을 붙여 인근 지명으로 굳어지게 된 것이다.
1678년(숙종3년) 지금 수정동 일대에 있던 ‘두모포왜관’이 당시 초량지역(지금의 중구 일대)으로 이전함으로써 ‘초량왜관’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1710년 동래부사 권이진은 ‘초량왜관’의 대마도인과 동래부 사람의 빈번한 접촉을 통제하고자 지금의 상해거리에 설문(設門)을 만들고 양옆으로 바다에서 산 위까지 담장을 설치한 후, 설문 안의 주민을 설문 밖으로 이주시킨 뒤 그 설문을 경계로 구초량(舊草梁)과 신초량(新草梁)으로 지역을 구분하게 되었다. 또한 1740년 박사창 동래부사가 편찬한 〈동래부지〉에는 지금의 용두산을 ‘草梁에 있는 작은 산’이라 하여 ‘초량소산(草梁小山)’으로 기록했다. 그리고 1892년 부산에 처음 기독교 전래를 위해 ‘윌리엄 베어드’ 부부가 부산선교기지를 설치한 곳이 지금의 동광동 코모도호텔 일대인데 그곳 또한 당시 지명은 草梁이었으므로 이것을 ‘초량에 있는 교회’ 즉, ‘초량교회’의 시작이라고 하는 것이다.
일제강점기가 되면서 설문(設門)을 경계로 한 ‘舊초량’은 지금 원도심 중, 서구의 여러 행정 지명을 가지게 되었고, ‘新초량’은 新글자가 없어지고 현재의 동구 ‘초량동’으로 이름이 남게 된 것이다. 일제 강점기 동래부(東萊府)는 폐지되고 부산부(釜山府)가 설치됐다. 초량지역과 절영도 이름을 지닌 영도, 부산진성이 위치한 범일, 좌천 일대의 부산면을 포함한 지역(지금의 중구, 동구, 서구, 영도구)이 ‘부산부’가 되었다. 지금 부산 원도심이라 부르는 지역이 이 ‘부산부’에 해당된다.
오늘날 세계 7대 수출입 무역대국으로 성장한 한국은 부산항이 그 결정적 역할을 했다. 첨단산업과 항공산업이 발달한 지금이지만 여전히 바다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데 그 출발 지역이 부산북항의 항구 지역인 것이다.
2025년 지금 부산북항은 감만, 신선대 컨테이너부두와 부산신항에 항구 기능을 넘겨주게 되었고, 항구 기능이 사라진 원도심은 협소한 배후부지로 인해 쇠퇴한 원도심이란 불명예를 함께 안고 있다. 이에 ‘북항재개발’의 이름 아래 1부두~5부두까지의 재래부두를 국제무역, 첨단산업, 주거와 관광, 오페라하우스 등 시민 친수공간과 신도심으로 재개발하는 프로젝트로 커다란 변신을 꾀하고 있다.
부산은 항구다. 그것도 ‘초량항’ ‘초량해’로 시작하는 ‘부산북항’이 근현대 부산과 한국의 지역적·역사적 시작점이다. ‘북항재개발사업’에서 특히 1부두가 부산항의 정체성을 살리는 상징물 ‘부산세관 옛청사’ 등으로 재현되고, 1부두 광장, 1부두 CFS, 옛 국제선터미널이 부산항과 태평양 바다를 품은 상징적인 모습으로 재탄생해 부산 시민과 세계 시민이 찾는 시민 공간으로 대변신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