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대한민국의 크로노미터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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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망대해에서 표류하지 않으려면 위도와 경도를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지도의 위도(가로선)는 과거에도 북극성의 위치 등으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지도의 세로선인 경도는 1761년 이전에는 경험이나 추측 말고는 기술적 방법을 고안하지 못했다. 조너선 스위프트가 1726년에 〈걸리버 여행기〉를 쓸 당시에는 경도를 측정할 방법이 없었다. 소설의 주인공 걸리버가 첫 번째 항해에서 선박 위치를 남위 30도 2분으로 관측하였지만, 경도를 알 수 없어서 배는 짙은 안개 속에 바람에 밀려 좌초했다. 걸리버는 결국 소인국으로 표류한다.

〈걸리버 여행기〉가 나오기 19년 전인 1707년 10월 22일 밤, 영국 실리제도 근처에서 안개 속에 추측항법으로 귀항하던 영국 전함 4척이 암초를 들이받으며 침몰해 1647명이 숨졌다. 경도를 몰라서 벌어진 일이었다. 1761년 영국의 천부적인 시계공 존 해리슨이 크로노미터(chronometer)라는 해상시계를 발명하고 나서야 경도 파악이 가능해졌다. ‘캡틴 쿡’이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영국의 항해가 제임스 쿡 선장이 이 크로노미터를 활용해 대항해 시대를 본격적으로 열었다. 쿡 선장은 호주와 뉴질랜드 등을 비롯한 태평양 지역 전체와 남극과 북극, 태즈메이니아, 티에라 델 푸에고, 아메리카 북서부 해안, 시베리아 북동단 해안을 모두 탐사했다. 그가 항해한 거리는 32만㎞에 이른다고 한다. 캡틴 쿡이 크로노미터를 이용해 경도를 정확하게 측정해 선박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제는 위성항법장치(GPS) 덕분에 무인선박까지 등장할 정도이다.

이런 대항해 시대의 발전 과정을 소개하는 ‘항해와 시계’ 전시회가 부산 영도 국립해양박물관에서 오는 3월 2일까지 개최되고 있다. 영국 그리니치 국립해양박물관이 보유한 해상시계 H-1과 관련 유물 7건이 한국 최초로 공개된다. 경도 측정을 중심으로 항해의 역사적 도전과 기술 발전이 세계 역사를 어떻게 바꿨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기회다.

하지만, 전시회에서는 망망대해에서 스스로의 위치와 존재감조차 잃어버리고 표류하는 대한민국의 처지가 떠오르기도 한다. 정치권과 정부의 문제 해결 노력은 오간 데 없고, 오히려 방향성을 상실한 대한민국에 우리만의 크로노미터가 필요한 듯하다. 을사년 2025년은 확실히 더 어려운 한 해가 될 듯하다. 국민이 똘똘 뭉쳐 폭풍우 치는 망망대해에서도 길을 잃지 않고, 황천항해하면서 태풍을 뚫고 가는 대한민국호를 다시 보길 기원한다. 물론, 그 힘은 우리 국민에게 있다.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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