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한글 지키기

김승일 논설위원 dojun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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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SF 드라마 ‘스타트렉’ 작가이자 제작자인 조 메노스키는 한류에 진심이다. 그는 한글의 탄생을 주제로 소설까지 썼다. 2020년 한국어와 영어로 동시 출간된 〈킹 세종 더 그레이트〉는 동북아뿐만 아니라 유럽까지 연결되는 지구적 드라마다. ‘명나라는 조선이 한자를 벗어난 새 문자를 만들자 이를 인정하는 대가로 원나라 침공 때 파병을 요구한다. 사신으로 파견된 신숙주는 일본 해적에 잡혀 한글을 전파한다. 기독교 일파 네스토리우스교 사제는 세종으로부터 훈민정음 책자를 받아 유럽으로 떠나간다.’ 소설에서 신숙주로부터 한글 자모를 익힌 소년이 곧바로 일본말을 한글로 표기하자 일본인들이 깜짝 놀란다는 대목은 일본 궁내청이 소장한 훈민정음 해례본 목판 사본에서 착안했다.

한글은 창제자와 제자 원리가 밝혀진 유일한 문자다. 1940년 경북 안동에서 발견된 훈민정음 해례본 덕분에 인류 전체의 문화유산으로 평가받고 있다. 따라서 2014년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옆에 개관한 국립한글박물관은 한국인만의 기념 공간을 넘어선다. 미국 뉴욕타임스가 2015년 세계에서 꼭 가봐야 할 여행지 52곳 중 하나로 한글박물관을 꼽은 것은 세계사에서 차지하는 한글의 위상 때문이다.

한글 전시·행사뿐만 아니라 연구의 중심이기도 한 박물관에서 어처구니없는 대형 화재가 발생해 많은 이들이 충격을 받았다. 지난 1일 옥상 용접 작업 중 튄 불티로 3·4층이 전소된 것이다. 다행히 초기 한글 저작물인 ‘월인석보’ ‘정조 한글어찰첩’ 등 보물을 비롯한 소장 자료 8만 9000여 점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 지켜 낸 한글인데 하는 한숨이 절로 나온다. 조선어학회는 한글 사전을 제작했다가 일제 치하에 옥고를 치렀고, 간송 전형필 선생은 전란 중에 훈민정음 해례본을 가슴이나 베개 속에 숨기는 필사의 노력으로 후대에 남겼다.

메노스키는 한국 출간 때 원작을 영화나 드라마로 제작할 계획을 밝혀 기대를 모았다. 훈민정음 창제기가 전 세계 OTT를 석권하는 장면은 생각만 해도 흐뭇하다. 하지만 한글 유물이 화마에 소실되는 불상사가 실제 발생했다면 가당키나 한 일일까. 지난해 한국어능력시험(TOPIK) 응시자 수가 42만 8585명으로 2020년 21만 8869명에 비해 배 가까이 급증했다. 한국어가 한류의 꼭짓점이라면 한글박물관은 성지다. 문자는 기록 수단에 그치지 않고 문화를 담는 그릇이다. 한글박물관이 한글과 한글문화의 본산으로 귀중하게 보존되어야 할 이유다.


김승일 논설위원 dojun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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