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로365] 적전분열(敵前分裂)
이근우 부경대 사학과 교수
조선 최대의 비극적 전쟁 임진왜란
수 차례 사전 징후 불구 감지 못해
내부 분열로 적 정세 파악 실패 탓
좌-우 대립 극심한 현 상황도 비슷
상호 극단적 비난에 폭력까지 등장
냉정하고 객관적 판단력 회복해야
1592년 음력 4월 13일. 부산포와 다대포, 서평포가 함락되면서 조선이 경험한 가장 비극적인 전쟁 ‘임진왜란’이 시작됐다. 전쟁을 미리 감지할 수 있는 징후는 얼마든지 있었다. 1589년 당시 실질적인 대마도주였던 소 요시토시가 승려로 위장해 조선을 찾아오면서 몇 정의 조총을 갖고 왔다. 자세한 내용이 기록돼 있지는 않지만 소 요시토시는 당시 일본에서 전쟁의 총아로 자리 잡은 조총의 위력을 조선에 알리려고 하였던 것 같다.
조총은 이미 1575년 나가시노 전투에서 위력을 발휘했다. 오다 노부나가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조직한 조총 부대는 다케다 가쯔요리가 거느린 일본 최강의 기마 군단을 궤멸시켰다. 전쟁의 패러다임이 극적으로 바뀐 것이다. 어릴 때부터 말을 타고 활 쏘는 훈련을 거듭한 기마 무사가 잠시 조총 훈련을 받은 일반 백성에게 힘을 못 쓰게 됐다.
임진왜란 때 일본은 50만 정의 조총을 보유했는데, 이는 당시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양이었다. 즉 일본군은 세계 최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은 승자총통이라는 산탄과 화살을 발사할 수 있는 개인 화기를 보유하고 있었으므로, 일본의 주력 무기인 조총의 위력을 과소평가했다.
그러나 승자총통이 분대 화기라면, 조총은 개인 화기였고, 전 병력이 조총을 사용한다면 그 위력을 가늠하기 어렵다. 당시 조총은 50m 거리에서 70%, 100m 거리에서 10%의 명중률을 보였고, 장전하는 데 30초 정도가 걸렸다. 기마 무사가 전력으로 말을 달리면 50m는 4초, 100m는 7초에 주파할 수 있었다. 이론상으로 기마 무사가 조총을 가진 보병에게 우위를 점할 수도 있지만, 조총의 숫자가 많으면 상황이 달라진다. 3000명이 한꺼번에 조총을 쏘면 일시적으로 화망이 형성되면서 명중률은 급격히 높아진다. 서너 개의 그룹으로 나누어 교대로 쏘면 재장전의 약점도 무의미해진다.
1575년 나가시노 전투의 재판이 바로 신립 장군의 탄금대 전투였다. 말을 타고 달리는 상태에서 쏘는 활의 유효사거리는 20m에 불과하다. 이미 조총으로 기마 무사를 무력화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던 일본군 앞에 신립의 기마 부대는 추풍낙엽이었다. 부산포가 함락된 지 불과 보름 만의 일이다.
조선은 왜 이런 지경에 이르렀을까. 소 요시토시가 한양에 온 지 다섯 달 만에 조선은 황윤길·김성일·허성 등을 통신사로 일본에 파견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들의 정세 보고는 서로 달랐다. 서인인 황윤길과 허성은 전쟁의 위험성을 경고했지만, 동인이었던 김성일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눈이 쥐같이 생겨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심각한 적전분열 상태였던 것이다.
이들이 일본을 왕래하는 데엔 1년이 걸렸고, 교토에는 적어도 3개월 이상 머물렀다. 김성일은 산에 올라 일본의 도성을 보았고 한시도 지었다. 고매한 학자이기도 한 김성일은 왜 일본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을까. 그뿐만이 아니다. 통신사가 귀국할 때 회례사로 겐소라는 승려가 따라왔다. 그는 임진왜란 전부터 조선을 왕래하였으며, 조선과 일본의 국교 회복 과정에서도 활약했다. 겐소는 김성일에게 히데요시가 중국 명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하려고 한다는 사실까지 거듭 밝혔다. 그렇게 많은 전쟁의 징후를 접하면서도 왜 김성일은 생각을 바꾸지 않았을까. 그런 김성일이었지만, 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최전선에서 활약하였고, 결국 1593년 진주성에서 숨을 거두었다.
지금 우리는 어떤가. 극좌와 극우의 대립은 조선 시대 동인과 서인의 대립보다 더 심각하다. 조선에서는 군자와 소인의 다툼이었다면, 지금은 서로를 ‘빨갱이’라고 부른다. ‘종북 빨갱이’에 이어 ‘내란 빨갱이’라는 말도 등장했다. 말로만 싸우는 게 아니라, 폭력도 난무하고 있다. 우리를 둘러싼 국제 정세는 엄혹하고 위태롭기 짝이 없는데, 우리는 서로 빨갱이, 파시스트라고 부르며 서로 타협할 의사도 없다.
일부 정치인들은 이러한 분열과 대립을 부추기고 있고, 돈을 목적으로 하는 탐욕스러운 유튜버들은 불난 집에 부채질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보다 더한 적전분열이다. 우리는 400년 전 우리 조상보다 더 못났고, 더 모진 사람들이 되었다. 그때 조상들은 전쟁이 일어나자 동인, 서인이 하나 되고 관민이 뭉쳐 국난 극복에 노력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상대를 죽여야 내가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마치 현재의 평화가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내부의 치졸하고 소모적인 싸움에 골몰하고 있다. 나라가 없으면 국민도 없다. 오랜 주입식 교육의 부작용일까. 정보와 선동을 구별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다. 거짓 정보나 왜곡에 휘둘리지 말고 냉정하고 객관적인 판단력을 회복해야만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