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유리지갑
“나이가 들수록 입을 닫고 지갑은 열어라.” 이 말은 나이 많은 사람이 젊은 세대에게서 ‘꼰대’ 소리를 듣지 않고 어른 대접을 받는 방법으로 자주 인용된다. 어른은 쓸데없이 참견하기보다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존재여야 한다는 걸 강조한 유태인 속담이다.
현명한 처세에 보탬이 되는 보약 같은 가르침인데, 평범한 사람들이 말대로 실천하기는 쉽지 않다. 더욱이 다른 이를 위해 돈이나 신용카드를 선뜻 꺼내 값을 대신 치러줄 만큼 지갑 사정이 넉넉한 보통 사람은 드물다. 일반 직장인 대다수가 집에서 받은 용돈을 아끼며 사회생활을 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지갑에 현금이 두둑해야 자신감이 생기고 어깨를 편다”는 얘기가 회자하며 남성들의 소망으로 자리 잡았지 싶다.
‘유리지갑’이라는 단어가 있다. 수입 내역이 투명한 유리처럼 다 드러나 있는 봉급생활자의 돈지갑을 일컫는다. 직장인들은 세무 당국에 훤히 노출된 월급이 매달 세금으로 원천징수를 당한다는 의미에서 오래전부터 ‘봉’으로도 불리고 있다.
요즘 월급쟁이들은 진짜 봉 신세가 됐다. 최근 공개된 기획재정부 자료에 따르면, 정부가 지난해 직장인의 유리지갑에서 꼬박꼬박 빼간 근로소득세가 역대 최대 규모여서다. 근로소득세 수입은 사상 처음 61조 원을 돌파해 기업들로부터 거둬들인 법인세 62조 5000억 원에 육박했다. 전체 세금 중 근로소득세 비중 역시 역대 최고인 18.1%로, 법인세 18.6%와 비슷한 수준이다. 법인세 수입은 2023년 56조 4000억 원에 이어 지난해 30조 8000억 원이 예산보다 덜 걷혔다. 경기 침체와 기업 실적 부진, 감세, 탈세 등의 영향이다. 대규모 ‘세수 펑크’를 유리지갑을 더욱 탈탈 털어서 메우는 꼴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고물가·고금리·고환율 탓에 직장인의 월급 빼고는 다 올라 유리지갑 사정은 갈수록 빈약해지는 실정이다. 외식과 장보기에서 지갑 열기가 두려울 정도라는 가정이 흔하다. 반면 근로소득세 과세표준과 세율은 오랜 기간 물가 인상분을 반영하지 않고 묶여 있다. 늘어난 세금 부담에 등골이 휠 지경인 봉급쟁이들의 불만을 사고, 현실적이고 형평성 있는 세제 개편이 요구된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 세금은 피땀 흘려 돈을 번 국민들이 낸 귀중한 혈세다. 생활이 여유롭지 않은 서민층에게 짜낸 고혈일 수 있다. 허투루 낭비하지 않고 요긴한 곳에 제대로 쓰는 철저한 세무 관리와 예산정책, 유리지갑 직장인들의 부담을 줄여줄 방안이 절실하다. 강병균 논설실장 kbg@
강병균 논설실장 kbg@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