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키17’ 봉준호 감독 “SF?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아”
‘기생충’ 이후 처음 선보인 작품
애쉬턴의 소설 ‘미키7’ 영화화
청년 세대 고충과 맞닿아 있어
차기작 애니메이션 영화 예정
“미키는 온갖 힘든 상황을 겪지만, 파괴되지 않습니다. 가혹한 현실에 처하고 참기 힘든 경멸을 당해도 말이죠.”
봉준호 감독은 자신의 신작 ‘미키17’의 주인공을 이렇게 봤다. 그가 영화 ‘기생충’(2019년)으로 미국 아카데미상 4관왕을 차지한 후 처음 선보인 이 작품은 2054년 미래를 배경으로 한 SF물이다. 전작들에서 자본주의의 병폐와 계층 문제를 꾸준히 풍자해 온 봉 감독은 이번엔 짠내 나는 노동자 미키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최근 서울 영등포구 콘래드호텔에서 만난 봉 감독은 “SF영화이지만, 현실과 견주어보면 크게 다를 바 없는 걸 알 수 있는 작품”이라고 말했다.
오는 28일 개봉하는 ‘미키17’은 애드워드 애쉬턴 작가의 장편소설 ‘미키7’을 원작으로 한다. 원작에서 인간 프린팅이라는 설정은 그대로 가져왔지만, 그 외 것들은 이른바 ‘봉 감독화’ 했다. 역사학자 미키는 영화에서 마카롱 가게를 열었다가 망한 보육원 출신 청년으로 바뀌었고, 성격도 어리숙하고 지질해졌다. 미키는 우주선에서 위험한 작업을 하다 죽으면 바로 ‘프린트’(복제)되는데 소설보다 영화에서 10번 더 죽고 다시 태어난다. 영화는 17번째 미키가 죽은 것으로 오인돼 미키18이 나오며 생기는 일을 비춘다. 감독은 “원작보다 많이 죽이려고 그랬다는 말이 있는데 그럴 바엔 미키 87, 124 정도로 했을 것”이라며 “착해빠진 미키가 죽기를 반복하다 성장하는 이야기를 담고 싶어서 성인이 되는 나이인 18에 맞추었다”고 했다.
봉 감독은 영화에서 ‘메시지 강요’를 지양한다고 했다. 작품에 거대 담론을 직접적으로 담는 대신 주인공으로부터 이야기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사회의 면면을 비추게 된다고 했다. ‘미키17’에선 미키가 한 명의 인간이 아닌 하나의 부품으로 이용되거나 비인간적인 인간 군상이 여럿 등장하는 식이다. 봉 감독은 저임금 노동자에게 위험을 외주화하고, 소모품처럼 인력을 교체하는 사회 현실을 꼬집었다. 감독은 “몇 년 전 화력발전소와 지하철 스크린 도어, 제빵 공장 등에서 인명 사고가 있었다”며 “그 이후에 얼마나 근로 환경이 개선됐는지 모르겠지만, 누군가가 그 자리에 채워져 계속 일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김군 다음 최군, 박군, 윤양 식으로 시스템과 일자리는 유지되고 인간이 교체되고 있잖아요. 그런 모습에서 오는 슬픔과 잔인함이 있어요. 미키라는 인물은 코믹한 것 같지만 사실 청년 세대가 겪고 있는 고충과 분명히 맞닿아 있다고 생각해요.”
영화 속 미키는 그럼에도 절망하거나 파멸하지 않는다. 나샤의 사랑 덕분이다. 미키와 나샤의 사랑은 영화의 주요 동력이다. 이 사랑은 미키를 희망이 완연한 장소로 이끌고, 그를 지탱하는 힘으로 작용한다. 사랑은 봉 감독의 전작들에선 볼 수 없었던 주제다. 봉 감독은 “원작에서 나샤가 미키를 끝까지 지켜주는 순간에 눈물을 많이 흘렸다”며 “저도 50대가 되고, 미키가 제 아들 나이 정도 되니까 제 마음이 약해진 것 같다”고 웃었다. 그는 “미키가 파괴되지 않기를 바랐다”며 “미키가 처한 상황은 정말 가혹하지만, 나샤가 있기에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어 “어쩌면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했던 건 SF라는 장르를 잘 살려내는 것보다 두 사람의 사랑을 잘 담아내는 것이었다”고 강조했다.
봉 감독은 차기작으로 애니메이션 영화를 준비 중이다. 자연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감독이자 작가인 클레르 누비앙이 2006년 내놓은 책 ‘심해’가 바탕이 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수심 6000m에서 촬영이 가능한 탐사로봇 등으로 찍은 심해 해양 생물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영화는 내년 말 또는 2027년 초 공개 예정이다. 봉 감독은 “난 재미와 아름다움을 위해 영화를 만든다”며 “눈앞에서 벌어지는 상황과 말과 캐릭터에게 관객이 정신없이 끌려가게 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매 작품 온 힘을 다해 만드니 전 지금 ‘미키17’처럼 ‘봉8’인 상태예요. ‘기생충’ 땐 ‘봉7’이었고요. 이번이 여덟 번째 작품인데 여전히 개봉을 앞두니 불안하고 초조하네요. 그렇지만 저는 계속 앞으로 나아갈 겁니다. 관객들이 그저 제 영화를 오해와 편견 없이 봐주길 바랍니다.”
남유정 기자 honeybee@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