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사실주의를 넘어 내면의 심상까지 담아내다 [부산문화 프런티어]
⑥강강훈 작가
극사실주의 인물화 독보적
재현 넘어 내면의 감정 표현
준비 과정도 철저한 프로
‘리얼리티’의 힘 제대로 전달
외국 페어, 전시 큰 인기
재현의 개념을 상실한다. 사진보다 더한 재현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인간은 굴복하지 않았다. “회화인지 사진인지 구별할 수 없다” “사진보다 더 진짜 같다”라는 말을 듣는 극사실주의 회화가 등장한 것이다. 다만 이 또한 디지털기기를 활용한 미디어 작품들이 나오며 애매해졌다고 말하는 이들도 많다.
미술관에서도, 미술시장에서도 호의적이지 않은 이 분야에 독보적으로 자리매김한 부산의 작가가 있다. 1979년생인 강강훈 작가는 대학 졸업 무렵부터 졸곧 인물화에 천착했다. 미술 전공자들이 가장 그리기 힘들다는 인물화 그것도 얼굴을 극단적으로 클로즈업해서 그린다. 100호 대작은 기본이고, 300호 600호 초대형 크기의 인물화를 자주 선보인다.
“사실주의의 감동이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삶을 직시하며 거기서 느끼는 감정을 바라보고 이 세상을 사는 힘을 얻을 수 있죠. 극사실주의는 감정을 배제하고 똑같이 그리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고 생각하지만, 저는 오히려 극사실적인 인물화를 통해 그 사람의 감정을 공유하게 하고 싶어요.”
강강훈의 인물화는 일반적인 극사실주의와 다르기 때문에 특별하다. 그의 작품은 작가의 주관을 배제하지 않는다. 재현의 차원에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인물의 감정선을 따라 내면으로 진입한다. 작가의 이같은 태도는 인물의 형상재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까지 담아내야 한다는 한국 전통 초상화 기법과도 통한다. “상실된 자아의 흔적은 표정 속에 숨은 그림찾기처럼 존재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표정과 내면을 그리는 것을 좋아합니다.”
강 작가의 생각은 작업 과정에서 드러난다. 대상의 숨은 본질은 표정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해 강 작가는 그림을 그리기 전 모델을 수천 장 촬영한다. 회화 작가의 작업실 반이 전문 촬영 장비와 조명, 배경롤업지까지 갖춘 사진 스튜디오로 꾸며진 것도 이 같은 이유이다. 사실적 재현을 위한 접사가 아니라 인물의 내면을 볼 수 있는 진짜 얼굴을 찾기 위해 적극적으로 사진기를 이용한다.
강 작가는 “나에게 있어 리얼리즘은 지금을 말해주는 시간적 개념이며, 내가 있는 곳을 말해주는 공간에 대한 현실감각이다”라고 표현했다. 작가는 어떤 대상을 사실적으로 그리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림으로 그려낸 현실(리얼리즘)과 현대인들이 살고 있는 현실 사이의 관계를 재해석한다. 눈에 보이는 현상을 만들어낸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역사까지 읽어낼 수 있으면 좋겠다는 강 작가. 작가주의에 대한 지독한 고집을 엿볼 수 있다.
대다수 회화 작가는 사람을 그리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인물화를 피한다. 한편으로 미술시장에서 인물화는 팔리기 어렵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크다. 강 작가의 작업은 처음부터 외로웠고 서울 수도권이 아닌 부산에서 이 작업을 고집하다보니 점점 더 외로워졌다. 그럼에도 강 작가는 인물화를 놓지 않았다. 외로운 시간 동안 작가는 자신만의 리얼리즘을 표현하기 위해 붓질, 물감의 질감, 조색, 기름과의 비율, 두께, 덫칠, 발색 등 극단까지 실험을 계속했다. 강강훈만의 인물화는 결국 미술계에 차별화되는 장르를 만들었고, 인물화 역사가 긴 서양에선 강강훈 작가의 인기가 대단하다.
“외국 아트페어나 유명 미술관에서 전시하면 다들 입을 벌릴 정도로 강강훈 작가의 그림에 놀랍니다. 우선 그림의 완성도에 놀라고 그림 속 인물의 감정을 느끼고 소통합니다. 외국에서 강강훈 작가에 대한 기대가 커지고 있습니다.” 오랜 시간 강강훈 작가와 전시를 이어오는 조현화랑 관계자의 설명이다.
3살 무렵부터 간간이 그림에 등장하던 작가의 딸은 2016년부터 본격적으로 작품의 대상이 되었다. 이때부터 강 작가는 딸만 그리고 있다. 딸은 자신을 투영한 존재이며 작가가 집에서 간병했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기도 하다. 딸을 모델로 한 물감 시리즈는 색다른 시도로 관심을 모았다.
인물의 얼굴에 물감을 뿌린 후 작가가 직접 색을 칠한 롤스크린 앞에 세운 후 수천 장의 사진을 촬영한다. 그 중 선택된 일부가 작업으로 옮겨진다. 이 시리즈는 추상과 구상의 교차점에 있는 회화라는 평가를 받았다. 보여지는 것은 극사실주의 회화지만, 추상적인 내면의 감정을 드러낸 셈이다.
최근 몇 년간은 인물화에서 확장된 목화 시리즈를 선보이고 있다. 작가는 목화를 보며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올렸다. 목화의 부드러운 솜털이 어머니의 하얗게 센 머리카락 같았고, 솜을 받치고 있는 쪼글쪼글한 잎사귀는 갖은 고생을 겪으며 자식을 키워낸 어머니의 손을 닮았다. 목화는 꽃이 지고 나서 열매를 맺고, 그 열매의 꼬투리가 터지면서 흰 솜털을 드러낸다. 목화로 상징되는 어머니와 딸을 한 화면에 담아 세대를 아우르는 가족의 의미를 표현하고 싶었다. 신비한 아이의 표정, 머리 위에 있는 목화는 포근함이 느껴진다. 인물만 그렸던 작가에게 특정 사물을 주요하게 다루는 것은 큰 도전이었지만, 화면 속 무게감이 분산되지 않고 균형을 이루며 작품은 완성됐다.
“인물의 땀구멍까지 표현했던 이전과 달리 피부를 매끄럽게 처리한다거나 얼굴에 드리운 어둠 안에서 채도를 조절해 그림 전체 분위기를 맞추는 등 디테일을 덜어내려는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테크닉이 아니라 감정에 따라 붓을 놓게 되더라고요.”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집 지하에 마련된 작업실에서 4시간 연속 그림을 그리며 하루를 시작하는 강 작가. 지독히 부지런한 그의 작업 스타일은 강 작가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자 앞으로 작업에 대한 기대로 다가온다. 강 작가는 4월 30일 조현화랑 서울점에서 신작 개인전을 열 예정이다.
김효정 기자 teresa@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