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락에서 일상으로 나오려면, 치료적 재활센터 절실 [마약, 처벌 넘어 치유로]
3. 지난한 치료, 전문기관 절실
마약 중독 치료 제주순오름센터
10·20대 청년 6명 시설서 재활
올레길 걷고 독서·운동 등 하며
마약 단절 위해 규칙적 생활 지속
처벌 아닌 ‘재활’ 인식 전환 필요
“영화 ‘맨 인 블랙’ 보셨어요?” 2년 넘게 마약에 빠져 산 A(29) 씨는 영화에서 나오는 기억을 지우는 기계로 마약과 관련한 기억을 송두리째 지우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마약 사는 데 2억 넘는 돈을 썼고 마약 탓에 직장도 잃었다. 현재 마약 범죄 관련해 4건의 경찰 수사도 받고 있다.
지난달 28일 〈부산일보〉 취재진이 직접 방문한 제주도 서귀포시 안덕면 제주순오름치유센터에는 A 씨를 포함해 마약 중독자 6명이 생활하고 있었다. 아직 앳된 티가 나는 18세 청소년부터 29살 대학생까지 모두 10·20대 청년들이었다.
예상과 달리 퀭한 눈, 홀쭉한 볼의 마약 중독자는 없었다. 직접 만난 그들은 다들 평범한 청년이었고, 흔히 만날 수 있는 이웃이었다. 그들의 모습에 ‘마약 중독은 사고처럼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라는 느낌이 전해졌다.
입소자들은 “마약을 시작한 상황과 계기는 모두 다르지만, 그 끝은 나락으로 똑같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실제 작곡가, 가수, 직장인, 학생 등 이들이 사회에서 가졌던 직업은 달랐고, 살던 지역도 미국 인도 서울 등 다양했다. 마약 중독 치료를 위해 제주도에 모였다는 사실만 같았다. 이들 청년들은 “우리가 마약 중독자가 될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고 입을 모았다. 22살에 처음 마약을 접했다는 B 씨(24)는 “원래 약쟁이(마약 중독자)를 보면 ‘나약하다’는 생각으로 무시했다”며 “그런 제가 마약에 중독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쓴웃음을 지었다.
마약이 청소년을 비롯한 젊은 세대까지 무차별적으로 파고들어 사회문제화하고 있지만 마약 중독자를 치료해서 사회로 돌려보낼 재활 센터는 턱없이 부족하다. 민간에서 재활센터가 근근이 운영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정부가 본격적인 지원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제주순오름치유센터는 지난해 8월 출범한 마약 중독자 재활 시설이다. 제주도 서귀포시 안덕면에 축구장 절반 정도 크기인 4628㎡ 부지에 지어졌다.
센터는 과거 펜션으로 사용되던 3층 건물에 들어섰다. 건물에는 33~40㎡ 짜리 방 11개가 있었다. 1명이 방 1개를 쓴다. 흔히 마약 중독자를 치료하는 재활센터에는 여러 명이 한 방을 쓰는 경우가 많다.
입소자들은 기상 시간인 오전 8시부터 잠이 드는 오후 10시까지 시간 단위 일과를 보낸다고 한다. 오전에는 센터 주변 올레길이나 해안가를 걷는다. 이날도 청년들은 서귀포시 대정읍에 있는 마리해양군립공원 옆 해안가를 50분가량 걸었다. 취침 시간 때는 마약을 구할 가능성을 차단하고자 모든 전자기기를 수거한다. 매일 5시간가량 자유 시간에 청년들은 공부 독서 운동 등 각자 원하는 활동을 하곤 한다. 제주순오름치유센터 하용준 센터장은 “마약을 끊기 위해서는 규칙적인 생활이 첫 단추”이라며 “생활 습관이 엉망이면 유혹에 쉽게 빠져들어, 마약을 다시 시작할 위험이 있다”고 전했다.
특히 제주도는 마약을 끊기에 적합한 지역이다. 육지와 단절돼 있기 때문이다. 택배로 마약을 전달받아야 한다는 점이 언제든 마약 판매책과 접촉할 수 있는 육지에 비해 도움이 된다. 실제 센터에는 입소 문의가 쇄도하고 있는데, 센터 측은 “매달 20~30건의 문의가 접수된다”고 설명했다.
입소자들도 만족감이 크다. A 씨는 “전국에서 이만한 시설과 체계를 갖춘 재활 센터는 흔치 않다”며 “입소자 모두 마약을 경험한 적이 있어서, 서로 의지하며 같이 유혹을 이겨낼 수 있어서 좋다”고 말했다.
마약 재활 센터는 ‘마약은 질병’이라고 본다. 센터 측은 “암에 걸린다고 감옥을 보내지는 않는다”며 “마약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이런 개념은 해외에서는 이미 일반화됐다. 미국의 경우 처벌 중심주의 정책 효과가 미미하자 ‘마약 사범은 환자’라는 시각 전환이 이뤄졌다. 약물치료법원, 지역 사회 내 재활 프로그램 등 치료·교정 모델을 도입한 것이다. 이런 미국의 접근은 단순 처벌과 사회적 분리가 해답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국내에서도 인식 전환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 국회입법조사처가 2023년 5월 발표한 ‘마약류 중독자에 대한 치료적 접근의 실효성 제고 방안’에서는 “치료병원 및 재활센터 증설 등의 정책을 통해 중독의 재발을 낮추고 사회로의 복귀를 도울 수 있는 치료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현실은 센터 증설은커녕 기존 센터 운영조차 쉽지 않다. 실제 제주순오름치유센터에 대한 정부의 행정적 재정적 지원은 전무하다. 이 때문에 센터는 입소자들이 내는 비용과 기독교단체 2곳의 후원으로 부대 비용 일체를 충당한다. 입소자들이 매달 납부하는 100만 원은 숙식비로 쓰인다. 후원 금액은 매달 250만 원 정도다. 국가를 위협하는 마약 문제에 대해서 정부의 존재가 흐릿한 셈이다.
정부가 마약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자 전국 17개 시도에 설치한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는 마약 범죄 예방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한계가 뚜렷하다. 예산도 적을뿐더러 치료 재활 사업도 심리 상담, 예술치료 프로그램 등으로 보조적 역할에 그친다.
전문가는 제주순오름센터같이 마약 중독자 재활을 돕는 민간 시설을 제도권으로 편입할 방법을 고민할 때라고 지적한다. 인제대 간호대학 소속 박지영 교수는 “현재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는 마약 중독자를 집중적으로 관리하거나 재활까지 도울 수 있는 여건이 안 된다”며 “마약 중독자 재활을 돕는 민간 인프라를 제도권으로 편입시켜 마약 문제에 대해 총체적으로 대응하는 게 옳다”고 말했다.
김준현 기자 joon@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