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치주의의 위기… 사법부는 누굴 위해 존재하나

박석호 기자 psh21@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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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를 배반한 판사들' 출간… 판사들은 왜 불의와 타협하는가
법치주의가 공격받는 시대, 사법부 역할·한계 다룬 심층 보고서

헌법재판소는 위헌적인 비상 계엄의 책임을 물어 대통령을 파면했다. 대법원은 가장 유력한 대선 후보의 독주에 제동을 걸었다. 그러자 고등법원은 이를 다시 뒤집었다.

그러면 사법부는 한국의 정치권력을 쥐락펴락하는 가장 센 권력인가? 아니다. ‘서울서부지방법원 폭동 사태’는 사법부조차도 위기를 맞은 국가기관의 하나일 뿐이라는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책은 유럽 법학자의 시각으로 현대사에서 어두운 역할을 한 각 나라의 사법부를 다루고 있다. 저자인 노르웨이 오슬로대학 법학교수 한스 페터 그라베르는 법사회학, 행정법, 법수사학 등 다양한 영역에 걸쳐 법치주의와 법원의 역할을 연구해온 학자다.

독일의 나치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아르헨티나·브라질·칠레의 군사독재 정권, 자유주의 사회인 미국과 영국 등 여러 나라의 다양한 사례를 통해 ‘정의를 배반한 판사들’의 실상을 다뤘다.

저자는 이 책에서 다루는 사례들과 유사하게 한국도 권위주의 억압에 사법부가 공모한 역사가 있다고 지적했다. “강력한 행정부가 종종 사법부의 위상을 약화시켰고, 정치적 목표를 위해 헌법까지 개정했다. 한국은 규범국가 위에 특권국가가 작동하는 이중국가 체제로 변모했다” (저자 한국어판 서문)

오랜 기간 권위주의 체제에서 법원과 판사들이 수행한 역할을 연구해온 저자의 결론은 “전반적으로 판사들은 권력에 순응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로는 판사와 권력자는 동일한 사회집단에 속하며, 정권에 맞서려는 판사는 종종 사회적 지위와 경력을 박탈당할 위험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권력자들도 사법부를 길들이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동원한다고 했다. 언론을 장악해 ‘사법부은 부패한 집단’ ‘판사는 오만한 엘리트’라는 인식을 국민들에게 주입시키거나, 충성스러운 판사들로 최고법원을 구성해 사법부를 장악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사법부가 겪는 문제를 세 가지 질문을 중심으로 파헤쳤다. 첫째, 국가가 억압적으로 변하고 사법부가 그 억압에 기여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둘째, 억압에 협력한 판사들을 법적 관점에서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셋째, 그들의 행동을 도덕적 관점에서 어떻게 바라보고 억압에 맞서도록 독려할 수 있는가?

판사가 억압에 가담하는 일이 독재 정권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미국과 영국 같은 자유주의 사회에서도 가능하다는 점도 지적한다. 판사들이 ‘국가안보나 사회적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강력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정부의 주장을 받아들여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는 판결을 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가장 중대한 질문인 ‘민주사회에서 사법부와 판사들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공격받을 때 판사들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를 깊게 고민하고 성찰할 수 있게 해준다.

번역자인 정연순 변호사는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회장을 역임한 법률가이다. 사법현장에서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다뤄왔던 전문성을 잘 살려 원서를 한국 상황에 맞게 옮기는데 고심한 흔적이 엿보인다. 다만 유럽의 법률제도와 법철학이 복잡하고, 남미·아프리카 등의 사례가 낯설어서 그런지 일반 독자들이 술술 읽어나가기에는 다소 난해할 수도 있다. 한스 페터 그라베르 지음·정연순 옮김/진실의힘/488쪽/2만 7000원.


박석호 기자 psh21@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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