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님' 호칭

이상윤 논설위원 nurum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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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롯데그룹 계열사인 롯데홈쇼핑은 당시 김재겸 대표가 새로 취임한 뒤 ‘통일호칭제도’라는 것을 전면 도입했다. 보고 문화와 업무 방식, 교육 등에 전반적인 혁신을 이끌어내기 위해 대표이사를 포함한 모든 임직원을 대상으로 호칭을 ‘님’으로 통일하자는 것이 제도의 골자였다. 직급과 직책을 부르던 호칭이 폐지되자 사내 시스템과 문서에서도 직급 표기들이 서서히 사라졌다. 도입 초기 어색해 하던 직원들이 꽤 있었으나 집중 활성화 기간을 거친 뒤 친밀감과 만족도가 높아졌다는 자체 평가가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사내 호칭에서 직책이나 직급을 없애고 ‘님’과 같은 호칭으로 부르는 기업문화는 2000년대 들어 대기업과 IT기업 등을 중심으로 선구적으로 시행됐다. 때로는 ‘님’이라는 호칭도 생략하고 미국처럼 영어 이름이나 닉네임을 정해 더 편하게 부르는 실험을 해 보기도 했다. 해당 기업들은 한결같이 상명하복식 조직문화를 개선하고 직급 대신 순수하게 성과 위주로 평가가 가능하다는 점 등을 장점으로 내세웠다.

반면 일찌감치 이 같은 호칭 변경을 시도했다가 몇 년 만에 직책이나 직급을 표시한 명칭 사용으로 회귀한 기업들도 나왔다. 대표적인 곳이 IT기업의 맏형 격인 KT다. KT는 2010년께 팀장이나 실장, 본부장 같은 직급을 모두 ‘매니저’로 바꿔 부르는 방식을 도입했다가 2015년 직급 호칭을 부활시켰다. 호칭의 껍데기는 크게 바뀐 것 같았으나 실질적인 조직 내 소통 방식이나 위계 의식은 거의 변화가 없어서였다는 얘기들이 나돈다.

KT 외에도 상당수 기업들이 직책·직급을 없앤 호칭을 도입했다가 철회한 것으로 알려진다. 호칭만 수평일 뿐 수직 문화는 그대로였다는 비판이 가장 큰 이유였다. 존대 표현이 뚜렷한 한국어를 쓰면서 모든 자리에서 ‘님’과 같은 호칭을 쓸 수 없었다는 푸념도 만만찮다. ‘매니저’ 같은 호칭은 외부 인사에게 별도로 직책과 직급을 설명해야 하는 번거로움도 불편으로 꼽혔다.

기업들의 이 같은 호칭 변경 시도 과정에서의 시행착오에도 불구하고 최근 과기정통부가 직급 호칭을 없애고 ‘님’으로 호칭을 통일하려는 움직임을 보여 눈길을 끈다. 자체 게시판에서 불거진 각종 불만 해소책 차원에서 배경훈 장관이 자신을 부를 때도 ‘배경훈 님’으로 부르도록 하라고 먼저 제안했다는 후문이다. 위계에 따라 움직이는 공무원 사회에서 이 같은 시도가 어떻게 연착륙할 수 있을지에 벌써부터 큰 관심이 쏠린다.



이상윤 논설위원 nurum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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