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훈의 생각의 빛] 모시는 마음 가득한 새해 되길 소망하며
문학평론가
세대·젠더·계층 거리감 점점 격화
차별 의식 팽배에 우리 사회 위기
생명에 대한 인지 불능 자멸 불러
어김없이 새해를 맞이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지난 새해를 맞이했던 기억이 떠오르면서 지금의 기분과 교차한다. 만나서 이야기 나누는 사람들이 화젯거리를 떠나 공통으로 내뱉는 말이 시간이 참 빠르다는 것이다. ‘시간’이라는 말이 주는 어감과 의미는 때와 장소, 그리고 상황에 따라 변주되겠지만 늘 엇비슷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게 사실이다. 나이나 계획과 관련해서 더욱 그렇다. 새해를 맞았다는 산뜻한 기분 이면에는 한 살 더 먹는다는 일종의 ‘낭패감’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새해를 즈음해서 생겨나는 부산하고 어수선한 마음과 환경은 봄기운을 타고 넘어오는 따뜻한 공기에 스며들면서부터 본래의 일상 리듬과 감각을 되찾게 됨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해가 바뀌게 되면서 묵은 계획이나 일거리, 혹은 관계를 차근차근 되짚게 된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이런 과정에서 말끔하게 정리되어 다음 차례에 들어서면 되겠다고 생각하는 경우는 별로 없을 것이다. ‘서기(西紀)’로 표현되는 연도의 중요성을 감안해도 단지 ‘숫자’의 증가가 주는 일종의 ‘착시효과’가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시간의 절대적인 본질이라는 인식을 부채질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시간은 숫자로 범주화되어 고정된 실체로 돌변하면서 삶과 생활의 다양한 측면과 가치 영역을 가늠하는 기준이나 척도가 되어버린다. 지혜의 정도를 생물학적 나이로, 성공 여부를 자산이나 연봉 액수로, 능력이나 외모의 평가를 성적 순위나 신체의 비례로 곧잘 인식하는 편견이 우리 사회에 얼마나 퍼져 있는가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사회에서 단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한마디 거들면 ‘꼰대’가 되고, 가진 것 많다는 이유로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자칫 ‘졸부’로 전락하며, 능력이 뛰어나거나 잘생긴 외모는 자주 ‘뒷담화’의 주연이 되곤 한다. 비슷한 시간과 환경이 주어지더라도 결국 개인의 의지와 계획, 그리고 가치관에 따라 다양한 삶의 무늬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세상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나 사회일수록 욕구 불만과 조급증이 시간의 증가와 함께 자신을 옥죄는 올가미가 될 수도 있겠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경제 규모와 소득의 지표로 나라와 사회를 평가하던 시대는 이미 지났다. 삶의 만족도와 행복이 물질적 이득이나 수치의 증가와 비례하지 않는다는 말도 오래전부터 들어왔다.
능력과 재화의 우열로 순위를 결정하고, 이런 순위에 따라 삶의 성공과 가치 여부를 결정하는 사회가 지닌 가장 큰 병폐는 자신보다 열등한 자리에 있는 존재에 대한 우월감과 차별 의식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의식이 만연한 사회는 경쟁과 속도와 정보가 ‘미덕’이 되어버려 사회적 양극화, 그러니까 정서적 풍요와 빈곤의 격차가 벌어지면서 양극단에 자리 잡은 사람과 세대 및 계층 사이의 거리감이 점점 격화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요즘 ‘세대 차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연령별, 세대별, 성별, 지역별, 계층별 등에 따라 복잡하고 세분화된 인식의 단절을 떠올리면 될 것이다.
새해가 들어서면 지난날의 과오와 실수를 되새기면서 다시는 그런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마음도 아울러 다진다. 그런데 아무래도 사람인지라 마치 사계절의 순환처럼 똑같은 과오와 실수를 종종 범하게 마련이다. 문제는 개인적인 실수나 잘못의 범위를 넘어 타인과 사회에 악영향을 미치게 되는 경우다. 자기가 앉은 자리에서 지켜야 하는 최소한의 권한과 영역을 넘어 사익이나 감정의 편의를 부추기는 욕망의 메커니즘에 의지가 무릎을 꿇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특히 공직자가 이런 방향성으로 돌진할 때 생겨나는 폐해는 지난해부터 어지럽게 흘러온 ‘비상계엄 정국’의 혼란만 생각해도 될 것이다.
우리 사회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기후 위기를 비롯한 생태계 교란이 화두로 떠오른 지 오래되었다. 수많은 전문가와 학자들이 우리에게 경고한 말은 저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생명 경시 풍조만큼은 대체로 공통적이다. 직분을 넘어서는 권한 남용을 불러왔던 갖가지 차별 의식의 팽배는 이러한 생명에 대한 인지 불능과 관련이 있다. 김지하 시인(1941~2022)은 ‘가랑잎 한 잎/ 마루 끝에 굴러들어도/ 님 오신다 하소서/개미 한 마리/마루 밑에 기어와도/ 님 오신다 하소서’(‘님’ 중에서)라고 했다. 생명은 동식물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에 깃들어 있어서 이를 모셔야 한다는 자각이 생기지 않으면 아무리 새해가 거듭되어도, 아무리 풍족한 자리에서 여유를 부려도 ‘온탕 속 개구리’마냥 결국 자멸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이런 모시는 마음이야말로 위기에 빠진 이 사회를 소생하게 할 바탕임을 되새겨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