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오디세우스가 칼립소의 낙원을 떠난 이유
이국환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어릴 적 만화방으로 향하던 길은 내게 작은 모험과도 같았다. 눅눅하고 어두운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다 어머니에게 들키면 혼이 나곤 했지만, 주머니에 동전 몇 개만 생기면 나는 어김없이 골목 끝 만화방으로 달려갔다. 그곳에서 우연히 만난 〈율리시스의 모험〉은 신세계였다. 외눈박이 괴물과 세이렌의 매혹적인 노래, 끝을 알 수 없는 항해는 몇 번을 읽어도 질리지 않았다. 훗날 그 만화의 원작이 서양 문학의 시초로 불리는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최근 완역본으로 출간된 〈오디세이아〉를 다시 읽으며, 나는 유독 한 장면에 오래 머물렀다. 오디세우스는 귀향을 꿈꾸던 10년 중 무려 7년을 요정 칼립소의 오기기아섬에서 보낸다. 흥미로운 점은 이 긴 세월 동안 그의 행적이 거의 기록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마치 생이 정지된 것처럼, 호메로스는 그저 “칼립소가 그를 붙들어 두었다”고만 서술한다. 바다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는 그의 모습은 신탁을 전하러 온 헤르메스가 등장하는 순간에야 비로소 묘사된다. 7년이라는 세월이 단 몇 줄의 문장으로 압축되어 버린 것이다.
안락한 현재 속에 정체되기보다
불안하지만 미래로 향하는 선택
두 갈래 길 사이 망설이는 우리
선택 순간 각자 앞에 놓여 있어
칼립소는 오디세우스에게 영생을 제안한다. “나와 함께 있으면 늙지도 죽지도 않을 것”이라는 매혹적인 약속이다. 그럼에도 그는 결국 그 섬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는 왜 이 완벽한 낙원을 뒤로하고 다시 거친 파도 속으로 몸을 던진 것일까.
칼립소의 섬 오기기아는 결핍도 위협도 존재하지 않는 장소다. 그곳의 삶은 이미 완성되어 있어 선택의 고민도, 실패의 두려움도 없다. 이는 삶의 모든 책임으로부터 면제된, 휴식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다. 칼립소는 그저 지금의 그를 온전히 받아들일 뿐이다. “여기 머물러도 괜찮다”는 다정한 위로는 지친 인간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환대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안전함 속에서 그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그는 늙지 않지만, 더 이상 변화하지도 않는다. 서사는 멈추고, 삶은 정박한다.
고통이 거세된 자리에서는 이야기 또한 멈춘다. 오디세우스는 생물학적으로 존재했으나, 실존적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았던 셈이다. 이를 칼립소의 악의라고 볼 수는 없다. 불멸의 존재에게 정체(停滯)는 비극이 아닐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멸의 존재인 인간 오디세우스에게, 변화 없는 삶은 끝내 자신의 것이 될 수 없었다.
그가 돌아가려는 이타카는 안식처가 아니다. 다시 상처 입을 가능성이 열려 있는 거친 세계다. 늙어버린 아내와 알아보지 못할 만큼 커버린 아들, 집안을 유린한 구혼자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칼립소가 약속한 영원한 청춘에 비하면 이타카는 고단하고 위험하다. 그럼에도 그가 뗏목을 엮은 이유는, 신의 곁에서 누리는 완벽한 안락함보다 늙고 병들더라도 사랑하는 이들과 부대끼며 책임을 감당하는 삶을 택했기 때문이다.
결국 오디세우스가 칼립소를 떠난 것은 인간이라는 조건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실존적 선택이다. 안락한 현재 속에 박제되기보다, 비록 상처 입고 부서질지라도 내일이 존재하는 미래로 나아가기를 선택한 것이다.
오늘날 오기기아섬은 먼 신화 속 이야기가 아니다. 번아웃을 피해 무기한 휴식 뒤로 숨어버린 누군가의 모습으로, 혹은 안정적이지만 의미 없는 일상에 머물며 꿈을 유예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관계의 피로를 피해 자신을 고립시키는 선택 역시 또 다른 오기기아다. 이러한 쉼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다만 그 휴식이 다시 나아가기 위한 숨 고르기가 아니라, 삶으로부터의 도피가 될 때, 우리 삶은 흐르지 못하고 고인다.
〈오디세이아〉가 오늘날에도 우리를 흔드는 이유는, 우리 역시 매 순간 안락한 정체와 불안한 성장 사이에서 망설이기 때문일 것이다. 오디세우스는 결국 칼립소를 떠나 이타카를 향해 뗏목을 띄웠다. 그 선택의 순간은 지금도, 우리 각자 앞에 놓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