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원픽] 존재의 간절함 증명해 낸 곡

김준현 기자 joon@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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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번’

베토벤. 부산일보DB 베토벤. 부산일보DB

사람의 인생에는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 장면이 있다. 나에게 그런 순간을 하나 꼽으라면, 1980년 대학 입시를 준비하던 시절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번을 붙잡고 있던 시간이다. 당시 나는 작곡가를 꿈꾸고 있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피아노를 배운 적도 없었고 집에는 악기조차 없었다.

그러나 입시에서는 반드시 이 곡을 연주해야 했다.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결국 신문지 위에 피아노 건반을 그려 놓았다. 소리 없는 건반 위에 손가락을 올려놓은 채, 머릿속으로 음악을 만들어갔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방 안에서, 나 혼자만의 베토벤이 흐르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무모한 방식이었지만, 그때의 나는 절실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음악을 포기할 수 없었고, 그 곡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 했다. 그 시간은 단순한 연습이 아니라, 음악을 향해 버텨낸 시간이었다.

그렇게 외워서 연주한 베토벤은 완벽과는 거리가 멀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연주에는 기술보다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 그런 간절함 때문이었을까, 결국 나는 음악대학에 합격했고 그 경험은 내 삶의 방향을 바꿔 놓은 출발점이 되었다.

이후 오랜 시간 공연 예술의 현장에서 살아오면서 수많은 작품을 만났지만, 이 곡만큼은 한 번도 내 기억에서 떠난 적이 없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번은 나에게 단순한 음악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던 시절 나 자신을 증명했던 기억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최근 낙동아트센터에서 열린 공연에서 피아니스트 서형민이 이 곡을 첫 곡으로 연주했다. 첫 음이 울리는 순간, 나는 신문지 위에서 손가락을 움직이던 그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완벽한 음향 속에서 울리는 음악은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이 깊고 풍부했지만, 이상하게도 그 두 시간은 하나로 이어져 있었다.

그날 나는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느꼈다. 하나는 서툴고 부족했던 과거에 대한 부끄러움이었고, 다른 하나는 아무것도 없는 자리에서 시작해 끝내 그 무대에 서게 된 나 자신에 대한 대견함이었다. 어쩌면 그 연주는 나의 첫 공개 연주이자 마지막 연주였는지도 모른다. 이후 나는 연주자가 아닌 공연을 만드는 기획자의 길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선택 역시 그때의 경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지금도 나는 공연장에서 수많은 연주를 만난다. 그러나 내 음악의 시작은 여전히 소리가 나지 않던 신문지 건반 위에 있다. 그래서 누군가 내 인생의 원픽을 묻는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이 곡을 이야기할 것이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번. 그것은 내 음악 인생의 시작이자 오늘의 나를 만든 음악이다.

낙동아트센터 송필석 관장. 부산일보DB 낙동아트센터 송필석 관장. 부산일보DB


김준현 기자 joon@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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