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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캔버스에 담긴 삶의 스펙트럼
독일에 작업실을 두고 한국과 유럽을 오가며 활동하는 전원근 작가. 유명 갤러리와 미술관에서 꾸준히 개인전을 열며 전 작가는 어느새 미술판에서 믿고 보는 이름으로 통하고 있다.
10일까지 부산 해운대구 데이트갤러리에서 열리는 전원근 개인전 ‘빛이 머문 흔적들’은 앞서 인기를 끈 동그라미 시리즈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다. 전 작가는 빨강, 노랑, 초록, 파랑만 사용해 그림을 그렸다. 팔레트가 아닌 캔버스 표면에서 4가지의 색을 섞어 수많은 다른 색을 만들어 낸다. 한 획의 붓질이 마르기까지 기다리고 색의 변화를 관찰하고 다시 색을 올리다 보니 때론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일 년이 넘는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이번 전시에서 만나는 작품 역시 수십 번이 넘는 붓질과 물감이 마르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만든 결과물이다. 역시나 빨강, 노랑, 초록, 파랑 4가지 색을 물처럼 아주 연하게 희석한 후 천 위에 얇게 40~50번 이상 바르고 말리기를 반복한다. 이번 전시 작품을 하나의 과정이 더 들어간다. 바로 중간에 물감을 닦아내는 과정이다. 얇게 바르고 닦아내면서 형체를 거의 사라지게 한다. 이렇게 겹겹이 쌓아진 색들은 컨버스 밑에서부터 은은하게 우러나와 투명하면서 오묘한 빛깔을 낸다.
처음 작품을 보면 색칠된 그림이 아니라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흰 캔버스인가 싶다. 흰색의 스크린에 빛을 쏘아 영화를 보는 것처럼, 흰 캔버스를 천천히 응시하면, 안에 숨겨진 색상들이 언뜻언뜻 보인다. 캔버스의 옆을 보면 수십 번 물감이 흘러내린 흔적과 층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작품에서 느껴지는 깊은 공간감의 비밀이 여기에 있다.
수많은 물감층에는 작가의 경험과 조형 언어, 삶이 뒤섞여있다. 빈 캔버스에 담긴 다양한 삶의 스펙트럼이 전 작가의 작품을 매력적으로 보이게 한다.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빈 캔버스 같은 작품이 국제 아트페어에서 인기가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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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가 선보이는 마술…신비한 부산의 겨울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크리스마스를 맞아 부산에서 특별한 마술쇼가 열린다. 산타클로스로 분장한 마술사가 선보이는 마술 공연 등을 통해 한겨울의 소중한 추억을 쌓을 수 있다.
부산국제매직페스티벌 조직위원회는 오는 7일부터 15일까지 부산 중구 부산영화체험박물관에서 ‘크리스마스특집 매직 갈라쇼’를 진행한다. ‘크리스마스특집 매직 갈라쇼’는 올해 봄부터 시작된 제19회 부산국제매직페스티벌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프로그램이다. 제19회 부산국제매직페스티벌은 지난 3월 열린 매직 판타지아 시즌2를 시작으로 매직서커스, 매직컨벤션, 제6회 버스킹챔피언십 등의 프로그램으로 관객과 만났다. 이번 행사는 부산국제매직페스티벌과 부산영화체험박물관이 공동으로 주최한다.
이번 공연은 겨울 분위기를 물씬 느끼는 관객 참여형 마술을 관람할 수 있다. 영어로 진행되는 공연에서는 다양한 국적의 마술사들이 출연해 화려한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마술사 김종수, 카츠라가와 심페이, 빈센트 탄, 김원일이 출연한다.
산타클로스의 오프닝 세레모니를 시작으로 크리스마스와 어울리는 음악을 카드 마술에 녹이고 눈꽃으로 만들거나 공연 관람객이 직접 참여하는 퍼포먼스와 깜짝 이벤트 등이 준비됐다. 멘탈심리마술, 과일을 활용한 저글링 묘기도 감상할 수 있다. 공연장을 찾은 관람객은 마술도구, 즉석사진 등 특별한 선물을 받을 수 있다.
공연은 매주 토·일요일에 진행된다. 토요일은 오후 2시와 오후 5시, 일요일은 오전 11시와 오후 3시에 공연을 관람할 수 있다. 티켓 가격은 4만 원으로 네이버 티켓, 인터파크 티켓 등에서 구매할 수 있다. 부산영화체험박물관 내 시설들을 체험할 수 있는 패키지 티켓도 판매된다. 공연과 관련된 자세한 사항은 부산매직페스티벌 공식 홈페이지와 SNS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부산국제매직페스티벌 사무국(051-626-7002)으로 전화 문의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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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동적인 부산의 모든 것, ‘창작 칸타타’ 에 담았다
부산의 역사를 압축한 창작 칸타타 ‘가마釜 뫼山’이 초연된다. 부산시립국악관현악단, 부산시립합창단, 부산시립무용단, 부산시립극단, 부산시립소년소녀합창단 등 부산시립예술단 교향악단(시립교향악단·시립청소년교향악단)을 제외한 5개 시립예술단이 총출동하는 융복합 연합 공연이다.
2024 부산시립예술단 연합 공연 창작 칸타타 ‘가마釜 뫼山’은 오는 12~13일 오후 7시 30분 부산문화회관 대극장 무대에 오른다. 시립예술단이 2021년부터 3년간 연말 무대를 뜨겁게 달군 가족 뮤지컬 ‘크리스마스 캐럴’을 잇는 연합 공연이며, 새로운 ‘브랜드 공연’으로 안착할 수 있을지 기대된다.
작품은 부산의 태동부터 글로벌 허브 도시로 나아가는 부산의 역사, 사람, 미래를 담고 있으며, 웅장하고도 풍성한 국악 가락과 창, 춤, 극과 영상으로 화려하게 구성된다. 작시·대본 이청산, 작곡·편곡 조원행, 연출 김지용(시립극단 예술감독), 지휘 이동훈(시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 안무 서정숙(시립무용단 부안무자)이 주요 제작진으로 나서고, 5개 예술단 단원 외에도 소리꾼 최수정(경기민요 이수자)·장서윤(JTBC 풍류대장·MBC 소리의 탄생 출연), 소프라노 한아름(백석예술대 뮤지컬과 겸임교수), 바리톤 안세범(동의대 출강), 비보이 킬라몽키즈, 연희퍼포머그룹 처랏, 래퍼 제이통, 동래여고 학생(11명) 등이 출연하는 대형 프로젝트이다. 총출연자만 198명에 달한다. 러닝타임 약 100분.
지난달 27일 창작 칸타타 ‘가마釜 뫼山’의 제작진을 만났다. 작시와 대본을 맡은 이청산 시인은 “이번 작품은 부산이 걸어온 역동적인 역사와 자연을 바탕으로 부산 사람의 정신을 담았다. 부산의 자연과 시대별·지역별 특색, 그리고 자갈치시장의 인정과 의리, 나눔 정신도 주목했다”고 밝혔다. 이 시인은 “부산이 왜 살기 좋은 곳이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 되길 바란다. 부산에 대한 자긍심을 높이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전했다.
전체 5막 15곡으로 구성된 이번 작품은 산과 강, 바다를 품어 삼포지향(三包之鄕)으로 불린 부산의 자연과 역사, 사람을 담은 이야기로 전개된다. 예를 들면, 기장의 오랑대 전설(5번 곡), 정서의 유배지에서 탄생한 고려가요 정과정(6번), 조선의 하늘을 밝힌 장영실(7번), 임진왜란 때 왜군과 싸운 25의용단(8번), 3·1 일신여학교의 만세운동(9번), 6·25전쟁기 피란수도(10번), 그리고 부마항쟁(11번)이 펼쳐진다. 또 정이 넘치는 자갈치시장(12번), 구도 부산의 꿈과 부산 시민의 열정을 다룬 부산갈매기(13번)도 포함된다.
조원행 작곡가는 “칸타타라는 말이 다소 어렵게 느껴진다면 우리 식의 음악극으로 이해하면 된다. 이번 작품은 단막, 단막으로 연결돼 대중이 감상하기엔 쉬운 접근이 될 수 있다. 우리 국악기의 대중화, 국악의 대중화에 포커스를 두고 작곡해서 이지 리스닝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 “합창과 국악관현악, 그리고 솔리스트 대부분이 시 내용에 부합하는 내용과 정서를 장엄한 느낌의 곡으로 표현하지만, 전반적으로는 단조가 주를 이룬다”면서 “우리 역사와 음악이 참으로 슬픈 내력을 가졌는지를 새삼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조 작곡가는 이전에 ‘청주 아리랑’과 ‘우륵의 아침’ 같은 가무악곡 작곡해 성공리에 공연한 바 있다.
연출을 맡은 김지용 예술감독은 “정통 칸타타보다는 총체극에 가깝다. 곡과 곡 사이에 배우들이 나와서 앞뒤 상황을 알 수 있도록 연기한다. 다만 한 장면, 한 장면이 다 커서 그게 강점이 될 수도, 약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지휘를 맡은 이동훈 예술감독은 “국악관현악단 외에도 비보이 칼라몽키즈나 연희퍼포머그룹, 래퍼, 성악가, 소리꾼 등이 출연해 흥겨운 무대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면서 “올해로 창단 40주년을 맞은 시립국악관현악단이 준비하던 작품이 연합 공연으로 만들어져 더욱 책임감이 느껴진다”고 각오를 다졌다.
한편 제작진들은 “연합 공연인 만큼 웬만한 칸타타보다 훨씬 더 연습해야 하는데, 연습 일정을 맞추는 것과 다 함께 모여서 연습할 공간을 찾지 못해 힘들었다”면서 “향후에는 시립예술단 연합 공연의 경우, 총감독을 두는 것도 검토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입장권 R석 3만 원, S석 2만 원, A석 1만 원. 문의 051-607-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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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숲’ 연주로 만나는 한반도 민요의 향연
민요는 전통 사회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구전돼 온 노래다. 대개 특정한 작사자나 작곡자 없이 구전되면서 민중들의 사상, 생활, 감정을 담고 있다. 우리의 토속 민요와 통속 민요를 새롭게 작곡해 선보이는 민요의 향연이 펼쳐진다. 소리연구회 소리 숲 주최·주관으로 열리는 ‘민요, 세계를 만나다’가 오는 13일 오후 7시 30분 해운대문화회관 해운홀에서 관객을 맞는다.
작곡 발표회도 아닌데 이날 선보일 총 10편의 작품 중 7곡이 초연이고, 2곡이 개작 초연이다. 소리 숲 김지윤 대표는 “이번 공연에서 시도하는 민요의 새로운 변용은 단순한 민요 선율을 차용하는 것이 아니라, 민요를 활용한 작품의 다양성과 예술성에 중점을 둔다”며 “노동요와 마을 축제에서 신명 나게 부르던 방식을 합창으로, 서양악기와 국악기가 함께 편성된 앙상블은 전문 연주자 간에도 이해의 폭을 넓히고, 음악 애호가에겐 한국의 전통음악을 서양악기 협연을 통해 좀 더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감상할 기회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참여 작곡가는 부산과 서울, 해외에서 활동하는 신동일(작곡마당 대표), 백현주(루체테음악극연구소 대표), 진소영(동아대 교수), 오세일(인제대 교수), 성세인(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출강) 등 중견 작곡가와 노재봉(미국 예일대 작곡 음악 석사 과정), 김종완(서울대 음악대학 작곡과 석사과정 수료), 배성운(부산시립합창단 악보 담당), 김하은(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작곡과 전문사 졸업) 등 청년 작곡가, 그리고 현재 콰테말라에 거주 중인 신수정 작곡가 등 10명이다.
연주곡은 소리 숲 앙상블이 연주하는 국악기와 서양악기가 하모니를 이루는 전라도 민요 농부가를 주제로 한 실내악곡 ‘농부가’(개작 초연, 피리·첼로·25현가야금·장구·피아노), 남도 민요 ‘새타령’을 새롭게 해석한 ‘온갖 소리를 모른다 하여’(초연, 플루트·장구), 경기민요 방아타령을 재해석한 ‘방아타령-시대를 넘어’(초연, 피리·첼로·피아노)가 있다.
신민요 노들강변을 합창 음악으로 표현한 ‘노들강변’(혼성합창), 경상 민요 쾌지나칭칭나네 일부를 가사로 사용한 ‘은파’(초연, 무반주 혼성합창), 평안북도 민요 사슴타령으로 만든 ‘사슴’(초연, 소리꾼·북·혼성합창), 전남 신안군 가거도 멸치잡이 소리를 소재로 한 ‘바다에서 은빛 꿈을 꾸다’(개작 초연, 국악타악기·혼성합창)는 부산지휘자합창단(지휘 김강규)이 들려준다.
제주 민요 너영나영을 재즈 스타일로 만든 ‘너영나영’(초연, 생황·국악타악·소리)과 전래민요 새야새야와 칠레 민중가요에서 영감을 받은 탱고 스타일의 ‘블루버드’(초연, 피리·25현가야금·반도네온·첼로·장구·피아노)도 있다. ‘안녕하세요’(초연, 소리꾼·생황·국악타악)는 마야어로 노래한다.
소리 숲은 음악박사 김지윤을 주축으로 2014년 창단했으며, 한국의 전통음악을 바탕으로 서양의 클래식 음악·여러 장르의 곡을 함께 연주하는 등 기존 국악 연주 형태의 틀을 과감히 깬 새로운 콘텐츠로 주목받고 있다.
출연 김지윤(피리), 강정용(국악타악), 김미진(판소리), 김지영(가야금), 김현성(생황), 장예지(플루트), 김판수(첼로), 이진성(피아노), 왕진호(서양타악), 부산지휘자합창단. 입장료 R석 2만 원, S석 1만 원. 문의 051-744-5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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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읽기] 일의 기쁨과 슬픔
정부가 임시 공휴일 지정을 검토하고 있다는 뉴스에 설레는가. 내년에는 공휴일이 총 며칠인지, 명절 연휴는 어떻게 되는지 궁금한가. 역시나 당신은 직장인이 맞다. 월요일이 부담되고, 주말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린다면 ‘밥벌이의 무거움’에 대해서도 공감하는 사람일 테다. 원래 없으면 아쉽고, 있으면 부담스러운 게 ‘일의 슬픔’ 아니겠는가.
<그 일을 하고 있습니다>에는 일의 슬픔 대신 기쁨에 초점을 맞춘 인물 15명이 등장한다. 국회의원 보좌관, 변호사, 사회복지사, 유튜브 크리에이터, 전시 기획자 등 일의 종류도 다양하다. 이 중에는 메디컬라이터나 인공지능 리서치 엔지니어처럼 일반인들에게 생소한 직업도 있다. 저자들의 직업은 제각각이지만 일로 얻은 보람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공통점을 지녔다. 작가이자 변호사로 활동하는 정지우 씨는 “일은 그저 돈벌이 도구로 전락하고, 일이 주는 기쁨과 가치에 대한 깊은 성찰이 사라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들에게 일이란 가치 있는 삶의 또 다른 말이다.
책에는 반가운 인물도 등장한다. 부산 전포동에서 크레타 서점을 운영하는 강동훈 작가다. 강 작가는 10년 넘게 독서모임 운영자로 활동하다 책방지기가 됐다. 서점을 찾는 손님들에게 책 이야기를 전달하고, 취향에 맞는 책을 추천하다 보니 단골들의 발길이 잦아졌단다. ‘이 서점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책’이 동네서점을 특별하게 만든다고 영업 비밀도 살짝 공개한다. “동네서점의 본질은 책을 판매하는 장사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며 책방지기를 꿈꾸는 이들을 위한 현실적인 조언도 잊지 않는다.
일의 슬픔에 익숙한 직장인과 직업의 세계를 탐구하는 청년에게 이 책은 좋은 참고서가 될 수 있겠다. 직업을 갖는다는 건 어떤 의미인지, 어떤 사람에게 이 직업을 추천하고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에 대한 저자들의 솔직한 생각이 담겼다. 정필 외 12인 지음/멜라이트/368쪽/1만 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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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왜 자살을 결심했을까
“대한민국은 자살을 결심했다.” 다소 충격적인 표현이지만 왠지 납득이 가는 말이다. 우리나라의 ‘소멸’ 문제는 그동안 뉴스에서 반복해서 언급됐다. 인구 절벽과 초고령화 사회 진입, 지방 소멸 등의 사회 현상은 이제 우리에게 일상적인 단어로 자리매김했다. 수십 년 전부터 예고된 비극이었지만 누구도 막지는 못했다. 비극은 어느새 당연해지고, 점점 더 빠르게 우리를 찾아온다.
<압축 소멸 사회>에서는 ‘압축 성장’으로 성공을 거둔 대한민국이 어떻게 ‘압축 소멸’의 길로 접어들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수준인 저출생과 자살률, 수도권 집중 현상이 왜 발생했는지, 이에 대한 정치권의 대응은 어땠는지를 분석했다. 건국대 교수로 일하다 지난달 최연소 국회입법조사처장이 된 이관후 처장이 책을 썼다.
저자는 오늘날 우리나라를 위협하는 사회 문제들이 ‘압축 성장’의 결과라고 정의한다. 성공의 원동력이었던 발전주의, 성장 이데올로기, 능력주의, 개인주의가 한국 사회의 지속가능성과 공동체의 기반을 흔들고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선진국을 모방하던 ‘추격 국가’에서 선진국 반열에 오른 ‘추월 국가’가 되자 기존의 성장 방식들이 힘을 잃었다. 하지만 정치권은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다.
책 속에서 등장하는 저출생에 대한 진단이 날카롭다. 저자는 ‘잘 사는 삶에 대한 내러티브’가 청년들의 결혼과 출산을 막는 원인 중 하나라고 지적한다. 좋은 대학을 졸업하고 좋은 조건의 직장에 취업해 비슷한 사람과 만나 결혼해야만 잘 사는 삶이라는 인식은, 이 중 하나라도 충족하지 못하면 가족을 꾸려 아이를 낳는 것이 무책임한 행동이라는 인식과 연결된다. 이른바 ‘좋은 직장’에 들어갈 수 있는 인원이 전체 중 10%에 불과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잘 사는 삶의 기준이 너무 높은 셈이다. 청년들은 잘 사는 삶의 조건을 맞추기 위해 극심한 경쟁을 치러야 하고, 어느 순간 경쟁에 지쳐 좌절한다. 일명 ‘성공의 덫’이다. “경쟁에서 이긴 청년들조차 행복하지는 않다고 말합니다. 가장 심각한 것은 이 경쟁이 공정하지 않고 절대 공정해질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나 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를 낳지 않습니다. 나는 지옥에 살지만 내 아이까지 지옥에 살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38~39쪽)
압축 소멸의 가장 큰 원인은 정치의 부재에 있다. 선거를 통한 민주주의는 작동하지만 그 속에서 정치는 사라졌다. 계파정치와 심판 프레임에서 이러한 점이 잘 드러난다. 계파정치가 올바르게 작동하는지 살펴보기 위해서는 그 속에 정치적 가치가 담겨 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이른바 ‘친O계’로 표현되는 오늘날의 계파정치는 정치적 비전보다 친소 관계를 앞세우는 경우가 많다. 또 심판 프레임만을 주장하는 정치 세력은 인구 소멸·세계 질서 변화 같은 거대한 이슈보다 상대 정당의 실책에 관심을 둔다. ‘나라가 망할수록 자신에게 유리하다’는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다.
책은 윤석열 대통령을 포함해 주요 여야 정치인 한 명 한 명의 이름과 구체적인 사건을 들어 정치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윤 대통령이 여러 차례 언급한 ‘반국가 세력’이라는 표현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도 지적했다. 실제로 윤 대통령은 지난 3일 비상계엄 선포 담화문에서 ‘반국가 세력’이라는 표현을 또 사용했다.
최근 벌어진 ‘계엄 사태’로 우리는 정치의 필요성을 체감했다. 헌법이 보장하는 삼권 분립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도 알 수 있었다. 올바른 정치에 목마른 시민들은 매일 거리로 나와 투쟁을 벌이는 중이다. “사회의 소멸에 정치의 소멸이 선행한다. 모든 것이 좋아 보여도 정치가 없다면 언제든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그의 말을 허투루 여기면 안 될 것 같다. 이관후/한겨레출판/256쪽/1만 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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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읽기]“야들아, 사라져가는 경상의 말 단디 지키라”
■경상의 말들/권영란,조경국
그 말을 듣다 보니 잊은 줄도 몰랐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어렸을 때 서울 아이가 전학이라도 오면 “서울내기 다마내기”라며 놀려댔다. 그랬던 우리가 언제부터인가 경상도 안에서도 사투리를 덜 쓰는 사람이 더 교양 있는 사람이라 여기게 됐다. 유신정권 시절엔 국어순화운동, 표준말 쓰기를 전국적으로 장려했다. 경상도 출신 작가라 해서 경상도 말을 일부러 쓰지는 않았고, 경상도 지역 출판사라고 해서 경상도 말을 특별히 가치 있게 다루지도 않았다.
경상도 말에 대한 편견도 컸다. 경상도 남자는 집에 오면 딱 세 마디만 한다는 이야기가 한때 유행했다. “밥 도”, “아는?”, “자자.” 경상도 남자는 소통이 어렵고 타인과의 관계에 매우 서툴러 일방적이고 권위적이라는 인식이 깔린 말이었다. 지역균형발전을 외치고, 지역소멸을 걱정하면서도 지역의 말, 토박이말은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최백호는 “봄날이 오면은 뭐하노 그쟈/우리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데….”라고 노래했다. ‘그쟈’는 ‘그렇지’라는 뜻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공감을 바라는 따뜻한 마음이 더해져 있다.
욕 보이소, 접때맹키로, 단디해라, 쇳대, 주디 꼬매삔다, 끌베이가?, 니 어제 아레 뭐했노?,영~파이다…. <경상의 말들>을 보고 입에 올리니 가슴이 뭉클해진다. 시인 박목월은 “경상도 사투리에는 약간 풀 냄새, 이슬 냄새, 입안이 마르는 활토 흙 타는 냄새가 난다”고 했다. 대체로 사투리는 1950년 이전 출생한, 정규 교육의 기회가 부족했던 여성 노인의 입말에 가장 많이 남아 있다고 한다. 이 책은 “할매예, 할매 없으모는 인자 할매 말도 없어질건디 우짜꼬예”라고 우리에게 묻는다. 할매는 “만다꼬 그리 할끼고?”라고 물은 뒤 “단디해라”고 답하지 않을까. 권영란,조경국 지음/유유/218쪽/1만 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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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을 갈망하는 우리가 희망의 등불이 된다면”
■쉿! 내 안의 숨은 페이지들/이경희 외
“집에 TV, 냉장고, 세탁기 있는 사람 손 들어라!” 학교에서 이렇게 호구조사하던 시절이 있었다. 부모님의 학력도 물었다. 그럴 때면 우리 아버지는 중졸을 고졸로, 어머니는 국졸을 중졸로 올려서 적어 가라고 했다. 자식 기죽지 말라는 배려였을 것이다. 그렇게 안 하셔도 괜찮았다고, 이제 이야기한다.
<쉿! 내 안의 숨은 페이지들>은 배워서 남을 주는 사회복지사가 되기 위해 부산여대 사회복지학과에 모인 만학도들의 자전적인 이야기이다. 가장 어린 학생은 50대, 큰언니는 70대이다. 그저 그렇고 그런 이야기로 지레짐작했지만 오산이었다. 진솔한 글이 주는 생생한 울림이 컸다. 자존심에 남편과 자식에게도 차마 말하지 못하고 평생을 묻어둔 고름 보따리를 터뜨렸다는 표현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캐디와 학생을 병행하는 이경희 씨가 ‘세상은 꿈꾸고 행동하는 자의 것’으로 책을 연다. 노동자들에겐 ‘눈물 젖은 빵’이 설움의 상징이듯이, 캐디에겐 ‘물에 젖은 돈’이 그렇다고 한다. 7월에 많은 비가 내려도 골프장은 막판까지 휴장을 미루며 비가 잦아들길 기다린다. 그래서 캐디는 ‘대기 인생’이 되기 일쑤다. 성추행을 당하고 들어와 북받쳐 오른 설움의 눈물을 쏟아내다 용기 내어 맞서보려는 이야기가 가슴 아프다.
경희 씨가 대학에 면접을 보러 가던 날은 비록 골절 때문에 목발에 의지했지만, 발걸음은 구름 위를 걷는 듯 가벼웠단다. 대학이 현실의 벽을 넘어 다른 세상으로 향해 나아가는 탈출구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마침 다리를 다치지 않았고, 인생을 되돌아보지 않았다면, 새로운 삶을 꿈꿀 수 있었을까? 경희 씨는 배움이란 어떤 어려움에 부딪혔을 때 슬기롭게 헤쳐나가는 법을 깨닫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배미경 씨의 ‘엄마를 빛나게 한 초록 거북이’는 장애와 모성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주었다. 뇌성마비 장애인으로 태어난 둘째 아들 세웅이와 미경 씨에게 세상은 냉정하고 이기적이었다. “천벌 받았네”부터 “장애인 엄마 주제에”까지 너무나도 심한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미경 씨는 아이를 요양 시설에 맡기라는 주위 사람들과는 단절했고, 친정 식구들과도 삼 년간 만나지 않으면서 지냈다. 어린이집, 유치원, 초등학교까지 그야말로 전쟁의 연속이었다.
서서히 기적이 일어났다. 의사는 “뇌가 다친 걸 보면 이 아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런데 말을 이렇게 잘하는 건 의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라며 세웅이를 꼭 껴안아 주었다. 세웅이가 대학에 가던 해에 미경 씨도 같이 대학에 갔다. 대학에 오니 장애를 앓는 아이를 키우면서 답답하고 힘들었던 설움이 아득히 사라지고 있다고 고백한다.
이정례 씨는 ‘덤 인생 배움 통해 나아가리’라는 글을 썼는데, ‘덤 인생’이라고 한 이유가 있었다. 정례 씨가 초등학교 때 심하게 홍역에 걸려 병원까지 40리 길을 업혀 갈 때였다. 아버지는 “업고 가다가 죽으면 산에 버리고 묻어주라”고 했다. 평생을 친정과 시댁을 오가며 돌보는 삶을 살았던 정례 씨였다. 할머니도 배워야 손자도 돌볼 수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나이 60에 중학교 과정을 시작한다. 그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도와주는 게 역경을 헤치고 살아온 자신의 인생에 대한 보답이라고 믿고 있었다.
고달픈 세상에서 거친 파도를 이겨내는 삶을 살다 배움의 시기를 놓친 열세 명이 ‘작가’라는 타이틀로 우리 앞에 섰다. 이들은 “그동안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가슴 속 종양으로 곪아 가던 아픔을 용기 있게 세상에 드러낸 우리들의 이야기가 배움을 고민하고 갈망하는 많은 이들에게 힘이 되기를 소망한다”라고 말했다. 역시나 만학에 상인 운동가로서 〈골목상인 분투기>를 냈던 이정식 지도교수의 성원이 이 책이 나오게 된 밑거름이 된 것 같다. 자신을 되돌아보기 좋은 연말이다. 나는 학교를 어떤 마음으로 다녔는지 돌이켜보게 된다. 지금의 어려움을 견디고 내일을 준비하는 에너지가 흘러넘치는 책이다. 이경희 외 12인 지음/도서출판 동문사/216쪽/1만 65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