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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책방골목에도 봄이 오는 소리
‘책의 위기’가 시작된 지는 오래되었다. 우리만 그런 것도 아니다. 출판사와 독자가 많아 ‘출판 대국’으로 불리는 일본조차 서점 수가 지난 10년간 30% 감소했다고 한다. 롯데마트는 올해 초 25년 만에 종이 전단지를 전부 없애고 모바일 전단으로 대체하기로 했다. 사소해 보이는 종이 전단지의 종말, 어쩌면 먼저 온 미래일지도 모른다. 보수동 책방골목의 위기도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1980년대 후반 70여 곳에 달하던 보수동 책방골목의 서점은 현재 31곳으로 줄었다. 서점 업주들이 대부분 고령이라 달라지는 세태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70년 전통을 얕잡아 봐선 안 된다. 혹한 속에서도 변화의 새싹을 틔우고 있는 보수동 책방골목으로 가 보았다.
■우리는 책방골목 서포터즈
“시간이 지나서/다시 나타난다면/나도 잊기 싫어 돌아간다고 넌 전해줘/Hey man 그래도 내 동넨데/Way 없진 않지 버텨 주길 바라/I say 2년 뒤에 나 다시 돌아올게/난 가더라도 여기에 추억은 그대로길 바라.” 보수동 책방골목을 걷다 공사판 가림막 위에 인쇄된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을 만났다. 유튜브에서 찾아서 들은 ‘보수동, 그 거리(In 책방골목)’ 노래의 가사 일부를 옮긴 것이다. 혜광고 학생들이 직접 작사 작곡한 랩 스타일 노래다. 젊음이 발산하는 그 풋풋한 감성에 반해 플레이리스트에 바로 저장했다. 유튜브에 남겨진 댓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보수동 책방골목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수많은 어른들은 해내지 못했지만, 우리 친구들은 그들의 책방골목을 위해 무언가를 해냈다.” 고맙다 우리 친구들!
커피 향은 책 읽는 운치를 더한다. 아직 스페셜티 커피 ‘보수동 블렌드’를 맛보지 않았다면 어쩌면 책방골목을 제대로 둘러본 게 아닐지도 모른다. 부산 중구시니어클럽이 운영하는 보수마루북카페와 건강북카페에서 보수동 블렌드를 한 잔에 1000원이라는 파격적인 가격에 판매하고 있다. 동구 초량동에서 마리스텔라 커피를 운영하는 박성우·이정민 부부 바리스타가 지난해 보수동 책방골목 살리기에 동참하면서 보수동 블렌드를 기꺼이 내놓은 덕분이다. 보수동 블렌드 원두도 100g에 5000원으로 너무 착하다.
보수동 책방골목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에 있었다. 보수동 블렌드 개발을 제안한 혜광고 김성일 교사도 그 중 한 사람이다. 그는 동주여고에 근무할 때 학생들과 함께 〈보수동 책방골목 와보시집〉, 〈와보시집 두 번째 이야기〉를 발간했다. 혜광고로 자리를 옮겨서도 학생들과 〈보수동, 그 거리〉 시집을 출간하고, 뮤직비디오까지 제작한 것이다. 동아대 산업디자인학과 김재홍 교수와 학생들은 지난해 12월 굿즈 개발과 QR코드 활용 등 MZ세대를 책방골목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아이디어 발표회를 열어 관심을 모았다.
■아테네 학당, 핫플레이스 예감
“저게 뭐지?” 부산 중구 대청로 63 부근을 처음 지나가는 사람이면 꼭 하는 말이다. 전에 못 보던 5층 높이(16m)의 거대한 책 다섯 권이 책장에 꽂힌 듯 나란히 세워져 눈길을 끈다. 책의 모양을 한 이 건물이 ‘아테네 학당’. 보수동 책방골목 문화관 바로 옆에 위치했다. 아테네 학당은 르네상스 시대 거장 라파엘로가 바티칸 궁전의 교황 개인 서재에 그린 벽화의 이름이다. 벽화에 등장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각각 들고 있던 책을 형상화했다고 한다.
아테네 학당이 들어서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지난해 11월까지만 해도 건물주이자 건설회사 대표는 기존의 건물을 헐고 오피스텔을 지으려고 했다(〈부산일보〉 2022년 10월 18일 자 등 보도). 오래된 서점 3곳이 또다시 사라질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오피스텔 설계비까지 포기하고 리모델링으로 급선회한 건설회사 대표의 변심은 큰 화제가 되었다. 김대권 아테네 학당(신양건설) 대표는 “사정을 잘 모르고 건물을 매입했지만 상인들과 시민들이 책방골목 쇠락을 걱정하고 고민하는 목소리를 직접 듣고는 외면할 수 없었다. 수익을 어느 정도 포기하고 책방골목 되살리기에 힘을 보태기로 했다”고 말했다. 참고로 지난 3년간 재개발이나 임차료가 올라 폐점한 서점은 12곳에 달한다.
2월 말 개장을 목표로 마무리 공사 중인 건물 내부를 미리 둘러봤다. 역시나 ‘아테네 학당’ 벽화가 천장을 장식하고 있었다. 1층에서는 우리글방 등 기존 책방 3곳이 그대로 장사를 하고 있었다. 2층부터 4층까지는 카페와 문화공간이다. 서재 콘셉트로 꾸며진 공간은 ‘독서 모임방’으로 만들겠다고 했다. 벽화에 등장하는 아폴론·아테나신상,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등의 흉상도 이미 만들어져 곧 설치될 예정이다. 카페에서는 시그니처 메뉴와 커피를 준비 중이었다. 책을 펼친 모양의 ‘보수동 책빵’은 사진만 봐도 인기 폭발을 예감하겠다. 예전 문인들이 좋아했다는 각설탕을 올린 진한 맛의 시그니처 커피 이름을 고민하길래 ‘밀다원’을 추천했다. 밀다원은 피난 시절 광복동에 있었던 다방이다. 밀다원에는 김동리, 황순원, 김말봉, 이중섭, 김환기 등 문인과 예술가들이 상주하다시피 했다.
■헤이온와이, 관광객 오며 살아나
아테네 학당이 들어서면서 보수동 책방골목에 대한 관심이 다소 살아난 게 사실이다. 새롭게 책방골목을 주목하는 프랜차이즈까지 있다고 한다. 하지만 제비 한 마리가 봄을 가져오진 않는다. 책방골목이 지금은 겨우 연명만 하는 수준을 지나 임종을 기다리는 상태라는 냉혹한 평가도 있다. 책방골목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아테네 학당 건물이 기괴하게 보인다는 말도 한다. 사업가 김대권 대표의 생각은 달랐다. “거리가 활성화되는 느낌만 들면 사람들은 오지 말라고 해도 몰려온다. 그것은 돈이 돌기 때문이다. 보수동 책빵이 잘 팔리면 빵 공장도 책방골목에 만들 생각을 하고 있다. 아테네 학당이 잘 되어서 그 영향을 주변에도 미치고 싶다. 책 모양 건물이 몇 개 더 만들어지면 책방골목이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공간이 될 것이다.”
영국 남서부 웨일스의 작은 시골이자 세계 최초 책마을인 헤이온와이를 떠올린다. 헤이온와이의 창시자 리처드 부스는 “사람들은 헤이온와이에서 어떻게 책을 팔 수 있겠냐고 묻곤 했다. 헤이온와이의 누구도 책을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관광객들이 오면서 상황이 나아졌고, 책은 이 나라 문화의 완벽한 상징이 됐다”고 말했다. 한길사 김언호 대표는 보수동 책방골목을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고 싶은 책의 고향이라고 자주 이야기한다. 그는 곧 동네책방을 연다는 문재인 전 대통령이 머무는 평산마을에 가서 보수동 책방골목을 화제로 대화하기도 했다. 공간이 사라지면 추억도 함께 사라진다. 보수동 책방골목은 부산의 미래유산이다. 책을 세운 건물에 이어 책을 차곡차곡 눕힌 건물이 생기면 어떨까. 한글 디자인 건물도 좋겠다. 책을 테마로 한 게스트하우스나 맥주·와인을 한잔하면서 독서를 즐기는 북카페도 대환영이다. 보수동 책방골목의 르네상스를 기대한다. 박종호 수석 논설위원
2023-01-25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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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빨라지는 국민연금 개혁 시계
국민연금 개혁의 시계가 빨라지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신년사를 통해 노동·교육 개혁과 함께 연금 개혁을 속도감 있게 진행하겠다고 드라이브를 걸면서다.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 산하 민간자문위원회는 ‘연금 개혁 방향과 과제’라는 보고서를 제출하고 이달 말까지 개혁안 초안을 내놓는다는 계획이다. 보건복지부도 3월로 예정된 국민연금 재정추계 발표 일정을 이달 말로 앞당겨 속도감 있는 개혁 논의를 지원하기로 했다. 안정된 노후와 기금 고갈에 대한 불안감으로 국민연금 개혁 논의를 지켜보는 국민들의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국민연금 개혁 왜 필요한가
2018년 재정추계에서는 국민연금을 현행(보험료율 9%·소득대체율 40%)대로 유지하면 기금이 2042년 적자로 전환된 뒤 2057년 고갈될 것으로 분석됐다. 정부는 2003년 1차, 2008년 2차, 2013년 3차, 2018년 4차 등 5년마다 국민연금 곳간 상태가 어떤지 진단하는 재정추계를 해 오고 있는데 저출산 고령화로 기금 고갈 시기가 빨라지고 있는 것이다. 올해 발표될 5차 재정추계에서는 4차 때보다 1~2년 더 앞당겨질 전망이다. 국회예산정책처는 2039년 적자로 돌아서고 2055년 기금이 모두 소진될 것으로 예측했다. 한국개발연구원은 이 시기를 1년씩 더 앞당겼다. 어쨌든 현재의 20대들이 국민연금을 받아야 할 시기에는 기금이 모두 고갈된다는 이야기다.
■정치 논리에 밀린 개혁 논의
국민연금은 1988년부터 35년째 시행 중이다. 초기 보험료율 3%에 생애 평균소득 대비 연금액 비율인 소득대체율 70%를 보장하는 제도로 출발했다. 보험료율은 5년마다 3%포인트씩 9%까지 높이기로 돼 있었다. 문제는 적게 내고 많이 받는 구조와 고령화로 기금 고갈이 불을 보듯 뻔한데 개혁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데 있다. 35년간 개혁은 1998년과 2007년 두 차례뿐이었다. 김대중 정부 때인 1998년 소득대체율을 70%에서 60%로 낮추고 수급 연령을 60세에서 5년마다 1세씩 2033년 65세까지 늦췄다. 노무현 정부는 보험료율을 12.9%로 올리고 소득대체율을 50%로 내리는 방안을 추진했지만 국회 논의 과정에서 무산돼 소득대체율만 2028년까지 40%로 인하했다. 문재인 정부 때인 2018년 기금 고갈 논란이 커지자 더 내고 더 받는 개편안이 추진됐지만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흐지부지됐다. 24년째 보험료율은 9%를 유지 중이다. OECD 회원국 평균 18.3%의 절반 수준이다.
■용돈 연금 vs 노쇼 연금
국민연금과 관련해서는 본격적으로 노후를 준비해야 하는 5060 세대는 물론이고 첫 걸음을 뗀 2030 세대까지 전 연령대에서 불만이 높다. 5060 세대는 현재 용돈 수준으로 전락한 소득대체율을 높여야 생계에 실질적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60세 정년인데 63~65세인 연금 개시 시기까지 소득 공백 기간에 대한 문제 제기도 많다. 반면에 2030세대 사이에선 퇴직 후 연금을 받을 수 없을 것이라는 불만이 팽배하다. 수십 년 보험료를 내기만 하고 정작 자신이 받아야 하는 시기가 되면 기금이 고갈돼 국민연금은 떼이는 돈이라 생각한다. 가뜩이나 취업난 주택난 등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인데 기성 세대 연금까지 떠받쳐야 하느냐는 불만이다. 국민연금 논의가 자칫 세대 갈등의 도화선이 될 수도 있는 지점이다.
■더 내고 덜 받는 vs 더 내고 더 받는
민간자문위는 보고서에서 현재 연금 제도의 기본 틀은 그대로 두고 급여나 보험료율 등 주요 모수를 개혁하는 모수 개혁을 제안했다. 급여 수준을 그대로 두고 보험료율을 인상하는 방안과 소득대체율을 인상하고 그에 따라 보험료율도 인상하는 방안이다. 현행 9%인 보험료율을 2025년부터 매년 0.5%포인트씩 올려 2036년 15%까지 올리는 안 등이 알려지고 있다. 2033년부터 65세인 연금 수급 개시 연령을 67세로 늦추고 현행 59세인 의무 가입 연령도 상향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기초연금과 공무원·군인·사학 등 직역연금 개혁도 언급됐다. 민간자문위 공동위원장인 김연명 중앙대 교수는 “연금 수급 연령은 2033년 기준 65세인데 기대 연령이 증가함에 따라 이를 67세로 늦추고 현행 59세인 의무 가입 상한 연령도 더 늦춰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며 “연령 조정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안 그래도 심각한 노후 소득 공백과 연금의 신뢰도를 종합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자문위의 생각이다”고 말했다.
■프랑스 연금 개혁 전 세계가 주목
일본은 2004년 13.58%였던 보험료율을 장기간 조금씩 인상해 18.3%까지 올리고 연금액은 임금과 물가 상승을 반영하되 기대수명과 출산율에 연동하도록 해 지속가능성을 확보했다. 공무원연금과 국민연금 통합으로 형평성 불만도 잠재웠다. 일본의 개혁이 성공한 데는 장기간에 걸친 국민 공감대 형성과 고이즈미 총리의 결단이 주효했다는 평가다. 이런 가운데 프랑스 마크롱 정부가 연초부터 구체적 연금 개혁안을 내놓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개혁안의 골자는 보험료를 내는 기간을 늘리고 연금 수령 시기를 늦춰 기금 고갈을 막겠다는 것이다. 올 여름부터 법정 정년을 현 62세에서 2030년까지 64세 또는 65세로 높이는 것이다. 정년(60세)과 연금 수령 연령(65세)이 다른 한국과 달리 프랑스에선 정년을 채우자마자 연금을 받는다. 주요 노조 단체들이 파업으로 대응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아 연금 개혁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이 불가피해 보인다.
■노후보장·재정안정 두 토끼 잡을 수 있나
국회 특위는 다양한 논의와 각계 의견 수렴 후 최종안을 10월까지 국회에 제출한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다양한 이해 대립과 2024년 총선 일정을 감안하면 개혁 논의가 간단치 않을 전망이다. 우리 보험료율이 두자릿수인 다른 나라와 큰 차이를 보인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OECD도 우리의 보험료율이 지나치게 낮다고 본다. 결국 더 내야 한다는 데 무게가 실릴 수밖에 없다. 문제는 급격한 보험료율 인상 부담을 줄이기 위해 연금 수급 연령을 늦추고 가입 연령 역시 높이는 경우다. 더 오래 가입시키고, 더 늦게 연금을 수령하게 해야 기금 고갈 시점이 늦춰진다는 것인데 이럴 경우 정년 연장 논의가 불가피하다. 연금도, 소득도 없는 ‘공백’ 기간이 길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연금 개혁 논의가 본격화하면 자연스레 정년 연장 논의에 불이 붙을 것이란 관측이다. kyk93@busan.com
2023-01-11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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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이민 사회, 그 명과 암
유색인 프랑스 월드컵 대표팀 맹활약
2022카타르 월드컵 결승전. 아르헨티나의 우승으로 막을 내렸지만, 반전은 프랑스 킬리안 음바페(파리 생제르맹)의 발에서 시작했다. 끝난 게임이라고 생각한 순간, 음바페가 해트트릭으로 기적적인 반전을 이끌어 승부차기까지 끌고 갔기 때문이다. 까무잡잡한 피부의 음바페는 카메룬 출신 축구 코치였던 아버지와 알제리 출신 핸드볼 선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이민 2세다.
프랑스 대표팀은 후반 선수를 교체하면서 골키퍼를 빼고는 유색인 선수 10명이 그라운드를 누볐다. ‘무지개 군단’이었다. 프랑스 국가대표 선수 24명 중 18명이 유색인이다. 이 중 13명은 아프리카 이민 2세로 채워져 있다. 부상으로 못 뛴 카림 벤제마도 알제리계다. 선수들 대부분이 프랑스 식민 지배를 받았던 콩고민주공화국, 세네갈, 카메룬, 토고, 말리, 알제리 등 아프리카 출신이다. 경기 직후 월리엄 루토 케냐 대통령은 자신의 SNS에 “아프리카팀(프랑스 대표팀)은 훌륭한 경기를 펼쳤다”면서 아프리카 출신 대표팀 15명의 사진을 게재하기도 했다.
프랑스 인구 구성에서 백인이 80%, 아프리카계가 8% 정도인 점을 감안하면 유색인 선수 비율이 월등히 높다. 프랑스처럼 이민자 후손들과 조화를 이룬 국가의 팀들이 카타르 월드컵에서 눈에 띄었다. 축구의 본향 영국 대표팀과 벨기에 월드컵 대표팀도 아프리카계 이민자 2세 출신들이 맹활약을 펼치고 있다.
이민으로 피지컬 경쟁력 급상승
프랑스 축구는 이민자들로 인해 강해졌다. 국가 대표팀은 선수의 신체적인 한계가 일정해 경기 스타일을 급격하게 바꾸기가 어렵다. 하지만, 프랑스처럼 이민자 출신 선수들로 대표팀이 채워지면서 피지컬이 강해지고, 팀 운용에 폭발적인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이민자 계통 선수의 비율이 높아지는 것은 프랑스에 국한된 현상은 아니지만, 오랫동안 식민지를 운영한 프랑스는 그 역사가 깊다. 이것이 프랑스 대표팀 레 블뢰(파랑을 뜻하는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 애칭)에 영향을 끼쳤다.
1958년 레 블뢰가 스웨덴 월드컵에서 3위에 올랐을 때는 폴란드계 레이몽 코파는 최다 어시스트로 발롱도르를 수상했고, 모로코계 스트라이커 쥐스트 퐁텐은 한 대회 최다 13득점을 올리는 기록을 세웠다. 1984년 유럽선수권대회에서 프랑스는 이탈리아계 미셸 플라티니, 말리계 장 티가나, 스페인계 루이스 페르난데스 등을 앞세워 스페인을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했다.
1998년 프랑스 자국 월드컵에서 내전(1953년)을 피해 프랑스로 이민한 알제리계 지네딘 지단과 티에리 앙리, 릴리앙 튀랑 등 아프리카계 선수를 대거 앞세워 브라질을 3-0으로 꺾고 우승컵을 들었다. 2018러시아 월드컵에서도 카메룬계 사뮈엘 움티티, 음바페 등 15명의 이민자 가정 출신이 모여 월드컵 우승컵을 거머쥐면서 프랑스 대표팀은 ‘무지개 군단’이란 애칭을 얻었다.
이민, 인구 위기와 경제 침체 해결책
1985년 영국. 저출산과 고령화가 심각해지면서 65세 이상 인구 비중이 15%에 이를 정도로 늙어 갔다. 유럽에서 핀란드에 이어 두 번째로 늙은 나라였지만, 지금은 유럽에서 네 번째 젊은 나라로 탈바꿈했다. 과감한 이민 수용 정책이 주효했다. 분야별 전문성 등 요건을 갖춘 외국인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이민 정책으로 경제활동인구가 25%가량 더 늘어났기 때문이다. 저출산과 인구 감소가 심각하지 않은 유럽과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 국가의 공통점도 이민을 꾸준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순혈주의 울타리에 스스로를 가두고 있는 한국과 일본 등은 인구 감소의 위기에 허덕이고 있다. 대한민국 총인구는 2021년 5173만 8000명으로 1년 전보다 9만 1000명(-0.2%) 감소했다. 정부 수립 이후 처음이다. 2050년에는 노인 인구 비중이 40%대로 늘고 생산가능 인구는 절반으로 줄어든다고 예측했다. 심각한 국가 재난 사태를 맞게 된다. 근본 원인은 역대 최저 수치인 합계출산율 0.81명인 저출산 탓이다.
옥스퍼드대 데이비드 콜먼 교수는 “대한민국이 저출산으로 인한 인구소멸 1호 국가가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인구 소멸은 다름 아닌 국가의 소멸이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도 최근 트윗에서 “한국과 홍콩이 세계에서 가장 빠른 인구 붕괴를 겪고 있다”면서 “한국은 현재 출산율이 유지된다면 3세대 안에 인구가 현재의 6% 이하 수준으로 급감하고 대다수가 60대 이상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을 정도다.
다문화사회에 접어든 대한민국
한국도 프랑스 대표팀처럼 보다 강해지고, 지속적인 성장 동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출산 장려 등과 함께 외국인 이민을 대폭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이민을 인구 감소와 우수한 인력 확보 대안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지적은 끊이지 않았다. 한국과 비슷한 일본은 향후 50년 이내에 1000만 명의 이민을 받아들인다는 정책을 공식화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총인구 중 이민 배경 인구가 4.3%에 육박해 사실상 다문화 국가이다. 일부 지자체에선 15% 수준에 이르면서 사실상 다문화·다민족 국가다. 다문화 학생도 16만 명으로, 초등학생이 70%, 중학생 21%, 고등학생 9% 순(2022년 청소년 통계)이다. 우리나라 초·중·고교 전체 학생 수는 감소했지만, 다문화 학생 수는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경향을 보인다. 이민 온 외국인 배우자들과 자녀들이 인구 유지에 기여하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최근 10쌍 중 1쌍은 외국인과의 결혼이고, 농촌의 경우는 절반까지 이르기도 한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다민족, 다인종 사회로 접어들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문화적 정치적 포용 가능성은
만약 월드컵 한·일전 대표팀에 프랑스와 같은 이민자 위주로 선수가 채워진다면 국민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여전히 단일 민족 신화에 빠져, 단일 민족 팀을 구성하고 있는 한국과 일본에서 이를 정서적으로 수용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또한, 이슬람권 이민자 가정 출신 학생들이 소속된 학교의 단체급식에서 돼지고기를 두껍게 썰어 넣은 김치찌개나 부대찌개를 일률적으로 배식하지 못하는 기본적인 불편함부터 빈곤과 양극화 등 이민 선진국에서 벌어지는 각종 문제를 어떻게 대응할지는 미리부터 고민해야 할 과제다.
실제로 2018년 제주도의 예멘 난민 신청에서 보여 준 사회 혼란, 대구 이슬람 사원 건설 현장 ‘삶은 돼지머리 사건’ 등을 떠올리면 갈 길은 멀고 험하기만 하다. 무엇보다 단일 민족이라는 폐쇄적 대외관을 극복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하지만, 프랑스 레 블뢰처럼 우수한 이민자층을 수용할 경우 사회의 다양성과 전문성 확대, 국가 운용 능력 전반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국가나 사회, 조직이 우수한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다양한 배경을 갖춘 구성원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다양성이 능력을 이긴다’는 조직 원리 때문이다.
프랑스에서 오랫동안 연구 활동을 한 부경대 국제지역학부 안상욱 교수는 “프랑스 극우 정당 후보가 2022년 대선에서 결선 투표에 올라가는 등 반이민 감정이 고조되면서 언제까지 다인종에 대한 톨레랑스(관용)를 유지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면서 ”이민 사회의 장점과 함께 피로감과 불편함을 극복하고, 함께 살기 위한 다양한 방안을 이제부터라도 찾아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2022-12-28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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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질적 도약’ 앞에 선 한국 축구
카타르 월드컵이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다. 2022년은 한국 축구가 의미 있는 결실을 거둔 해로 기억될 것이다. 여기서의 ‘의미’는 12년 만의 16강 진출이라는 외형적 성적에 한정되지 않는다. 강호들을 상대로 ‘빌드업’의 가능성을 엿보았고, 이를 통해 어떤 팀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기본 틀을 구축했다는 무형의 성취 또한 소중하다. 한국 축구는 이전과는 다른 수준의 질적 도약 앞에 선 것이다. 이제 월드컵을 준비하고 치르면서 겪은 일들을 냉정히 돌아볼 때다. 잘한 것은 이어 가고 부족한 것은 보완해야 더 나은 미래가 있는 법이다.
조별리그 32개국 경기 살펴보니
한국의 이번 16강 진출은 그 어느 나라보다 드라마틱했다. 해외 유명 스포츠 매체들도 한국팀의 경쟁력을 높이 샀다. “엄청난 부담에도 열세를 극복하고 (포르투갈이라는) 유럽의 거인을 꺾었다.”(ESPN) 그래서 한국은 다음 월드컵에서 가장 ‘멀리’ 갈 팀 중 하나로 당당히 평가받는다. 어린 선수들의 부각, 해외 진출에 대한 기대감, 여기에 더해 더 많은 ‘보석’의 발굴까지 겹친다면 장래가 밝다는 전망이다.
이번 월드컵의 한국 플레이를 분석한 결과가 있다. 글로벌 축구 통계 업체 ‘옵타’와 국제축구연맹(FIFA) 매치 리포트를 근거로 조별리그 결과를 들여다본 수치다. 한국 축구의 약점이 현저히 개선되고 있지만 여전히 한계를 지니고 있음을 가감 없이 보여 준다.
한국은 상대 진영에서의 볼 탈취 부문에서 독일에 이어 잉글랜드와 함께 공동 2위를 기록했다. 전방 압박이 위협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42개 슈팅으로 4골을 만들었으니 슈팅 수 대비 성공률은 9.5%로 낮았다. 패스 성공률은 81.5%(15위)로 나쁘지 않았으나 여전히 롱패스 비율이 14.9%(9위)에 달할 정도로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페널티 구역 안으로 공을 배달하는 크로스의 의존도도 78%(4위)로 아주 높았으나 이에 비해 성공률은 30.5%(7위)에 그쳤다.
반면, 상대가 볼을 갖고 공격할 때 10차례 이상 패스를 허용하면서 페널티 구역 안으로 패스 또는 슈팅까지 내준 경우는 9회로 공동 6위였다. 상대 공격을 끊는 수비에 취약했다는 의미다. 16강 진출이라는 성적 속에서도 공수에서의 이런 취약점들은 보완해야 할 부분이 아닐 수 없다. 한편, 게임당 실책은 32개국 중 가장 적은 53.7개로 고무적인 기록을 보였다.
한국 축구 가능성 높인 벤투호
파울루 벤투 감독이 일군 가장 큰 성과는 한국 축구의 체질을 바꿨다는 데 있다. 강호들을 만나면 움츠러들어 수비하기에 바빴고 공격 땐 ‘뻥 축구’에 의존했던 한국은 이제 어떤 상대를 만나든 밀리지 않고 준비했던 플레이를 구사할 줄 알게 됐다. 벤투가 한국 축구의 장단점을 면밀히 파악하고 우리만의 색깔을 입히는 데 정성을 다한 결과다. 이는 세밀한 패스를 기반으로 한 후방 빌드업, 빠른 움직임을 통한 전방위 압박으로 요약된다. 변화가 하루아침에 이뤄질 리 없고 당장의 성과가 없으면 비판과 질책에 시달려야 하는 감독 입장에서는 이런 일관적인 담금질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성과는 이번 월드컵 본선에서 입증됐다. 빌드업을 통한 능동적, 공격적 플레이는 축구 강호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았다. 후방부터 파이널 서드(상대 골문에서 40m 공간)까지 세밀한 직조를 통해 경기를 주도하는 현대적인 축구로 한 단계 발전한 것이다.
지도자로서 벤투 감독의 역할도 긍정적 평가가 가능하다. 벤투는 무엇보다 선수 보호에 최선을 다했다. 선수 부상이나 컨디션 관리에 집중했고, 언론에 비판받는 선수들은 기자회견을 자청해 감쌌다. 경기에 패했을 때도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면서 선수 탓을 하지 않았다. 용병술은 일부 비판을 듣기도 했지만 편견 없이 선수들을 발굴하고 기용했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벤투호는 월드컵을 위해 4년 세월을 한 감독에게 맡긴 한국축구사 최초의 결실로 기록될 만하다.
K리그 활성화와 함께 가야
지금은 한국 축구의 새로운 중흥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는 시점이지만 한국 프로축구 K리그의 활성화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K리그는 말 그대로 한국 축구의 뿌리다. 내년이면 개막 40주년을 맞는 K리그는 아시아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 최다 우승 타이틀을 거머쥔 맹주다. 이번 월드컵에서도 한국의 5득점 중 4골을 ‘K리거’가 넣었다.
아쉽게도 K리그의 인기는 일본과 비교하면 한참 떨어진다. 일본 J리그의 평균 관중은 우리의 4배 수준이다. 무엇보다 일본 정부의 과감한 투자가 부럽다. 일본은 독일에 거점센터를 만들어 해외파 배출과 효율적인 관리에 진력한다. 이번 월드컵에서 일본 최종 엔트리 26명 중 19명이 유럽파였다. 일본축구협회가 유럽의 큰물에서 놀 수 있도록 통 큰 지원을 한다는 얘기다. 물론 유럽파가 능사는 아니겠지만 한층 강한 상대들과 부딪쳐 경쟁하고 국제적 흐름을 파악해야 성장할 수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일본은 ‘2050년 축구 선수 1000만 명 확보 및 월드컵 우승’이라는 원대한 프로젝트를 세웠다. 우리도 장기적 안목에서 한국 축구의 새로운 중흥을 위한 마스터플랜을 짜야 한다. K리그에 대한 관심에 더해서 인프라와 유소년에 대한 과감한 투자가 여기에 포함된다.
긴 호흡으로 풀어 갈 숙제들
월드컵에서 한 번 효과를 거두는 것과 이를 유지하면서 더 높은 차원으로 끌고 가는 것은 다른 문제다. 벤투가 강조한 빌드업은 소기의 성과를 거뒀지만 이번 월드컵에서 득점으로 이어지는 결과는 없었다. 점유율에 기반한 축구 철학에 대해 객관적인 평가의 시간을 충분히 가질 필요가 있다. 전문가들도 대체로 “벤투의 유산을 최대한 살리되 압박과 역습, 스피드 등의 한국 특유의 강점을 접목해 나가는 일이 중요하다”는 목소리다.
벤투호의 완주는 축구협회의 믿음과 지원으로 가능했다고 본다. 그동안 월드컵마다 반복되던 감독 교체의 악순환에서 벗어났고 여러 차례의 위기와 비난 앞에서도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4년간의 동행에 성공했다는 자체가 기념비적이다. 그러나 더 높은 도약을 위해, 도약의 동력을 얻기 위해 해결해야 할 숙제도 적지 않다.
벤투 감독이 지난 7일 대표팀을 떠나면서 이런 말을 했다. “그라운드 안에서 일어나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라운드 밖에서의 준비나 지원도 중요하다.” 지난달 10일 카타르를 떠나기 전 기자회견의 발언은 한층 직설적이었다. “(한국에서) 선수 휴식은 필요 없고 중요한 건 돈, 스폰서 이런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요지인즉슨, 선수들의 혹사에 대한 우려였다.
이는 막판에 불거진 ‘2701호 사태’와도 무관치 않다. 그것은 개인 트레이너들과 대표팀 정식 의무팀과의 갈등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2701호의 깊은 속사정을 알 길은 없지만 학연과 지연, 혈연처럼 연줄이 작동하는 시스템은 더 이상 바람직하지 않다. 축구협회의 참된 역할은 이런저런 쓴소리와 공정성 시비 등을 해소하는 데 있다. 이런 노력들이 모이고 모여 한국 축구의 미래가 '빌드업'된다.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
2022-12-14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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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금융투자소득세 시행 유예?
국내의 주식 투자 인구는 대략 1300만~140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주식과 관련한 금융상품 투자는 연령과 계층을 가리지 않는 전 국민의 가장 보편적인 재테크 수단이 됐다. 특히 저금리 시기를 거치는 동안 대출까지 받아 주식 관련 상품에 투자하는 열풍도 일었다. 주식 투자가 국민적인 재테크 수단이 되면서 투자자들은 이와 관련한 정부 정책에 대해 예전보다 훨씬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적극적인 목소리를 낸다.
최근 정부·여당과 야당 간에 치열한 공방이 벌어지고 있는 금융투자소득세(금투세)가 대표적이다. 주식, 펀드 등 금융투자 상품의 소득에 세금을 부과하는 금투세의 내년 시행 여부를 놓고 정부와 여당 그리고 이에 맞선 야당은 새해가 한 달밖에 남지 않은 지금까지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다. 업계와 투자자들은 불안감 속에 이 문제가 어떻게 진행될지 술렁이고 있다.
■2년 전 여야, 2023년부터 시행 합의
금융상품 투자자들 사이에 초미의 관심사가 된 금투세는 기본적으로 주식 등 투자로 돈을 벌었을 경우 여기에 부과하는 세금이다. 구체적으로는 대주주 여부와는 별개로 주식, 펀드, 채권 등에 투자해 연간 5000만 원 이상을 벌었을 경우 여기에 22~27.5%(지방세 포함)의 세율을 적용해 세금을 원천징수 하는 것이다.
현재 주식 관련 세금으로는 코스피나 코스닥에서 주식을 매매할 때 각각 0.23%의 세율로 내는 통칭 증권거래세가 있다. 이는 이익·손실 여부와 관계없이 모든 투자자에게 부과된다. 또 주식 거래를 통한 양도소득세도 있는데, 이는 특정한 주식 종목을 10억 원 이상 혹은 일정 규모 이상의 지분(코스피 1%, 코스닥 2%, 코넥스 4%)을 소유하고 있을 때 해당된다. 따라서 보통 투자자라면 주로 증권거래세가 적용된다.
하지만 증권거래세는 소득 발생에 따른 부과가 아니라 거래 성사에 따른 부과로 후진적인 과세 방식이라고 지적받아 왔다. 게다가 ‘소득이 있는 곳에 세금이 있다’는 원칙과도 맞지 않았다. 이에 따라 2018년 12월 문재인 정부 당시 출범한 자본시장 활성화 특위를 통해 금투세 부과가 본격적으로 논의됐다. 그 결과, 2020년 12월 여야 합의로 세법 개정을 통해 2년간의 유예 기간을 거친 뒤 2023년 1월 1일부터 시행하기로 확정됐다.
■정치 상황 격변, 다시 오리무중
예정대로라면 내년부터 시행될 금투세가 삐걱거리기 시작한 것은 올해 5월부터다. 윤석열 대통령이 금투세 폐지를 언급하면서 다시 논의가 시작됐다. 저금리에서 고금리로 금융정책 기조가 바뀌면서 주식시장이 큰 폭으로 하락하기 시작한 데다, 경기 침체로 분위기마저 좋지 않은 상황에서 출범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새 정부가 금투세를 강행하기가 부담스러워진 것이다.
새 정부는 이 같은 기조를 반영해 금투세 도입을 2년간 재연기하는 내용의 세법 개정안을 올해 국회에 제출했다. 공은 야당인 더불어민주당 쪽으로 넘어간 형국이다. 그런데 이를 둘러싼 민주당 내 분위기는 다소 어수선하다.
본래 금투세 시행은 민주당의 당론이었다. 애초 민주당 정권에서 합의된 내용이고, 이제 와서 또 시행을 연기한다는 것은 현 정부의 ‘부자 감세’에 동조하는 꼴이라는 것이다. 일부에서 제기하는 ‘금투세=세금 폭탄’이라는 지적에 대해서도 전체 투자자의 1% 규모인 15만~20만 명 정도가 과세 대상에 해당할 뿐이라는 민주당 유동수 의원 등의 분석 자료를 제시하며 일반 투자자들의 세 부담은 사실상 없다고 반박해 왔다.
이런 민주당의 기류에 이상 조짐이 나타난 것은 지난달 중순 이재명 대표가 비공개 최고위원회의 석상에서 금투세 유예를 시사하는 듯한 발언을 한 사실이 알려지면서부터다. 이 대표가 “현재 주식시장 상황을 고려할 때 금투세 강행을 고집해야 하느냐”는 취지로 언급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민주당 내에서 이 대표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오면서 금융정책인 금투세는 어느새 정치 문제로 비화했다.
당내 의견이 분분해지자, 민주당은 정부가 제출한 금투세 관련 세법 개정안에 일정 조건을 덧붙여 2년간 재유예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증권거래세를 0.15%로 더 낮추고(정부안은 0.20%), 주식 양도소득세의 부과 조건인 대주주 기준의 상향(가족 합산 10억 원어치 보유→ 개인 100억 원어치 보유) 방침을 백지화하는 게 그 조건이다. 하지만 정부는 민주당의 이 절충안을 거부했다.
■여야 공방에 투자자들만 혼란
2023년 새해가 코앞으로 다가왔지만, 현재로선 뚜렷한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다. 금투세를 둘러싼 지지와 폐지 주장에는 각각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지지하는 측은 현재 주식·채권·펀드 등 상품 유형별로 설계된 복잡하고 형평성에 맞지 않는 과세 체계를 금투세를 통해 정리할 수 있다고 한다. 또 총 금융투자에서 손실이 발생해도 과세하는 문제도 개선할 수 있다. 반면 폐지를 주장하는 측은 부과 대상이 개인 투자자로, 오히려 외국인 등 특정 세력은 제외되고 또 이른바 ‘큰손들’이 한국 주식시장을 떠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적은 세율 차이에도 민감하고 국내 주식시장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큰손들이 빠지면 한동안 더 침체를 겪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여론도 엇갈린다. 한국주식투자자연합회가 지난달 18일 밝힌 리얼미터 조사 결과를 보면 금투세 도입에 부정적인 응답 비중이 57.1%로, 내년 시행 의견(34.0%)보다 많았다. 그러나 일주일 뒤인 25일 발표된 갤럽의 정례 여론조사에서는 43%가 ‘내년 1월 시행’을 찬성했다. ‘가급적 늦춰야 한다’는 의견은 41%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금투세 문제는 정부·국민의힘과 민주당 간 대립에다 민주당 내 논란까지 얽히면서 해결이 쉽지 않은 상태다. 게다가 금투세 등 내년 세제개편안을 처리해야 하는 국회 조세소위원회는 지난달 24일부터 가동 중단 상태다. 이 때문에 국회 세제개편안의 법정 시한(12월 2일) 준수는 현재로선 물 건너간 분위기다.
전문가들은 증시 상황에 따른 금투세 유예 논란은 접근 방식이 적절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모든 소득에 과세한다는 원칙을 감안한다면 계속 뒤로 미루기보다는 낮은 세율로 일단 시작한 뒤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절충점을 찾는 게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하지만 금투세 논란은 이미 정치 쟁점으로 비화한 상황이다. 결국 여야 정치권이 타협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는 형편인데, 현재 얼어붙은 정국을 감안하면 여야의 견해 차이가 쉽사리 해소될 것 같지도 않다.
새해는 벌써 저만치 다가와 있는데, 투자자들 사이에는 새로운 세금이 시행되는지, 아니면 유예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어 혼란과 불안감만 감돈다. 어떤 식으로든 정부와 정치권이 결론을 내줘야 한다. 그래야 속이 타들어 가는 투자자들이 예측가능한 연말연시를 보낼 수 있을 것이다.
2022-11-30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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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수도권 과밀화의 폐해
이달 9일 정부는 코로나19 확진자가 또다시 급증세를 보이자 7차 유행이 본격화했다고 공식 선언했다. 지난 14일 두 달 만에 7만 명을 넘어선 하루 신규 확진자 가운데 서울과 인천·경기 등 수도권 비중이 55.6%나 된다. 지난달 29일 발생한 서울 용산구 이태원 참사 희생자가 16일까지 158명(부상 196명)으로 늘어나 추모 분위기가 지속되고 있다. 12일 수도권에는 3시간가량 내린 50mm의 비에 쓸린 낙엽 더미가 배수구를 막는 바람에 침수된 곳이 속출했다. 수도권의 기록적인 폭우로 수십 명의 사상자와 막대한 재산 손실을 초래한 물난리를 겪었던 지난여름의 악몽이 되살아난 순간이었다.
■뭉치면 죽고 흩어져야 산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라는 명언이 있다. 1945년 10월 17일 임시정부 환국 환영회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이 해방 후 좌우익으로 분열된 국민의 대동단결을 호소하며 강조한 말이다. 앞서 1754년 미국 건국의 아버지이자 계몽주의 사상가인 벤저민 프랭클린이 같은 말을 남겨 미국이 자유를 얻기 위해 영국과 싸운 독립전쟁에 큰 힘이 됐다. 2600년 전에는 그리스 우화작가 이솝이 “뭉치면 서고 흩어지면 넘어진다”고 말했다. 고대부터 서양인들 사이에 강했던 개인주의 성향을 비판한 것일 테다.
지금은 반대로 “뭉치면 죽고 흩어져야 산다”는 말이 세간에 회자한다. 3년에 걸친 코로나 팬데믹 탓에 분산의 중요성을 절감해서다. 사회적 거리 두기가 바로 그것이다. 겨울철 코로나 대유행이 우려되는 만큼 방역을 위해 사람이 많이 몰리는 장소를 삼갈 당위성은 여전하다. 올해 수도권에서 빚어진 안타까운 대형 재해와 재난 역시 과밀화에 대한 경계의 필요성을 대변한다. 선진국 대한민국의 부를 상징하는 서울 강남에서 8월 8일 대규모 침수 피해와 교통대란이 일어나고, 대통령실이 위치한 데다 외국인이 즐겨 찾는 용산에서 핼러윈 압사 참사가 생긴 건 과도한 인구 집중이 근본적인 원인으로 분석된다. 재난과 안전사고에 취약한 수도권 과밀화 해소와 인파 관리를 위해 철저한 대책 마련이 절실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수도권 과밀화의 심각성
2020년 초 국토 면적의 11.8%에 불과한 수도권에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 수도권 인구는 2596만 명으로 비수도권 2582만 명을 앞질렀다. 지지난해 수도권의 인구 증가율은 1970년 대비 184.4%에 달했으나 비수도권은 11.7%에 머물렀다.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에 인구가 지나치게 집중되면서 과밀화가 심해진 까닭이다. 현재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인구 차이는 14만 명 정도지만, 50년 뒤 200만 명대까지 벌어질 것으로 통계청은 전망한다. 인구와 함께 자본과 기술을 가진 기업들도 수도권으로 쏠리면서 수도권 일극체제가 공고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수도권은 국내 모든 걸 빨아들이는 힘이 엄청나 진공청소기나 블랙홀에 비유되곤 한다. 반면 비수도권은 진학이나 취업, 창업을 위해 수도권으로 떠나는 젊은 층의 유출과 인구 급감으로 황폐화가 불가피하다. 기형적으로 비대해진 수도권과 지방 간 양극화의 심화는 국가경쟁력을 떨어트린다는 점에서 여간 심각한 폐단이 아니다.
수도권의 경우 끊임없이 유입되는 인구와 기업의 수요를 급히 해결하기 위해 난개발에 나서면서 도시 인프라와 편의·방재 시설을 제때,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다. 이상 기후로 증가세를 보이는 예측하기 힘든 자연재해에 대처하기 어렵고 각종 사고에도 취약할 수밖에 없는 구조인 셈이다. 올여름 거대한 물바다를 이룬 서울 강남 일대가 대표적이다. 한강변 저지대에 개발돼 상습 침수지로 꼽히지만, 거대 예산이 소요되는 빗물 저장 터널이 부족해 폭우나 홍수 피해를 크게 입는 사례가 잦다. 서울에 즐비한 반지하 주택도 그렇다. 서울 지하철과 서울~수도권 광역버스의 혼잡은 늘 불안하다. 코로나 사태에서도 초과밀화한 서울의 문제점이 여실히 드러났다. 의료 인프라와 방역 시스템이 어느 지역보다 우수하고 잘 갖춰졌는데도 서울 확진자 비중이 압도적이며 전국 확산과 재유행의 사다리가 되고 있는 실정이다.
■실효성 없는 지역균형발전
정부가 수도권 집중에 따른 부작용을 해소하는 데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82년 수도권정비계획법이 제정돼 수도권 기업에 대한 규제가 강화됐다. 정부는 수도권 기업에 부담금을 부과하거나 신·증설을 억제하는 규제를 통해 기업의 지방 이전을 유도했다. 하지만 2008년 글로벌 경제 위기 극복을 이유로 수도권 입주 조건 등 기업 규제를 완화했다. 이 바람에 수도권 기업의 지방행은 급감했으며 신규 기업 또한 수도권에 둥지를 틀기 일쑤다. 사람과 기업의 수도권 유입 방지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게다. 그런데도 수도권에서는 지역 발전을 내세워 주택 보급 확대와 추가적인 규제 완화를 촉구하고 있어 과밀화를 부채질한다.
전임 문재인 정부와 현 윤석열 정부의 지역균형발전 정책도 생색내기에 그치며 겉돌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가균형발전위원회는 대통령 자문기구에 그쳐 중앙 관료들에게 팽배한 수도권 중심주의조차 극복하지 못하는 모양새다. 각 부처의 정책을 통할하고 조율해 균형발전을 실효성 있게 강력히 밀어붙일 수 있는 추진력이 없는 것이다. 지난 11일 한덕수 국무총리가 곧 출범을 예고한 지방시대위원회도 힘 있는 정부부처가 아닌 자문기구여서 가시적인 성과를 내는 역할을 기대하기 어렵다. 이러니 현 정부가 내놓은 반도체산업 육성계획도 지방을 배려하지 않아 수도권 집중만 가속화할 거란 비난을 받는다. 이런 가운데 지방소멸 위기론이 불거진 지 오래다. 이제 비수도권의 상당수 농어촌과 소도시가 인구 감소에 따라 소멸 위험에 처했다는 뉴스는 식상할 지경이다. 급기야 14일 명색이 제2 도시인 부산의 중·동·서·영도구 등 원도심까지 소멸할 위기에 직면했다는 통계청 자료가 나와 지역민들에게 좌절감을 안겼다.
■지방분권 확립만이 해결책
수도권이 더욱 과밀화하면 그 부작용으로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지불해야 되고, 결국 국가적 재앙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2018년 서울 KT 아현지사 화재와 지난달 15일 경기도 성남시 SK C&C 판교데이터센터 화재가 그런 경우다. 두 사고로 각각 발생한 통신대란과 카카오 서비스 장기간 중단은 온 국민의 불편과 경제적 피해를 야기한 국가적 마비 사태다. 수도권과 중앙집중식 시스템을 탈피해 시설의 분산이 요구된다는 사실을 잘 보여 준다. 탈중앙화와 분산은 디지털 플랫폼과 데이터에 기반한 초연결 사회로 접어든 웹3.0 시대의 중요 덕목이기도 하다.
따라서 정부와 정치권은 비수도권에서 고조되고 있는 지방분권 개헌의 목소리를 경청해야 마땅하다. 헌법 조항에 지방분권을 명시해 지방자치와 균형발전 촉진을 위한 법적 강제력을 부여하자는 주장이다. 이를 실행에 옮겨 지방정부에 힘을 실어 주고 자치분권을 확립해야만 수도권 일극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을 수 있다. 올해 비극적인 사건사고로 얼룩진 수도권의 과밀화에 따른 폐단에서 교훈을 얻어 과밀화를 완화·해소하며 수도권·비수도권의 공멸을 막는 일이 시급하다.
2022-11-16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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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지도자의 무지와 그 죄
옛적에는 무당이 어떤 방식으로든 아픈 사람을 치료해 주는 역할도 했다. 하지만 의료 지식은커녕 굿 하나도 제대로 못하는 위인이라 엉뚱한 조치로 목숨을 잃게 하는 경우도 많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했다. 제 구실도 못하면서 스스로 재주가 많다고 착각해 큰일을 벌이다 낭패를 보는 사람을 경계하는 말이다.
■당백전의 계책
조선 말기 나라 살림은 몹시도 궁핍했다. 왕실의 위엄을 되찾고자 했던 흥선대원군과 고종의 고민이 컸다. 특히 무너진 경복궁을 중건하는 일이 화급한데 돈이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나온 게 그 유명한 당백전(當百錢)이었다. 고종 3년(1866년) 12월부터 2년 가까이 사용됐는데, 동전의 겉에는 ‘호대당백’(戶大當百) 네 글자를 새겼다. ‘호조에서 만든 일반 동전의 100배에 해당하는 큰돈’이라는 의미다. 하지만 말이 100배이지 구리 함량 등 실제 가치는 6배 정도에 불과했다. 한마디로 악화(惡貨)였다.
당백전 아이디어는 당시 좌의정 김병학이 냈다. 그는 당백전이 국가 재정을 늘리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며 고종에게 진달했다. 반대가 없었던 건 아니다. 판중추부사 조두순 같은 이는 당백전이 노력은 적게 들면서 이득은 매우 크기 때문에 악용 등 폐해가 우려된다며 임금의 재고를 요청했다. 하지만 우의정 유후조를 비롯해 정부의 주류들은 “경제가 궁핍한 형편에 훌륭한 계책”이라며 시행을 밀어붙였다.
이후의 일은 익히 아는 바다. 화폐 가치가 날이 갈수록 떨어지고 물가는 폭등했다. 민생은 파탄에 이르고 경제는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망가졌다. 결국 조선을 극복하고자 세운 대한제국이건만 나라 지킬 무기 하나 제대로 마련할 재정이 안 돼 마침내 국권을 잃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됐다.
■레고랜드발 공포
레고랜드 사태가 나라를 흔들고 있다. 전후 과정을 간추리면 이렇다.
강원도 레고랜드의 중도개발공사(GJC)가 테파마크 조성 계획을 세운 뒤 자금 조달을 위해 2050억 원의 어음을 발행했다. 2020년의 일이다. 이 어음에 대해 강원도가 보증을 섰고, BNK투자증권의 주관으로 증권사 등에 팔렸다. 해당 어음의 만기일은 올해 9월 29일. GJC는 이를 상환할 능력이 없었다. 그래도 어음을 샀던 증권사 등은 믿는 구석이 있었다. 강원도의 보증이었다. 그런데 날벼락이 떨어졌다. 김진태 강원도지사가 “법원에 GJC의 회생신청을 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회생신청은, 간단히 말해, 회사를 처분해 그 돈으로 빚을 갚겠다는 의미다. 어음을 산 증권사들은 깜짝 놀랐다. 강원도가 빚을 떠안을 생각이 없음을 공식적으로 밝힌 것으로 받아들였다. 설사 회생절차에 따라 CJC를 처분한다 해도 하세월이요, 제값에 팔릴지도 의문이었다. 투자자에겐 말 그대로 공포였다.
여파는 CJC 어음에서 그치지 않았다. 김 지사의 발언은 국가나 지자체가 보증 선 채권 등 금융상품은 안전하다는 기존 인식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공포는 국내 금융시장 전반으로 퍼져나갔다. 회사채 시장이 얼어붙었고 기업들은 자금조달 길이 막혔다. 한국전력, 한국도로공사 같은 우량 공기업들의 회사채도 팔리지 않았다. 한 조사에 따르면 지난달 국내 채권 거래금액이 전달보다 100조 원 가까이 줄어들었다. 채권 금리도 폭등해 2009년 금융위기 이후 최고를 찍었다. 대규모 건설·부동산 사업을 위한 프로젝트파이낸싱(PF) 시장도 꽉 막혔다. 지역 중소 건설사와 증권사의 부도설이 파다하게 퍼졌다.
■“좀 미안하다”
놀란 정부가 비상거시경제금융회의까지 열어 진화에 나섰다. 50조 원이 넘는 유동성 공급 계획을 발표했다. 하지만 투자자들의 불안은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다. 시장에서는 또 다른 채무불이행 사태가 촉발될 위험이 있다며 ‘제2의 레고랜드’가 어디가 될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 사태가 금융시장만이 아니라 실물경제까지 흔들 수 있는 상황이라며, 정부의 조치가 너무 늦었다는 비관적인 목소리가 나온다.
이처럼 경제에 엄청난 혼란을 초래한 김 지사이건만, 그는 “채무불이행을 선언한 적이 없다”며 억울하다는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강원도는 보증 채무를 반드시 이행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하지만 시장은 김 지사의 말을 신뢰하지 못하고 패닉 상태에 빠졌다.
이에 대해 김 지사는 지금껏 제대로 된 사과를 하지 않았다. “본의 아니게, 불필요한 혼란과 오해를 초래하게 해서 매우 유감”이라거나, “좀 미안하다. 어찌 됐든 전혀 본의가 아닌데도, 이런 식으로 흘러오니까”라고 언급한 게 전부다. 하지만 김 지사의 ‘회생신청 발표’가 쓰지 않아도 될 어마어마한 나랏돈을 쓰게 만들고 국가 경제를 혼돈에 빠뜨린 건 분명한 사실이다. 자신의 말 한마디가 이런 결과를 일으킬 줄은 몰랐을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현재 위기의 책임에서 김 지사가 자유로울 수는 없다.
■영국의 수모
비슷한 사례가 영국에서도 있었다. 올 9월 초 총리에 취임한 리즈 트러스가 상위 1% 고소득자의 소득세율 45%를 철폐하는 등 450억 파운드(약 73조 원) 규모의 감세안을 발표했다. 이는 1972년 예산안 이후 가장 큰 규모의 감세였다. ‘제2의 마거릿 대처’를 꿈꿨던 성장우선주의자 트러스는 평소 “낮은 세금, 높은 성장”을 추구했다. 하지만 시기가 좋지 않았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영국은 현재 물가와 금리가 폭등하고 중앙정부의 채무도 감당하기 힘든 수준이다. 이런 판에 세금을 줄이면 정부는 빚을 내 나라 곳간을 채울 수밖에 없다. 이미 영국 중앙은행인 영란은행이 물가를 잡기 위해 국채 매각을 예고한 상태였는데 또다시 국채를 대규모로 발행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영국 국채가 시장에 대규모로 풀릴 것이라는 전망에 채권값은 급락했고, 이 때문에 자금난에 봉착한 영국 연기금은 해외 금융자산을 대거 팔았다. 충격에 세계 금융시장이 요동쳤다. 영란은행이 다급하게 국채 매각 계획을 유보하는 등 진화에 나섰으나, 이미 파운드화 가치는 폭락했고 영국 연기금은 무려 1500억 파운드(약 244조 원)의 손해를 입은 뒤였다. 국가 경제를 위기로 몰아 넣은 감세안은 결국 철회됐다. 트러스는 지난달 25일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알아야 면장
평소 “너 자신을 알라”고 외친 소크라테스에게 어떤 이가 “그러는 당신은 자신을 잘 아느냐”고 물었다. 소크라테스는 말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모른다는 걸 나는 안다.” 비슷한 가르침은 〈논어〉에도 있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진정으로 아는 것이다.” 불가(佛家)에선 “모르는 줄 아는 아는 것이 곧 견성”이라고 가르친다. 모르면서 마치 아는 것처럼 나서지 말라는 이야기다.
깊은 지식도, 정확한 판단력도, 주변에 지혜를 구할 분별력조차 없으면서 무턱대고 내뱉는 말의 후과는 클 수밖에 없다. 특히 그것이 대단한 권력을 가진 지도자의 문제라면 피해는 특정 개인에 한정되지 않는다. 심하면 나라를 말아먹을 수도 있다. 그래서 지도자의 무지는 그 자체로 죄악이다. 모름지기 알아야 면장을 한다고 했다.
2022-11-02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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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영어상용도시’ 논란
박형준 부산시장의 대표 공약으로 부산시가 추진 중인 영어상용도시 정책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전국 100여 개 단체로 꾸려진 부산영어상용반대 국민연합은 강력한 반대 입장을 천명하고, 영어상용도시 백지화 시민대회를 잇따라 열고 있다. 부산시는 부산시교육청과 인프라 구축을 위한 협약을 맺고 밀어붙였지만 부산시의회에서 제동이 걸린 상태다. 국내 지자체에서 영어상용화 추진이 부산이 처음은 아니지만 성공사례는 아직 없다.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부산시가 영어상용도시를 추진할 때 고려해야 할 부분에 대해 체크해 보았다.
■ 영어, 대한민국 공용어로
상용화(常用化)란 무엇인가. 국립국어원에 따르면 상용화(常用化)란 일상적으로 쓰게 하는 것이다. ‘영어 상용화’가 낯설다 보니 공용화(共用化)나 공용어(公用語) 정책과도 혼동하기 십상이다. 공용화는 함께 쓰게 하는 것이고, 공용어는 한 나라 안에서 공식적으로 쓰는 언어를 의미한다. 재밌는 사실은 미국에서 영어는 공용어가 아니라는 점이다. 미국에서도 1907년부터 영어를 공용어로 지정하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하지만 미국 연방정부는 지금까지 영어를 공용어로 법제화한 적이 없다. 미국이 다양한 언어를 배경으로 한 이민자들의 국가인 만큼,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했을 때 차별과 혐오가 발생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대한민국에서 영어 공용어화에 대한 논의는 몇 차례나 있었다. 보수 성향 소설가 복거일이 최초였다. 1998년 복거일은 “세계화를 위해서 민족의 언어를 버려야 한다. 한국어 대신 영어를 대한민국의 공용어로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01년에는 민주당이 제주국제자유도시 계획을 발표하면서 영어를 제주도의 제2공용어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국립국어연구원과 한글학회 등이 반대하자 흐지부지됐다. 부산에서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게 만드는 계획이 발표된 일도 있었다. 2005년 교육인적자원부가 주최한 공청회에서 인천, 부산·경남 진해, 전남 광양 3개 경제 특구와 제주국제자유도시가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방안이 나왔다. 갈수록 부산과 경쟁 관계로 부딪히는 인천의 유정복 시장이 현재 ‘영어생활도시’ 정책을 밀어붙이고 있는 점도 흥미로운 대목이다.
■ 박형준 시장, 영어에 ‘진심’
“영어상용도시는 2030부산세계박람회를 계기로 토대가 만들어질 ‘글로벌 허브 도시 부산’으로 가는 첫걸음이다. 해외 사업가와 관광객이 활동하는 데 불편함이 없는 환경을 선제적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 영어상용도시 정책을 통해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영어를 사용하는 도시, 외국인과 외국 기업이 몰려드는 도시, 외국인이 사는 데 편리한 도시를 만들겠다.” 박형준 시장이 지난 8월 제2차 부산미래혁신회의에서 밝힌 내용이다.
박 시장은 영어에 진심인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12월에는 영어 ‘열공’에 빠진 박 시장이 부산 일부 지역에 대해 ‘영어 제2 공용어’ 지정을 구상하고 있다는 보도(부산일보 2021년 12월 15일 자)도 나왔다. 박 시장의 유별난 영어 사랑을 이명박 정부 청와대 정무수석을 지낸 경력과 연관시키는 해석도 있다. 당시 MB정부 이경숙 인수위원장은 “미국에서는 ‘오륀지’라고 해야 알아듣는다”라며 영어몰입교육을 강조하다 후폭풍에 시달렸다.
부산시민들도 부산시의 영어상용도시 정책에 대해 반대가 많다. 한글문화연대가 시민 500명을 대상으로 시민인식 조사를 진행한 결과 40.9%가 반대, 27.6%가 찬성했다. 각계의 반대가 잇따르자 부산시는 추진 속도를 늦추는 분위기다. 한 언론사의 관련 보도에 대한 부산시의 해명자료에서 “공용화가 아니라 영어를 쓸 수 있는 환경을 넓히는 방향이다”라는 설명은 곤혹스러움이 묻어 있다. ‘공문서 영어 병기’도 시청 내 해외 관련 부서의 공문서 중 번역이 필요한 문서에 한정했다. ‘공공시설물 영문 표기’도 확대의 의미지, 영어로만 표지판을 만들겠다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 그 많던 영어마을, 지금은
서울시는 이명박 서울시장 시절이던 2003년부터 ‘영어 상용화 사업’을 펼쳤다. 공문서를 영문으로 만들고, 직원들의 영어실력을 길러 간부회의를 영어로 진행하겠다고 했지만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 같은 실패를 교훈 삼아 MB정부 때 영어몰입교육은 벌이지 말았어야 했다. 지난 8월 부산시가 부산시교육청과 맺은 협약서에는 권역별 영어교육센터와 거점학습 공간, 부산형 영어교육프로그램 개발, 영어방송 전문화 등을 추진한다는 계획이 나온다.
골자는 영어마을 사업의 확대다. 영어마을은 2004년 경기도 안산에서 시작해 전국 지자체에 유행처럼 퍼졌다. 하지만 상당수 영어마을이 애물단지로 전락하면서 세금만 낭비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안산, 하남, 대전의 영어마을은 평생교육원으로 바뀌었다. 파주영어마을은 한류트레이닝센터, 양평영어마을은 소프트웨어교육을 하는 체인지업캠퍼스로 활용되고 있다. 부산시가 지원하고 시교육청이 운영하는 영어마을인 글로벌빌리지를 다른 곳에 추가 설치하는 것에 대해서는 부산시민의 58.9%가 반대하고 있다. 부산글로벌빌리지가 학생과 시민의 실질적인 영어교육 활성화에 크게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 한글 간판 vs 영어 간판
부산은 영어상용도시가 아니어도 이미 영어를 너무 사랑하는 도시다. 센텀시티, 마린시티, 에코델타시티, 그린시티 등 지역 이름마다 영어 이름을 붙이고 있다. 꼭 영어를 써야 글로벌이 되는 것일까(영어 잘하는 필리핀은 왜 선진국이 못됐을까). 방탄소년단은 한국어로 노래를 불러도 세계인들이 열광한다. ‘아민정음’이 큰 인기라고 한다. 아민정음은 아미와 훈민정음의 합성어다. 막내를 ‘maknae’로, ‘누구’를 ‘nugu’로 쓰는 식으로 직역이 쉽지 않은 한국어를 발음과 비슷하게 알파벳으로 옮겨 적는 것을 뜻한다. BTS, 블랙핑크 등 K팝 가수에 대한 관심이 한국 문화는 물론 한국어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1997년에 처음 생긴 한국어능력시험에 3000명이 응시했는데 지난해에는 30만 명으로 25년 만에 100배가 늘었다고 한다. 서울 종로구는 한글 사랑 조례와 함께 ‘간판이 아름다운 거리 사업’을 통해 한글 간판 제작을 지원하고 있다. 영어 간판과 한글 간판, 세계인의 눈에는 어느 쪽이 가 보고 싶은 도시로 비칠까.
〈한글의 탄생〉을 쓴 노마 히데키 전 교수는 “한마디로 한글의 위상이 완전히 달라지면서 대단히 높아졌다. 무엇보다 지구상의 많은 이들이 한글을 접할 기회가 많아졌다. 앞으로는 한글과 한국어가 세계의 문화를 선도해 갈 수도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 장기적 접근 없인 성과 힘들어
부산시의회는 무리한 추진을 이유로 심사를 보류해 부산시의 영어상용도시에 제동을 걸었다. 심지어 같은 당인 김태효 국민의힘 시의원조차 “협약을 이렇게 시급하게 해야 할 이유가 있었느냐? 이견이 존재하는데도 제대로 된 설명조차 없다”라고 비판했다. 파주 영어마을의 경우 설립비가 991억 원에 달했다. 전국적으로 영어마을 설립에 1조 원이 넘게 든 것으로 추정된다. 자칫 실패한 사업 답습으로 예산 낭비와 사교육 부담만 키울 우려가 있는 게 사실이다. 엑스포를 위한 대책이라면 영어전문가를 키우는 데 집중하면 된다는 주장도 일리가 있다.
서울과 인천 등의 사례로 볼 때 지자체장이 바뀌면 영어상용도시는 원점으로 돌아가기에 십상이다. 영어상용도시는 장기적인 계획을 갖지 않으면 가시적 성과를 내기 힘든 프로젝트다. 영어상용도시 관련 세부 추진 계획을 수립하기 위한 연구 용역을 내년에 착수할 계획이라고 한다. 여론을 잘 수렴하고, 지금까지의 실패 사례를 면밀히 검토하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해 보인다. 부산시민들이 영어를 습득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지 않으면 성공하기 어렵다.
2022-10-19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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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마약 청정국서 오염국으로
8월 21일 오후 울산 도심의 한 캠핑장에서 30대 남성이 웃통을 벗고 반바지 차림으로 캠핑장을 활보하며 화단에 들어가 소리를 지르는 등 기이한 행동을 했다. 놀란 캠핑장 이용객들이 경찰에 신고했고 출동한 경찰에 붙잡혔다. 같은 시간 함께 마약을 한 남성 2명은 차량 문을 연 채 질주하다 차량이 도랑에 빠지는 사고를 냈다. 경찰 조사 결과 이들은 평범한 일반인 친구 사이로 태국 여행 중 마약을 경험한 후 인터넷을 통해 마약류 LSD를 구입해 함께 흡입한 것으로 조사됐다. 해당 영상은 경찰청 페이스북에 ‘캠핑장 떨게 만든 마약 좀비 3인방’이라는 제목으로 올랐다.
마약이 우리 일상 속으로 파고들고 있다. 최근 몇 년 사이 마약 사범이 크게 늘었다. 이제 더 이상 마약은 폭력 조직이나 연예인, 부유층 자녀 등 일부 계층의 이야기가 아니다. 특히 최근에는 인터넷을 타고 1020세대 청소년들의 마약 범죄가 크게 늘어 심각한 문제다. 이대로 방치하면 대한민국의 미래가 위태로울 수도 있다.
■ 더 이상 마약 청정국 아니다
우리나라가 마약 청정국 지위를 벗어난 지는 꽤 오래됐다. 유엔은 마약류 사범이 인구 10만 명당 20명 미만일 때 마약 청정국으로 지정한다. 우리나라는 2016년 기준 25.2명으로 그 지위를 잃었다. 대검찰청이 발행하는 마약류 범죄 백서에 따르면 1만 명 미만이던 국내 마약 사범은 2016년 1만 4214, 2017년 1만 4123, 2018년 1만 2613, 2019년 1만 6044, 2020년 1만 8050, 2021년 1만 6153명으로 증가 추세다. 올해는 상반기에만 8575명으로 전년에 비해 크게 늘 것으로 보인다. 부산의 경우 올 8월 말 현재 628명의 마약 사범이 단속돼 전년 같은 기간 대비 6.8% 상승하며 전국적 증가 추세와 흐름을 같이하고 있다. 그러나 검거율 기준의 이 같은 수치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평가다. 마약 범죄는 수사기관이 인지하지 못하는 사건이 훨씬 많은 대표적 암수범죄다. 학계는 우리나라 마약 범죄의 암수율을 28.57배로 상정하기도 한다.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는 국내 마약 인구를 100만 명으로 추산하기도 했다. 5월 식품의약품안전처가 발표한 ‘하수역학 기반 신종 불법 마약류 사용 행태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4월부터 1년간 전국 57개 하수처리장 모든 곳에서 히로뽕, 펜디메트라진 등 불법 마약류가 나왔다. 검출량으로 역산하니 인구 1300명 중 1명꼴로 매일 히로뽕을 1회씩 투약하고 있다는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 마약의 늪에 빠져드는 청소년들
문제는 청소년 마약 사범 증가가 뚜렷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재범률이 높은 범죄 특성상 1020세대의 범죄 증가는 향후 사회적 확산세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다. 10대 마약 사범은 2017년 119명으로 전체의 0.8%를 차지했지만 지난해 450명으로 2.8%를 차지하며 급속한 증가세를 보였다. 같은 기간 20대 마약 사범도 2112명(15.0%)에서 5077명(31.4%)으로 크게 늘었다. 30대(25.4%)를 합하면 지난해 전체 마약류 사범 중 10~30대 비율은 59.6%에 달한다. 경남경찰청은 지난해 5월부터 부산·경남에서 합성 마약의 하나인 펜타닐을 불법 처방받은 뒤 투약·소지하거나 되판 10대 고교생 54명을 적발하기도 했다. 최근 경찰이 한 ‘텔레그램 마약방’을 수사하던 중 총책이 고등학교 3학년생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충격을 받기도 했다.
■ SNS·가상화폐 이용 비대면 거래 확산
최근 마약이 일반인들과 청소년들 사이에 급속히 확산되고 있는 배경에는 인터넷을 통해 손쉽게 이뤄지는 유통 구조의 변화가 있다는 분석이다. 국내 유통되는 대표적 마약류인 히로뽕은 과거 일본에서 제조되고 부산을 중심으로 반입돼 폭력 조직 등을 통해 유통됐다. 한때 부산이 마약 도시의 오명을 썼던 이유이기도 했다. 마약 거래 장소로 고속도로 갓길이 등장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이제 마약은 인터넷 등을 통해 비대면으로 손쉽게 거래가 이뤄진다. 텔레그램에 ‘아이×’ ‘빙×’ ‘얼×’ 등 마약을 의미하는 은어 광고가 등장한 지 오래다. 전자지갑에 가상화폐를 보내면 미리 약속된 곳에 마약을 두고 찾아가는 식의 일명 ‘던지기’ 수법으로 거래가 이뤄진다. 텔레그램의 보안 메신저는 물론이고 접속 정보를 암호화한 다크웹이나 딥웹 등을 이용한 마약 거래도 일반화되고 있다. 국제우편을 이용한 직구도 이뤄진다. 마약 전과가 없는 일반인이나 사이버 공간에 익숙한 10대들도 호기심에 범행을 저지르기 좋은 조건이 만들어진 것이다.
■ 마약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 무너졌다
부산경찰청 ‘마약범죄 근절 합동 추진단’ 이기응 간사(폭력계장)는 “인터넷 등을 통해 손쉽게 정보를 얻고 유통도 이뤄져 마약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이 느슨해진 것이 마약 범죄 확산의 원인이 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울산 캠핑장 마약 사건의 경우가 이 같은 사회 분위기의 연장선이라는 것이다. 2020년 9월 부산 해운대에서 40대 운전자가 대마를 흡입하고 포르쉐 승용차를 운전하다 7중 추돌 사고를 낸 것도 마찬가지 사례다. 지난해 12월 아프리카TV에서 VJ가 독일 음악 ‘코카인 2021’을 배경으로 춤을 추는 영상을 올린 뒤 밈(인터넷 패러디물)이 유행처럼 퍼지면서 10대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유명 영화배우와 걸그룹 멤버까지 가세하며 화제가 됐는데 마약에 대한 경각심이 느슨해진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 준다는 지적이다.
■ 마약과의 전쟁…종합적 대책 필요하다
윤희근 경찰청장은 8월 취임 일성으로 “SNS나 가상자산을 통해 마약이 쉽게 유통돼 청소년까지 무방비로 노출되고 있다”며 “집중 단속을 통해 국민들을 안심시키겠다”고 밝혔다. 이에 맞춰 부산경찰청이 합동 추진단을 설치하고 연말까지 집중 단속을 벌이기로 하는 등 전국 경찰이 마약과의 전쟁에 나서고 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마약 범죄의 특성상 강력한 단속과 함께 치료와 재활 등 종합적 대책이 이뤄져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특히 청소년 마약 범죄가 늘고 마약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이 느슨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마약의 심각성에 대한 교육이 절실하다. 재범률이 높은 범죄의 특성상 치료와 재활에 대한 사회적 투자도 필요하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국내 마약 치료재활병원은 21곳이 지정돼 있는데 실질적으로 치료와 재활이 이뤄지는 곳은 경남 창녕시 국립부곡병원과 인천 참사랑병원 등 2곳 정도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마약류 관리와 단속, 교육, 치료를 통괄적으로 수행할 마약청 신설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드라마 ‘수리남’의 마지막 장면에 등장해 우리 국정원과 공조수사를 벌이는 미국의 DEA가 바로 재범자 관리와 마약 유통, 관리 감독, 국제 공조까지 광범위한 역할을 수행하는 컨트롤타워다. 우리 사회가 마약의 수렁으로 더 깊이 빠져들기 전에 특단의 대책이 시급하다.
2022-10-05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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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기후 변화와 자연 재해
“모든 전력을 상실했다. 2011년 3월 11일 오후 2시 46분,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 1·2호기 원자로를 함께 관리하는 중앙제어실 벽 한 면을 가득 채운 계측기가 흔들렸다. 붉은 램프, 흰색 램프, 노란색 램프 등이 크리스마스트리처럼 깜빡이고 벨이 윙, 윙하고 울리기 시작했다. 화재경보기도 울렸다. 한번 껐다 켜자 경보기가 멈췄다. 오후 3시 27분 쓰나미 제1파, 오후 3시 35분경 제2파가 후쿠시마 제1 원전에 밀려들었다. 해발 4m 높이에 설치된 비상용 해수펌프를 삼키고 10m, 그리고 13m 위까지 솟구쳐 올라와 원자로 건물과 터빈 건물을 덮쳤다. 1·2·4호기는 내부 비상용 배터리로 움직이는 직류전원도 모두 상실했다. SOB-스테이션 블랙아웃, 교류전원 완전 상실이다. 모두 말을 잃었다.” 일본 아사히신문 후나바시 요이치 전 주필이 저서 〈후쿠시마 원전 대재앙의 진상〉에서 사고 상황을 묘사한 장면이다.
원전 사고… 위험한 건 전력 상실
원전 운영에 가장 큰 위협이 정전이다. 지진으로 전기가 끊기고, 낮은 지대에 설치돼 있던 비상용 발전기까지 바닷물에 침수되면서 원전 내 모든 전기 시설이 손상됐다. 후나바시 전 주필은 “후쿠시마 사고 당시 비상 매뉴얼북에는 교류와 직류 전원을 모두 상실해 전기가 일절 들어오지 않는 상황은 아예 없었다”면서 “직원들은 암흑천지의 중앙제어실에서 감과 전화로 상황을 파악할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고 서술했다. 전기가 끊기면서 원자로를 식히기 위한 냉각수 펌프는 모두 멈췄다. 치솟는 원자로의 열기에 냉각수가 증발하면서 노심 온도가 1200도까지 상승했다. 열기를 이기지 못한 수백 개의 연료봉이 녹아내렸다. 그러자 엄청난 양의 수소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격납용기는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압력밥솥 터지듯 폭발했다. 상상하기 힘든 방사성물질이 대량으로 대기와 바다로 대거 방출되는 ‘대재앙’이 발생했다. 모두 쓰나미에 의한 침수로 전력을 상실했기 때문이었다.
포항제철 전체 침수와 블랙아웃
경북 포항시 포항제철소 공장 안으로 해병대 상륙함이 출동했다. 지난 6일 새벽 ‘괴물 태풍’ 힌남노로 인해 포항 일대에 500mm의 기록적인 폭우가 폭포수처럼 쏟아지면서 오전 6시 20분께 냉천이 범람을 시작했다. 강물은 포스코 내 발전소와 제2문에 위치한 변전소 전기 배전시설을 덮친 뒤 공장 안으로 치고 들어왔다. 변전소가 침수되면서 공장 전체가 블랙아웃에 빠졌다. 오전 7시. 여의도 면적의 3배가 넘는 포항제철소 대부분이 흙탕물에 잠겼다. 이어 만조를 타고 바닷물까지 공장 안으로 밀려들었다. 예고된 태풍임에도 불구하고, 1973년 쇳물 생산 이후 49년 만에 처음으로 포항제철소 고로가 모두 멈춰 섰다.
포항제철소는 정전 사태를 풀기 위해 추석 연휴 기간에 하루 120만 원 일당까지 지급하면서 복구에 올인했다. 용광로는 겨우 재가동하기 시작했지만, 국내 유일의 전기강판과 스테인리스 등 최첨단 열연공장의 피해는 여전히 심각하다. 완전 정상화까지를 두고 산업부는 최대 6개월 이상, 포스코 본사는 3개월, 현장에서는 주요 전기 설비가 설치된 지하가 물에 잠겨 6개월 이상이 걸린다는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500년 만에 한 번 내릴 폭우와 만조가 겹쳤던 불가항력적인 부분과 냉천 상류 오어지의 홍수 조절 기능 부재, 냉천 하천정비사업과 구조물 문제, 포스코와 포항시의 불협화음 등 인재가 피해를 키웠다는 논란만 난무하고 있다. 확실한 점은 상상을 초월하는 기상 이변과 안일한 준비가 복합적으로 결합된 재해라는 점이다.
‘괴물 태풍’ 가능성 점점 높아져
힌남노는 기후 관측 사상 처음 있는 태풍이었다. 태풍은 주로 적도 인근에서 발생하고, 시계방향으로 돌면서 북서 방향으로 전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힌남노는 최초로 북위 25도 이북에서 발생해 반시계 방향으로 남서진하다가 급격히 북상하면서 다른 열대성 저기압을 흡수하며 ‘태풍 먹는 태풍’으로 커졌다. 제주도 한라산을 지나면서 “하늘이 뚫렸다”고 할 정도로 1년 내릴 양에 버금가는 1059mm의 비를 쏟아붓기도 했다.
걱정스러운 점은 괴물 태풍과 물 폭탄 등 이상기후 현상이 거의 매년 반복되고, 강도가 점점 세진다는 점이다. 세계적으로도 파키스탄은 폭우와 홍수로 국토의 3분의 1이 물에 잠겼다. 기후 전문가들은 “예전에는 100, 200년에 한 번 오던 폭우가 이제는 2, 3년마다 찾아올 수 있다”면서 “경우에 따라서는 1년에 몇 번이고 ‘괴물 태풍’을 겪을 가능성도 한층 커졌다”고 지적했다.
태풍에 멈추는 원전, 과연 괜찮을까
한반도 태풍의 상륙 경로인 동해안을 따라 18개 원전(고리 5, 새울 2, 월성 5, 한울 6)이 밀집해 있다. 원전은 냉각장치에 막대한 양의 물이 필요하기 때문에 바닷가에 입지한다. 이에 따라 태풍과 폭우, 해일 등에 따른 침수로 발전소 내부뿐만 아니라 송전선로 문제로 인한 외부전원 공급 차단 등 다양한 사고의 변수가 상존해 있다. 게다가 기존 원전은 고준위 핵폐기물 임시 적치장 역할까지 맡고 있어 예상치 못한 사고도 배제하기 힘든 상황이다.
실제로 태풍 힌남노 반경에 있었던 신고리1호기 원자력발전소가 수동 정지됐다. 신고리1호기는 당시 강풍으로 원전 터빈발전기에 영향을 줬고, 한수원은 전력 설비 이상을 사고 원인으로 추정했다. 태풍으로 인한 원전 가동 중단 사례는 과거에도 빈번했다. 2020년 9월 태풍 마이삭이 동해안을 따라 북상하면서 고리원전 1~4호기와 신고리 1~2호기, 월성 2~3호기 등 8개의 원전에서 전력 계통 문제가 발생해 잇따라 가동이 중단됐다. 2003년 9월에는 태풍 매미로 고리 1~4호기와 월성 2호기가 동시에 정지되는 사고가 있었다.
물론, 해일 등에 대한 안전 조치도 차츰 이뤄지고 있다. 한국수력원자력은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2013년 고리 원전의 콘크리트 해안 방벽을 기존 7.5~9.5m에서 10m, 총연장 2.1km로 증축하는 등 안전 설비를 강화했다. 하지만, 감사원은 2018년 “최고 해수위가 17m에 이를 수 있어 10m 방벽으로는 해일 등으로 인한 파고를 막지 못 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운에만 맡길 수 없는 안전
기상청은 힌남노 내습을 앞두고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피해를 낼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한국 포항제철소가 창사 이래 처음으로 공장 전면 침수와 3~6개월 조업 중단 사태를 겪고 있듯이, 원자력발전소도 이상 기후에 100% 안전하다고 확언하기는 어려운 지경이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수습을 총괄했던 간 나오토 전 일본 총리는 저서 〈나는 왜 탈원전을 결심했나〉에서 “화력발전소 화재 사고는 언젠가는 연료가 다 타버려 사고가 수습된다”면서 “이에 비해 원전 사고는 제어할 수 없는 원자로를 방치할수록 사태는 악화되고, 연료는 타지 않고 방사성물질을 대기와 해양으로 계속 방출한다”고 밝혔다. 간 전 총리는 “지금이라도 같은 사고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고 누구도 말할 수 없다”면서 “원전 사고는 한 민간 기업이 완전히 책임을 질 수 없고, ‘원전은 비용이 저렴하다’는 주장마저 붕괴했다”고 강조했다.
예측할 수 없는 자연재해에 마주 선 인류. ‘타지 않는 원자력발전소’의 안전에는 아무리 준비를 철저히 해도 모자람이 없다. 기상은 인간의 상상 이상으로 엄혹해지고 있고, 원전 사고는 단 한 번이라도 발생하면 되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2022-09-21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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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심심한 사과’ 논란이 말하는 것
‘심심한 사과’로 세상이 떠들썩하다. 얼마 전 한 업체가 인터넷에 올린 사과문에 네티즌들이 발끈했다. ‘마음의 표현 정도가 매우 깊고 간절하다’는 뜻의 심심(甚深)을 지루하다는 의미로 곡해한 탓. 문해력(文解力) 논란이 어제오늘 일은 아닌데 이 사건이 다시 기름을 부었다. 디지털 시대가 깊어 갈수록 문해력의 위기는 심화할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
■모국어 문해력, 그 심각한 하락
최근 ‘심심한 사과’ 사태는 근년에 잇따르는 문해력 논란의 연장선에 있다. 금일(今日·오늘)을 금요일로 착각하거나 무운(武運)을 ‘운이 없다’로 오해했던 여러 사례들이 떠오른다. 몇 년 전엔 ‘명징’ ‘직조’ 같은 단어를 쓴 한 영화평론가에게 “잘난 척한다” “엘리트주의의 향연”이라는 비난이 쏟아지기도 했다.
단어의 뜻을 모르는 일이 한자어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사흘’이 3일이냐 4일이냐로 포털 사이트 인기 검색어 1위에 올랐던 적도 있다. ‘사’가 들어가니 4일로 대강 이해했던 거다.
문해력 부족은 단순히 글자의 뜻을 모르는 것과는 다른 문제다. 유네스코는 문해력을 ‘다양한 내용에 대한 글을 이해, 해석, 창작할 수 있는 힘’으로 정의한다. 요즘 아이들은 글을 읽을 줄은 알지만 그 안의 생각과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 기성세대는 탄식한다. 대체 지금 우리나라의 모국어 문해력은 어디로 가고 있느냐고.
■교육 현장의 아우성
“아이들이 글을 읽는 걸 싫어하고, 읽어도 이해를 못 합니다.” 실제 학교 현장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들의 목소리는 충격적이다. 사회나 역사 수업 시간은 낱말의 의미를 설명하느라 진도가 안 나갈 지경이란다. 심지어 시험 시간에 “정의(定義)가 뭐예요?” “과도기가 무슨 뜻이죠?”라는 질문이 이어진다. 공지사항을 가정통신문이나 단톡방 메시지로 전달하는 일도 교사들의 큰 고민이다. 아이들이 내용 자체를 못 알아듣거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학생은 다를까 싶지만 오십보백보다. 예컨대, 문제를 미리 알리고 오픈북으로 시험을 보는데도 질문을 이해하지 못해 오답을 적는 학생이 대다수다. 정상적으로 맥락에 대한 이해력을 갖춘 학생은 한 학년에 서너 명 정도면 많은 편. 젊은 층은 줄임말만 접하다 보니 신조어는 잘 알아도 통상적인 단어의 유래와 의미는 모른다. 이게 ‘문맹률 1% 이하’를 자부한다는 한국의 민낯이다.
■디지털 시대에 더욱 악화
왜 이 지경까지 오게 됐나. 영상 문화가 문해력 저하의 가장 큰 원인이다. 화면 전환이 빠르고 대화 호흡이 짧은 영상에 익숙한 젊은 층은 줄글로 된 자료에 취약하다. 글 읽는 걸 어려워하기도 하지만 글 자체를 아예 읽으려 하지 않는 태도가 더 문제다. 읽더라도 원하는 정보만 취하고 나머지는 버린다. ‘스압 주의’라는 신조어가 그래서 나왔다. ‘스크롤 압박 주의’의 줄임말이다. 스크롤을 많이 내리는 장문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의미다.
디지털 기기에 길들여진 아이들의 문해력 하락은 빠른 속도로 진행 중이다. 이런 변화는 전국적인 현상이며 앞으로 한층 가속화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전망이다.
■미래 사회의 기초라는데…
디지털 세상이라지만 한국 학생들은 ‘디지털 문해력’도 꽝이다. 디지털 문해력은 ‘디지털 기기와 정보사용 능력’을 이른다. 지난해 한국 청소년의 디지털 정보 문해력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제학업성취도평가에서 바닥권을 기록했다. 이 충격적인 결과는 전통적인 문해력의 기초 없이는 디지털 문해력도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웅변한다.
한국 학생들은 주어진 문장에서 사실과 의견을 식별하는 능력도 최하위를 기록했다. 지식과 정보가 난무하는 시대에는 가치 있는 정보가 중요한데, 정보들이 어떻게 연결돼 있는지 살피고 선택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한다는 얘기다. 말하자면 가짜·진짜 뉴스를 구분하지 못하는 수준이다.
전문가들은 문해력이야말로 4차 산업혁명과 메타버스 시대의 소중한 덕목이라고 강조한다. 디지털 기술이 더 높은 문해 능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세대까지 갈라놓다
문해력 문제는 세대와 계층의 반대쪽에서도 제기된다. 디지털 기기와 그 언어를 불편해하는 시니어 세대의 고충을 가리킨다. 급변하는 디지털 세상은 시니어 세대에게 삶의 고단한 시험대이자 소외와 고립의 장벽이 된 지 오래다. ‘최애템’(최고로 아끼는 아이템), ‘킹받네’(열받네)처럼 영어와 한글을 섞은 무수한 신조어 앞에서 이들은 절망한다.
젊은 세대는 말 그대로 문해력이, 노인 세대는 새로운 디지털 기술에 접근하고 그것을 활용하는 문해력이 문제인 것이다. 청소년은 한자가 어렵고 어르신은 외국어가 낯선 것과 마찬가지다. 문해력의 위기는 상호 소통이 멀어진 세대와 계층 사이의 단절을 더욱 공고하게 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문해력을 높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독서와 글쓰기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의미를 구성하는 차원 높은 정신적 행위다. SNS 사용도 결국 읽고 쓰는 일이다. 아날로그 문해력은 디지털 문해력에도 영향을 준다. 과학기술이 날마다 새롭게 변하는 만큼 자신만의 문해력 향상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일이다.
물론 개인 차원의 문제만은 아니다. 공교육에서 담당해야 할 역할들이 대단히 중요하다. 사회적 문제로 접근해서 이와 관련된 공론화 과정이 필요하리라 본다. 아이들이, 나아가 국민들이 읽고 말하고 쓰는 데 흥미를 느끼게 해야 한다.
■결국은 소통의 문제
문해력 저하가 ‘한글 전용’ 언어 정책 때문이라는 주장이 일각에서 나온다. 글을 읽을 줄은 알아도 이해하지 못하는 실질적 ‘문맹’이 한자 교육의 실종 탓이라는 시각이다.
일리 없는 주장은 아니나 문해력의 본질은 아니다. ‘심심한 사과’ 사태의 심각성은 다른 데 있지 않다. 자신이 알고 있거나 생각하는 뜻이 아니라는 이유로 상대방을 비난하고 공격했다는 데 있다. 언어의 다양한 쓰임새나 의미를 찾아볼 의지가 없다는 것. 그 태도가 상징하는 바는 바로 편견과 단절이다.
문해력은 소통 의지와 관련된 문제로 봐야 한다. 결국 문해력의 위기란 나와 타자가 속한 맥락을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의 부재가 아닐까. 그래서 “문해력 저하는 민주주의 위기로 귀결될 수 있다.”(매리언 울프 <다시, 책으로>) 정보의 홍수 속에서도 확증 편향에 빠지지 않는 것, 이게 디지털 환경에서의 진정한 문해력이다.
곧 다양한 세대가 마주하는 추석 명절이다. 문해력은 위기를 맞고 있지만 그것은 세대 간 문화 차이를 해명할 단서이기도 하다. 갈등의 깊이 앞에서 절망하기보다는 그 간극을 메울 지혜를 쌓는 일이 급하다.
2022-09-07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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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수확기에 폭락한 쌀값, 어찌하오리까?
한 해의 결실을 거두는 벼 수확기가 코앞에 다가왔지만, 전국 곳곳에서 한숨 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기대감으로 즐거워야 할 수확기가 오히려 재앙으로 닥쳐오지 않을까 전전긍긍한다. 바로 요즘 농민들의 심정이 이렇다. 기상이변과 우크라이나 전쟁 등 여파로 세계적으로 곡물 가격이 급등하며 식량 위기를 운운하는 소리가 높지만, 대한민국의 쌀값은 정반대로 곤두박질치고 있다.
최근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 15일 기준 산지 쌀값은 20㎏당 4만 2522원을 기록했다. 딱 1년 전 이맘때 5만 5630원보다 무려 23.6%나 폭락했다. 낙폭으로는 45년 만에 최대치라고 한다. 가격으로는 2018년 3월 이후 4년 5개월 만에 가장 낮다. 대형마트나 전통시장에서 판매되는 소매 쌀값 역시 20㎏당 4만 9000원 수준으로 작년의 6만 880원에 비해 24.2%가 떨어졌다. 한국인의 최고(最古)·최대 먹거리인 쌀의 처지가 지금 말이 아니다.
■쌀 풍년이 오히려 재앙
45년 만의 최대 낙폭에 현재 농민들은 망연자실한 상태다. 앞으로의 상황도 별반 나아질 기미가 없다. 안팎의 여건을 감안하면 지금으로선 쌀값 반전을 기대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당장 이달 말부터 올해 조생종 벼의 수확이 시작되면서 햅쌀이 출하되고 있다. 다음 달부터는 본격적인 벼 수확이 진행된다. 그런데도 아직 지난해 거둬들여 창고에 쌓아 놓은 재고 쌀이 너무 많다.
7월 말 기준 전국 농협에서 보유 중인 재고 쌀은 42만 8000톤으로, 전년도의 23만 7000톤보다 무려 80% 이상 늘었다. 게다가 작년에 생산된 쌀 388만 톤 중에서도 아직 10만 톤 규모가 시중에 남아 있다고 한다. 쌀값 하락세가 당분간 더 이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대목이다. 전문가들도 다음 달부터 본격적으로 햅쌀이 나오면 쌀값은 더 떨어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공급 과잉이 쌀값 하락의 직접적인 원인이다 보니, 풍년이 바로 재앙이나 다름없다. 문제는 올해도 큰 변수가 없는 한 지난해와 비슷한 규모의 생산량이 예상된다는 점이다. 쌀값 폭락을 넘어 쌀 대란 우려마저 나오는 지경이다.
반면, 이미 알려진 것처럼 쌀 수요의 감소세는 갈수록 뚜렷하다. 국민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2000년 93.6kg에서 지난해엔 56.9kg으로 21년 만에 약 40% 가까이 줄었다. 올해는 이보다 더 줄어 50kg대 초반으로 떨어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이를 연간 생산량과 비교해 보면 최소 100만 톤 이상의 쌀이 일반 가정 외에서 소비되어야 현재 공급 과잉 상태가 해소된다고 한다.
■들끓는 농심
본격적인 수확기를 앞두고 쌀값 폭락 사태를 지켜보는 농심은 타들어 가고 있다. 국내 쌀값은 정부의 미곡 정책에 따라 좌우되는 구조인 만큼 정부의 잘못된 농정을 비판하며, 특단의 대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이달 19일엔 전북 김제에서 농민들이 다 자란 논의 벼를 갈아엎으며 쌀값 폭락에 대한 정부 대책을 촉구했다. 농민 단체의 토론회와 시위도 이어지고 있다. 지난 17일에는 ‘쌀값 폭락, 쌀 정책 어떻게 할 것인가’를 주제로 전국쌀생산자협회와 전국농민회총연맹 등 5개 농민 단체와 10명의 국회의원이 국회 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제대로 된 쌀 정책을 촉구하는 토론회를 열었다.
또 22일에는 농민 단체 회원 등이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앞에서 “밥 한 공기 쌀값 300원 보장” 등을 외치며 쌀값 폭락 대책을 촉구했다. 다음 달부터 쌀 수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농민들의 시위와 항의는 더 빈발할 것으로 보인다.
전국의 농민들이 이처럼 정부를 성토하는 것은 정부의 미온적인 대처가 쌀값 폭락에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부가 양곡관리법에서 정한 대응 조치를 미적미적하는 바람에 이 지경에 이르게 됐다는 것이다.
■정부의 ‘뒤늦은 시장 격리’ 폭락 불러
농민들이 가장 불만을 토로하는 대목은 정부의 ‘뒤늦은 시장 격리’ 조치다. 시장 격리는 간단히 말하면, 시장에 풀리는 쌀 공급량을 정부가 인위적으로 조절하는 조치다. 한 해의 쌀 수확량이 급증하거나 수요가 급감해 시장에서 쌀 공급 과잉 현상이 심화하면 정부가 시장에서 쌀을 사들여 창고에 보관하며 공급량을 줄이는 것이다. 구체적 실시 근거는 양곡관리법에 명시돼 있다.
그런데 이 조항이 ‘해야 한다’라는 의무 규정이 아니라 ‘할 수 있다’라고 되어 있는 점이 논쟁거리다. 의무 규정이 아니다 보니, 이 조항에 근거한 시장 격리 조치의 시행 여부가 오로지 정부 당국자의 판단에 의해 좌우된다는 점이다.
현재 쌀값 폭락의 가장 큰 원인인 지난해 공급 과잉 물량만 해도 농민들과 농민 단체들은 당시 수확 때부터 즉시 시장 격리 조치를 요청했지만, 정부가 미온적으로 대처해 실기했다는 지적이다. 이 때문에 농민 단체들은 법에 규정된 시장 격리 조건이 충족되면 자동으로 시장에서 쌀을 의무적으로 격리하도록 법 개정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한다.
이와 함께 정부가 적기에 시장의 물량을 조절할 수 있도록 쌀 생산 관련 통계의 정확도도 높여야 한다는 지적이다. 관련 통계가 실제 생산량 등 현실을 잘 반영하지 못하다 보니, 정부 정책도 실기하기 일쑤라는 것이다. 쌀 생산량과 소비량을 과학적인 통계 수치로 추출할 수 있어야 농민들이 원하는 정책도 효과적으로 시행할 수 있다.
■재배 면적 감축 등 불가피
전문가들은 쌀의 공급 과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결국 지속해서 쌀 재배 면적을 줄이는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쌀 소비량 역시 앞으로 더 늘어날 가망이 없는 이상, 재배 면적의 감축은 불가피하다는 주장이다. 재배 면적 축소에 따른 농민들의 소득 보전을 위해 구체적이고 다양한 지원책이 뒤따라야 함은 물론이다.
벼를 대체할 작물 전환도 꾸준히 나오는 방안인데, 최근엔 가공 전용 쌀인 ‘분질미’의 활용에 많은 관심이 쏠린다. 분질미는 쌀이면서도 전분 구조가 밀과 유사해 수입 밀가루 수요를 대체할 수 있다. 쌀 생산량을 줄이면서도 밀의 식량 자급률을 높일 수 있는 대안으로 인식되고 있다. 다만, 다른 작물을 재배하는 것보다 상대적으로 노동 강도가 낮아 유리한 벼 재배의 이점을 넘어설 수 있는지가 관건이다.
어쨌든 현재 우리나라의 쌀농사는 갈림길에 서 있다. 앞으로도 쌀농사는 결코 포기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현재 상황을 계속 유지할 수도 없는 형편이다. 농민들의 의견을 수렴해 가면서 변화를 모색할 수밖에 없는 시점이다.
곽명섭 논설위원 kms01@busan.com
2022-08-24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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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위기의 한·중 교역과 외교 관계
오는 24일로 한국과 중국이 수교한 지 만 30년이 된다. 양국이 긴 세월에 걸쳐 우호를 다지는 동안 중국은 우리나라의 최대 교역국으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한·중 수교 30주년을 맞이한 현실은 살얼음판이다. 오랜 동맹국 미국이 제안한 반도체 공급망 동맹인 ‘칩4’에 한국이 참여하는 데 중국이 반대하고 있어서다. 신냉전 구도를 만들며 세계 패권전쟁을 벌이는 미·중 사이에 낀 한국이 외교적인 난관에 봉착한 것이다. 이런 가운데 중국과의 무역수지가 1992년 수교 이후 30년 만에 3개월 연속 적자를 나타내 한국경제에도 비상등이 켜졌다. 대중(對中) 무역수지 적자를 탈피하고 성숙한 한·중 관계를 구축하려는 정부 대책이 절실하다.
■ 대중 무역수지 석 달째 적자
지난달 우리나라는 중국과의 무역에서 5억 7500만 달러의 적자를 기록했다. 올 5월 10억 9900만 달러, 6월 12억 1400만 달러 적자에 이어 3개월째 대중 무역수지가 적자 행보를 보인 것이다. 3개월 연속 대중 무역적자는 한·중 수교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이는 최근 한국 상품의 중국 수출이 감소한 결과로 분석된다. 지난달에도 대중 수출액은 132억 4000만 달러로, 지난해 7월 대비 2.5%가 줄었을 정도다.
대중 수출 감소는 중국이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대대적으로 도시 봉쇄에 나선 게 주된 원인으로 꼽힌다. 봉쇄 조치 영향으로 중국경제의 성장 둔화세가 심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쟁력이 뛰어난 한국 반도체 제품의 중국 수출은 증가했으나, 이를 제외한 디스플레이와 자동차 부품, 철강, 석유화학 등 다른 주요 품목의 대중 수출이 대폭 감소한 것이 중국의 경기침체를 입증한다. 반면 중국으로부터 수입은 늘고 있어 무역적자 폭을 키운다. 지난달 대중 수입은 1년 전보다 19.9% 증가한 138억 1800만 달러였다.
■ 흔들리는 수출 전선의 심각성
대중 무역적자는 한국 수출 전선에 타격을 주고 전체 무역수지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여간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중국이 우리나라 최대의 수출 대상국인 까닭이다. 지난해 기준 대중 수출 비중은 전체의 25.3%(1629억 달러)로, 2위인 미국 14.9%(959억 달러)에 비해서도 월등히 높다. 이러한 대중 교역이 지난 30년간 흑자의 길을 걸으며 일본과 중동 등에서 생긴 만성적인 무역적자를 메워 줬다. 중국이 우리 수출의 텃밭으로 인식되는 이유다.
그런데 줄곧 효자 노릇을 해 온 대중 수출이 흔들려 무역적자로 돌아서는 바람에 전체 무역수지는 지난달까지 4개월 연속 적자 추세를 보였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14년 만이다. 게다가 지난 1~7월 누적 무역수지 적자 규모가 66년 만에 최대치인 150억 2500만 달러에 달할 만큼 대중 무역적자의 여파는 심상치 않다. 신속한 특단의 대처가 없으면 대중 무역적자는 계속될 전망이어서 수출로 먹고사는 국내 산업계에 비상이 걸린 셈이다. 수출 둔화와 수입 급증에 따른 무역적자의 지속은 국가 신인도 하락과 저성장·고물가 장기화로 이어질 우려가 높다. 한국경제에 암울한 그림자가 드리워진 게다.
■ 맞춤형 공략·시장 다변화 필요
중국의 성장세 둔화는 한국 수출이 그간 중국경제의 고도성장에 올라타 대규모 흑자라는 과실을 누렸던 호시절이 끝났다는 걸 의미한다. 지난달 30일 최상목 대통령실 경제수석도 “중국을 통한 수출 호황기가 끝나가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 같은 현상이 일시적이며 중국의 지속 성장이 가능할지라도 이젠 대중 교역의 기조 변화가 절실한 시점으로 보인다. 중국의 산업구조 고도화와 기술 발전 탓에 한국의 중간재 대중 수출이 크게 줄어드는 반면 중국으로부터 완제품 수입은 늘고 있어서다. 한국이 중국에 상대적 우위를 보였던 분야들에서 빠르게 따라잡히고 있어 무역적자가 더 커질 수도 있다.
따라서 흑자 상태인 반도체처럼 기술력과 품질, 가격 경쟁력 등의 우위 확보나 유지를 통해 중국을 공략할 필요성이 있다. 현지 상황에 맞는 수출품 다양화와 고부가가치 전략상품 개발을 추진하는 등 더욱 치밀하고 실효적인 수출전략 마련이 시급해졌다. 더불어 중국에 편중된 무역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시장 다변화도 과제다. 중국은 2016년 한국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에 반발해 한한령(한류 금지령)으로 발목을 잡았듯이 언제든 정치적 의도로 통상 보복에 나설 여지가 많다. 이럴 경우 한국의 수출입은 막대한 손실을 입을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 국익 위한 외교 뒷받침돼야
상존하는 중국발 리스크 해소가 필요한 시기에 때마침 한·중 외교장관 회담이 열려 관심을 끌었다. 9일 중국 칭다오에서 박진 외교부 장관과 왕이 중국 외교부장이 만났다. 윤석열 정부의 본격적인 대중 외교가 이제서야 이뤄져 늦은 감이 있으면서도 다행스럽다. 그러나 회담에서 우호 증진, 상호 존중 같은 원론적인 수준의 발언에 그치고 심도 있는 논의가 진행되지 못해 매우 아쉽다. 되레 양측은 지난 7일 한국이 칩4 동맹 예비회의 참여 의사를 밝힌 사실을 놓고 신경전을 펼치며 확연한 입장차를 드러냈다. 갈등이 깊어지지 않을까 걱정이다.
미국이 주도하는 칩4는 북한의 핵 위협이 고조되는 마당에 안보 차원에서 한·미동맹을 돈독히 하고 반도체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칩4에 대한 중국의 반발을 누그러뜨려야 하는 숙제는 한국 정부의 몫이라고 할 수 있다. 칩4가 자국을 고립시키려는 동맹이라고 판단하는 중국에 한국의 사정과 입장을 충분히 납득시킬 수 있는 외교 노력이 요구된다. 칩4 가입 시 미국에게서 우리 국익을 보장받는 것도 중요하다. 특히 칩4에서 대중 무역을 규제하거나 중국이 한국과의 교역을 거부하는 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마땅하다. 한국 반도체의 중국·홍콩 수출 비중이 62.6%나 되는 지금 중국 시장을 잃으면 절대 안 된다.
■ 대등한 이웃 관계 정립할 때
칩4 문제의 원활한 해결조차 벅찬데 중국은 최근 한국에 기존의 사드 관련 ‘3불(不)’ 정책(사드 추가 배치 불가, 미국 미사일방어체계 불참, 한·미·일 군사동맹 불가) 이행에 더해 배치된 사드의 운용 제한까지 요구하고 있다. 미국은 반도체에 이어 전기차 배터리까지 글로벌 공급망에서 중국을 배제하고 나섰다. 한국에 더욱 난감한 국제정세가 펼쳐지고 있다. 동맹국 미국과 최대 교역국 중국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 외교가 불가피한 모양새다.
진퇴양난의 위기 국면일수록 득실을 잘 따져 국익을 챙기는 실리 외교가 정답이다. 다만, 중국 눈치를 과도하게 보는 그간의 저자세를 지양하고, 높아진 국가 위상과 국력을 바탕으로 한 당당한 외교를 병행하는 편이 좋을 듯하다. 앞으로 한국의 존재를 필요로 하는 미·중 양국의 상황을 절호의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우리의 요구나 할 말을 다하면서 양국의 주문을 국익에 이로운 방향으로 적극 활용하자는 것이다. 한·중 관계에서 강조되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정신이 더는 말이 아닌 실천으로 옮겨져야 할 때다. 대등함 속에서 상생과 동반 성장이 가능한 보다 긴밀한 협력 관계를 만들려는 자세가 수교 30주년을 맞은 한국과 중국에 요구된다.
2022-08-10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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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윤 정부 ‘지역균형발전’, 신기루인가
“지방의 시대라는 모토를 갖고 새 정부를 운영할 생각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당선 직후인 지난 3월 국민에게 한 약속이다. 균형발전 의지를 강하게 밝힌 것이다. 역시 당선인 신분이던 지난 4월 윤 대통령은 민선 7기 전국 시장·도지사들과 만났다. 이 자리에서 그는 “지역 균형발전은 국민 모두 어디에 거주하든 공정한 기회를 누릴 수 있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균형발전 의지를 재차 확인했다. 그로부터 석 달이 지난 지난 8일 윤 대통령은 민선 8기 전국 시장·도지사들을 만나 “저는 선거 때 국민 누구나 어느 지역에 사느냐와 관계없이 공정한 기회를 누릴 권리가 있고 경제와 산업이 꽃피우는 진정한 지방시대를 열겠다고 약속했다”며 당시의 기억을 스스로 환기시켰다.
윤 대통령의 그 약속은 지금 표류하고 있다.
수도권에 과한 애정
기존 ‘산업집적 활성화 및 공장 설립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수도권 내 자연보전권역에서 공장을 신설하거나 증설하기는 매우 어렵다. 지방 기업 보호 취지로 만든 까다로운 규제 때문이다. 그런데 산업부는 지난 20일 수도권 자연보전권역 내 공장 신증설 규제를 완화하는 시행령과 시행규칙 개정안을 발표했다. 시행령은 특히 해당 권역에서 폐수처리 시설을 갖춘 공장의 규모를 ‘1000㎡ 이내’에서 ‘2000㎡’까지로 늘렸다.
‘유턴 기업’ 즉 외국에 있다가 국내로 복귀하는 기업이 수도권에 들어가는 건 현행법 상 거의 불가능하다. 외국인 투자기업에 한해, 그것도 수도권 경제자유구역에만 공장을 지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산업부는 이런 제한마저 풀어 버렸다. 유턴 기업이면 대부분 수도권에서 신증설이 가능해졌다. 그것만이 아니다. 해당 기업에 대한 지원 폭도 크게 확대했다. 수도권 공장 신증설 규제에 대해 산업부는 ‘불합리한 규제’로 규정했지만, 경영 인프라가 열악한 지방의 기업들에겐 절체절명의 위기가 닥친 것이다.
산업부는 지난 21일 ‘반도체 초강대국 달성 전략’도 발표했다. 기업들로 하여금 반도체 투자에 나서도록 세제 혜택 등 각종 지원을 하겠다는 방안이다. 기재부와 국토부도 참여한 이 반도체 전략에는 수도권의 반도체 단지 조성 비용을 국비로 지원하고 관련 인허가도 간소화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그에 앞서 교육부는 지난 19일 반도체 산업 인력 양성 방안을 밝혔다. 대학원·일반대·전문대·직업계고의 반도체 관련 학과 정원을 크게 늘리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각 학교에서 반도체 관련 학과를 새로 만들거나 정원을 조정할 수 있도록 문턱을 대폭 낮췄다. 교육부는 수도권만이 아니라 비수도권에도 적용되는 방안이라고 밝혔지만, 아무래도 반도체 관련 산업이 집중돼 있는 수도권에 학생들이 몰릴 것이 불 보듯 뻔하다는 게 세간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이처럼 윤석열 정부는 결과적으로 수도권 위주 성장·개발을 촉진하고 지원하게 되는 각종 규제 완화 정책을 펴고 있는 것이다. 지방의 반발은 당연한 것으로, ‘균형발전을 촉구하는 강원·영남·호남·제주·충청권 시민사회단체’ 등은 지난 25일 성명을 통해 정부의 규제 완화를 ‘개악’으로 규정하고 철회를 요구했다. 26일에는 지방분권균형발전 부산시민연대, 부산시민운동단체연대 등이 기자회견을 열고 윤석열 정부의 균형발전 공약 이행을 촉구했다.
“균형발전”은 헛구호?
이러한 사정으로 윤석열 정부가 겉으로는 균형발전을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지방을 기망하는 게 아니냐고 의심하는 이가 많다. 신(新)세종시정부청사 대통령 집무실을 둘러싼 논란이 그렇다. 세종시 중앙동에 들어서는 신청사는 올 10월 완공 예정인데, 행안부가 최근 밝힌 올 12월 신청사 입주 계획에 대통령 집무실은 빠진 것으로 알려졌다. 세종시 신청사에 대통령 집무실을 설치하는 일은 ‘윤석열 정부 지방시대 로드맵’의 출발점으로 여겨졌다. 이 때문에 윤 대통령은 당선 전부터 설치를 다짐했고, 지난 4월 대통령직 인수위도 올 12월 집무실 설치를 확인한 바 있다. 하지만 그런 구상이 사실상 철회됨으로써 윤 대통령의 지방시대 구호는 빛이 바랠 수밖에 없게 됐다.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격으로 원희룡 국토부 장관은 지난달 30일 관훈클럽 초청토론회에서 “수도권 시설을 지방으로 강제 이전하는 획일적 분산 정책은 실패했다”는 말을 했다. 원 장관이 언급한 ‘수도권 시설’은 곧 공공기관으로, 윤석열 정부는 ‘2단계 공공기관 지방 이전’을 주요 국정 과제에 포함시켜 놓았다. 그런데 균형발전의 주무 부처인 국토부의 수장이 공개적으로 이를 부정하는 발언을 한 것이다. 국책은행인 산업은행 이전을 추진 중인 부산을 비롯해 전국의 지방자치단체들은 원 장관의 발언이 부적절했다며 성토했다.
파장이 커지자 원 장관은 “공공기관 지방 이전이 지역의 지속적 성장이나 지역 자체 내에서 성장동력을 키우는 데 있어서는 너무나 한계가 많다는 뜻”이라고 해명했으나, 윤석열 정부의 균형발전 어젠다가 한낱 신기루에 그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불식시킬 수는 없어 보인다. 윤석열 정부가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균형발전 구호로 생색을 내다가 내팽개치고 결국 수도권 우선주의 본색을 드러냈다는 실망감을 떨치지 못하는 것이다.
진정성·실천으로 신뢰 찾길
윤석열 정부는 최근 6대 국정 목표를 확정했다. ‘상식이 회복된 반듯한 나라’ ‘민간이 끌고 정부가 미는 역동적 경제’ ‘따뜻한 동행 모두가 행복한 나라’ ‘자율과 창의로 만드는 담대한 미래’ ‘자유, 평화, 번영에 기여하는 글로벌 중추 국가’에 이어 마지막으로 제시한 게 ‘대한민국 어디서나 살기 좋은 지방시대’다. 지방시대를 달성하기 위해 ‘진정한 지역주도 균형발전 시대’ ‘혁신성장기반 강화 통해 지역의 좋은 일자리 창출’ ‘지역 스스로 고유한 특성을 살릴 수 있도록 지원’이라는 3가지 약속을 비롯해 세부 실천과제도 마련했다.
현란한 선언들이다. 하지만 더없이 화려한 약속도 의지와 능력이 없으면 만사휴의다. 내놓은 정책들이 앞뒤가 다르고 부처마다 행동과 생각이 다르다면 정부의 약속이 제대로 실천될 리 만무하다. 지금 윤석열 정부의 균형발전 구호가 그렇다.
무엇보다 균형발전 정책들을 다듬고 실행해야 할 컨트롤타워가 필요한데, 윤석열 정부 출범 3개월이 다된 지금까지 그 실체가 불투명하다. 대통령 소속 국가균형발전위원회의 업무는 문재인 정부가 임명한 김사열 위원장의 거취 문제가 정치 쟁점화 되면서 윤석열 정부 들어 사실상 마비된 상태고, 그에 따라 균형발전 정책들이 갈피를 못 잡고 표류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민 행안부 장관이 26일 윤 대통령에게 보고한 새 정부 업무계획에서 국가균형발전위원회와 자치분권위원회를 통합한 ‘지방시대위원회’(가칭)를 출범시켜 운영할 것이라고 밝혔지만, 통합 주체와 통합 후 운영체계에 대한 윤곽은 아직 분명치 않다.
지금 돌아가는 형편으로 보자면 윤 대통령과 정부가 균형발전에 의지를 갖고 있기나 한 건지 의구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윤석열 정부는 말이 아니라 구체적이면서도 진정성 있는 실천으로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고 신뢰를 되찾아야 할 것이다. 임광명 논설위원 kmyim@busan.com
2022-07-27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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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한국 곡물 자급률 20%, 이대로 괜찮을까
어쩐지 아직 초여름인데 너무 덥다고 생각했다. 지난달 평균기온이 역대 세 번째로 높았다고 한다. 심지어 6월 하순 평균기온은 전국적 기상관측망이 확충된 1973년 이래 가장 높았다. 부산의 도심 건널목에 고정형 파라솔이 흔해진 것도 갈수록 더워지기 때문이다. 6월 세계 평균기온 역시 관측 사상 세 번째로 높았다고 한다. 2019년과 2020년에 이어 세 번째였다니 예삿일이 아니다. 세상이 갈수록 뜨거워지면 앞으로 어떻게 되는 것일까. “올해가 당신이 앞으로 살아갈 세월 중에서 가장 시원한 해일 수도 있다”는 경고를 듣고 나니, 가슴속으로 냉기가 들어온다. 우리 이대로 정말 괜찮은 것일까….
이탈리아, 이달 초 40도 안팎 폭염
알래스카, 산불로 9700㎢ 피해
밀가루·식용유 등 가격 크게 올라
수입 곡물 가격, 하반기 폭등 조짐
국내 농지, 50년간 30% 이상 감소
곡물자급률, 2020년 기준 20.2%
식량 안보, 국가적 어젠다로 격상
글로벌 곡물 공급망 다변화 필요
■ 심상찮은 폭염·산불의 의미
요즘 세계 각국의 기상이 심상치 않다. 일본은 기상관측 이래 가장 더운 6월을 보냈다. 도쿄 도심의 최고기온은 연이어 닷새 동안 섭씨 35도를 넘었다. 지난달 27일부터 이달 3일까지 도쿄에서 열사병 사망자만 52명에 달한다. 이탈리아에서는 이달 초 40도 안팎의 폭염으로 최고 단계의 경계경보인 열파 적색경보가 발령됐다. 열파(熱波)가 어린이·노약자는 물론 건강한 성인에게도 심각한 악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어서였다. 지난 4일에는 이탈리아 알프스의 돌로미티산맥 최고봉인 마르몰라다 정상(해발 3343m)에서 빙하가 무너지면서 눈사태가 발생했다. 7명이 목숨을 잃고 14명이 실종되는 대형사고였다. 지난달부터 이탈리아 전역에서 지속된 폭염의 영향으로 만년설과 빙하가 녹은 것이 사고의 원인이었다. 미국 알래스카에서는 올해 5월부터 현재까지 산불로 9700㎢의 면적이 불에 타 역대 최악의 피해 기록을 경신 중이다. 지난해에는 시베리아의 영구 동토 지대에서 산불이 발생했다. 짧은 여름 기간 발생한 이 산불로 한반도보다 더 큰 면적이 불에 탔다. 이처럼 기후가 매년 나빠져서 재해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기후는 비가역성이 있어서 과거로 돌아갈 수가 없기에 더욱 우려스럽다. 정수종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는 한 인터뷰에서 “이전까지의 자연재해가 시기나 지역이 국한된 단발성이었다면, 최근에는 농업 등 연관 산업에도 영향을 미치는 복합 재해의 성격이 강해졌다”고 말했다. 기후위기가 유발하는 식량위기에 대해 시급하게 대비해야 할 때다.
■ 하반기엔 곡물 가격 더 뛴다
2분기 생활필수품 가운데 밀가루(31.3%)가 최고, 그다음으로 식용유(23.9%)가 많이 올랐다. 밀가루와 식용유가 없으면 안 되는 빵집, 중국집, 치킨집은 직격탄을 온몸으로 맞으며 버티고 있다. 물가 폭등 시대를 맞아 업주는 식당을 운영하기가 힘들고, 소비자는 외식 한 번 하기가 겁이 난다. 3분기 수입 곡물 가격은 전 분기보다 10% 이상 오를 수밖에 없다니 그야말로 첩첩산중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국제 곡물 가격이 고점을 찍은 시기(3~6월)에 구입한 물량이 3분기에 국내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세계 밀 공급의 3분의 1을 담당하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의 전쟁으로 인해 세계가 식량난을 겪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여기에 더해진 변수가 세계 2위의 밀 생산국인 인도다. 지난 5월 인도는 밀 수출을 연말까지 전면 금지했다. 세계 곡물 시장을 혼란에 빠뜨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자국의 식량 안보를 우선한 결정이었다. 122년 만에 찾아온 폭염으로 인도의 밀 생산량이 올해 최대 절반까지 감소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왔기 때문이다. 대체 인도가 올해 얼마나 더웠는지를 찾아보고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인도 수도 뉴델리의 5월 기온은 연일 섭씨 49도를 기록했다. 지속되는 폭염에 새까지 탈수 증상과 체력 고갈로 연이어 떨어질 정도였다. 올해 세계 각국이 내린 식량 수출 제한 조치는 57건이었다. 특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후 45건(78.9%)의 제한 조치가 집중됐다. 각국의 수출 제한으로 영향을 받는 곡물은 칼로리 기준으로 세계 전체 수출량의 16.9%에 달한다고 한다. 지금 당장 식량 안보를 걱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 농지 줄며 식량자급률 추락
“코로나19로 인한 국제 곡물 시장 불안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농지 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매년 여의도 면적 52배에 달하는 농지가 전용될 정도로 식량 생산 기반이 위협받고 있다. 적정한 식량 생산에 필요한 농업진흥지역 우량농지만큼은 확실히 지키겠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대선 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1970년 229만ha였던 농지는 2020년 156만ha로 줄었다. 50년간 30% 이상의 농지가 사라진 것이다. 이러니 1970년대 86.2%였던 식량자급률은 45.8%로 40.4%P나 하락했다. 쌀을 제외하면 상황은 더 심각하다. 2020년 기준 밀 자급률은 0.8%, 옥수수 3.6%, 콩 30.4%에 불과하다. 곡물자급률은 2020년 기준 20.2%에 그쳤다. 국내에서 소비되는 곡물 80%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사라진 농지 위에는 아파트, 도로, 산업단지 등이 들어섰다. 부산에서도 명지 개발로 ‘명지대파’가 사라졌고, 대저 신도시 개발로 ‘대저 짭짤이 토마토’가 그 뒤를 이을 전망이다. 더 이상의 농지 훼손을 막지 않으면 식량 안보에 큰 위협이 될 수 있다는 경고음이 나온 지 오래다. 하지만 고위공직자 인사청문회 때마다 ‘농지법 위반’은 여전히 단골 메뉴로 등장한다. 지난해 LH 사태 때를 돌이켜 봐도 그랬다. 농지는 투기 세력의 먹잇감이었다. 2010년 이후 시도별 농지전용 현황을 보면 경기도가 전체 농지전용 면적 가운데 24.1%(2만 6361ha)로 압도적으로 많았다.
■ 강대국은 식량위기 맞서 백년대계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는 “OECD 국가 중에서 식량 대란이 벌어지면 가장 심하게 당할 나라가 대한민국이다”라는 이야기를 자주 한다. 사실 한국의 식량 해외 의존도는 너무 높다. 식량을 가진 나라가 자기들 먹을 것도 없다고 안 팔면 못 사는 것은 간단한 이치다. 최 교수는 "식량 문제가 가장 심각한 문제인데, 대한민국 정부가 아직 별로 걱정하지 않는 것 같아 걱정이다"라고 말한다. 최근 〈식량위기 대한민국〉을 출간한 남재작 한국정밀농업연구소장은 “식량 위기는 남의 나라 얘기가 아니라 곡물자급률이 20% 미만인 한국이 10년 안에 겪게 될 문제다"라고 구체적으로 전망한다. 사실 가뭄, 산불, 전쟁 등 글로벌 위기가 겹쳐서 발생한다면 식량 위기는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식량을 자급자족하는 나라가 얼마나 되겠느냐고 항변할 수도 있겠지만 미국과 유럽, 중국, 일본을 비롯한 강대국들은 기후변화에 따른 식량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백년대계를 세워 놓고 있다. 미국은 항공우주국(NASA)이 농업 관련 인공위성을 활용해 세계 주요 작물의 재배 면적을 추정해 생산 현황을 분석하고 있다. 막대한 보조금을 통해 경쟁력이 생긴 중국의 밀 수입 의존도는 2.9%에 불과하다. 우리처럼 해외 식량의존도가 큰 일본도 2014년 호주와 경제파트너십 협정(EPA)을 맺을 때 향후 곡물 수출 금지 시 일본을 금지 대상에서 제외하는 조치를 이미 취했다. 도시 국가인 싱가포르는 무려 170개국에서 식품을 수입한다. 전략적인 수입선 다변화의 결과다.
하지만 우리는 식량 안보라는 의제 자체가 아직 낯설다. 식량자급률을 끌어올려야 하지만 현실은 쉽지 않다. 쌀이 과잉이고 콩, 밀, 보리, 옥수수 등 다른 작물은 터무니 없이 부족하다. 남 소장은 "더 늦기 전에 식량 안보를 국가적 어젠다로 격상시키고 글로벌 곡물 공급망을 다변화해 식량 위기에 대응하는 전략을 세워야 한다"고 간곡하게 이야기한다. 올해 우크라이나의 밀 파종량이 줄었으니 밀가루 가격 폭등은 최소한 내년까지 이어질 것이다. 2005년 중동 각국의 혁명으로 번진 ‘아랍의 봄’은 세계 식량 가격 상승이 촉매제였다. 식량 안보를 무시하면 난리가 난다.
2022-07-13 [1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