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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고개 숙인 한국 야구
2023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이 일본의 우승으로 마무리됐다. 한국의 성적표는 초라했다. 3회 연속 본선 1라운드 탈락. 한 수 아래라던 호주한테 덜미를 잡히더니 ‘라이벌’ 일본에 9점 차로 대패했다. 기대 이하다. 어떤 이는 이게 한국 야구의 진짜 실력이라 했다. 냉소가 아니다. ‘야구 변방’은 정확한 진단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실패를 나쁘게만 볼 필요는 없다. 한국 프로야구가 4월 1일부터 정규 시즌을 시작한다. KBO(한국야구위원회) 리그의 품질을 높이는 수밖에 없다. 거기에 한국 야구 중흥의 길이 있기 때문이다.
WBC서 확인한 ‘우물 안 개구리’
한국 야구의 부진은 무엇 때문일까. 먼저 투수력 하락에 방점이 찍힌다. 호주에게 8실점 하고 일본에 13점을 내줬다. 체코·중국한테도 각각 3실점과 2실점을 기록했다. 베테랑 투수들은 상대팀에게 철저히 분석 당했고, 새내기들은 공을 제대로 던지지 못했다. 요약하면, 노쇠함과 경험 부족 탓이 크다. 그 뒤에 ‘자만’이 도사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스피드 업’은 근래 세계 야구의 트렌드다. 한국 야구는 분명한 한계를 드러냈다. 일본 투수들은 시속 150km 이상의 빠른 볼을 우습게 던졌는데, 특유의 제구력도 여전했다. 한국 투수들은 극소수를 빼곤 그렇지 못했다. 스트라이크든 볼이든 원하는 곳에 투구하는 능력이 부족했다.
야구는 기본기다. 두말하면 잔소리다. 한국은 여기서도 구멍이 났다. 어이없는 주루사와 주루 미스가 득점 기회를 번번이 날렸다. 수비에서도 기초적인 실수가 나왔다. 평범한 송구와 포구를 잘 못해 실점의 빌미를 만들었다.
한국의 WBC 조기 탈락은 벌써 세 번째다. 더 이상 불운 탓을 말할 수 없다. 2017년 한국의 발목을 잡았던 이스라엘이나 이번 대회의 호주는 약체로 평가받은 팀이었다. 100경기 이상을 치르는 프로야구 리그도 없고 이름값 높은 메이저리거도 없는 나라다. 심지어 동호회 야구 체코에도 혼쭐이 난 한국 야구다. 이게 무슨 일인가.
새로 시작하는 마음으로
일본도 한국 야구로부터 배웠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일본은 한국에 두 번이나 지면서 노메달의 망신을 당했다. 그때 정신이 번쩍 들었던 모양이다. 좌절과 반성이 없으면 절치부심도 없는 법. 일본 야구는 결국, 세계 정상급으로 거듭났다. 우리도 실패를 거울삼아 근본적인 대안들을 찾아야 한다. 눈앞의 성적에 연연해하지 말고 멀리 내다보는 거시적 관점을 세우는 게 먼저다.
야구 발전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치열한 고민이 필요하다. 우선 국가대표 전임 감독제에 대한 재검토 목소리가 높다. 전임 감독제는 2017년 도입됐다가 곡절 끝에 2022년 폐기됐다. 과거를 돌아본다. WBC 준우승을 일군 김인식 감독은 정작 자신의 KBO 소속팀은 신경 쓰지 못했다. 올해 이강철 감독도 대표팀과 소속팀 양쪽으로부터의 부담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전임 감독제의 장점은 축구 국가대표 감독을 생각해보면 잘 알 수 있다. 젊은 인재를 발굴하고 순조로운 세대교체를 준비하면서 장기적 로드맵을 짜는 지도자의 역할이 그것이다. 국제대회에 자주 나가 경험을 쌓는 것도 중요한데 그런 점에서도 전임 감독제는 유리하다. 세계적 추세와 변화하는 규정에 발 빠른 대처도 가능하다.
그 밖에도 야구 발전을 위한 방안으로 외국인 선수 제한 완화, 정기적 국가 대항전 개최, 고교야구 알루미늄 배트 부활 등이 거론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전문가들의 견해가 엇갈리는 사안도 없지 않다. 과학적 검증과 연구를 통해 장단점을 충분히 살피는 진중함이 요구된다.
KBO 리그 '질적 향상'이 해답
한국 야구의 중심축은 엄연히 프로야구다. WBC에서 호성적을 바란다면 KBO 리그를 잘 가꾸면 된다. 프로야구가 재미있고 풍성해지면 관중이 많이 찾을 것이고 그러면 선수층도 두터워져 실력도 높아진다. 당연한 얘기다. WBC 같은 국제대회 성적은 저절로 따라온다.
KBO 리그는 2017년 역대 최다인 840만 명의 관중을 동원했다. 그러나 2018년(807만 명)을 기점으로 내리막길을 걸었다. 지난해엔 600만 명을 간신히 넘겼다. 팬들을 다시 경기장으로 불러들이려면 KBO 리그가 제대로 된 경기력을 보여 줘야 한다. 아니면 프로야구마저 소수의 팬들이 즐기는 ‘마니아 스포츠’로 전락한다. 결국 질적 수준의 향상이 관건이란 얘기다. 세계 정상급으로의 발돋움도 그래야 가능하다.
전문가들은 기반 구축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자금과 인프라, 인재 육성, 선수 복지, 팬 참여 확대 등 다양한 요소들이 있다. 야구 선진국인 미국과 일본의 프로야구가 그렇다. 현대적 편의시설과 첨단 기술, 팬들을 위한 안락함을 갖춘 경기장 등 일단 하드웨어가 훌륭하다. 선수들의 과도한 몸값에서 거품을 빼고 이를 잘 활용한다면 우리나라도 인프라 개선의 묘책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선수 발굴에 통 큰 투자를 마다하지 않는 시스템도 눈여겨볼 만하다. 유소년 리그라든지 스카우트 프로그램 등은 한국 야구가 인재 육성에 충분히 반영할 만한 내용들이다. 선수 복지 개념도 마찬가지다. 연령별 투구 수 제한, 부상 방지 프로그램처럼 선수 건강과 안전을 보호하는 엄격한 규정이 돋보인다. 다채로운 축제와 소셜 미디어 캠페인을 개발해 야구팬들을 관리하고 참여 확대를 유도하는 적극적인 노력들도 참고할 만하다.
튼튼한 기초와 철학적 소신을
한국 야구의 저변은 여전히 얇다. 어쩔 수 없이 이웃 일본과 비교하게 되는데 열악한 처지는 당혹스러울 지경이다. 2020년 일본 전역에 야구부가 있는 고교는 3940곳(야구 등록 선수 15만 명), 한국은 올해 기준으로 95곳에 불과하다.
지금 한국 아마 야구의 현장엔 위기감마저 감돈다. 저출생에다 코로나 사태가 겹쳐 유소년 야구 선수가 태부족해서다. 특히 초등학교 야구부가 크게 줄었다는 게 문제다. 중학교 선수들이 프로에 입단하는 4년 뒤엔 신인 지명에서 우수 선수를 찾아내기 힘들다는 암울한 전망이 나온다. 선수 부족이 야구 발전의 발목을 잡는 것보다 서글픈 풍경도 없을 것이다.
한국 야구의 뿌리는 아마 야구다. KBO가 선수 발굴과 구장 인프라 보강 등 아마 야구에 대한 과감한 투자와 지원에 적극 나서야 한다. 백 마디 말보다 단 한 번의 실천이 절실한 때다.
선수와 지도자들의 노력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야구라는 몸의 제전을 손수 만드는 주인공들이기 때문이다. 올바른 훈련과 신기술을 끊임없이 연구하고 공부하는 지도자가 필요하다. 선수들은 존재의 본질을 구현하는 사람으로서 직업적 소명 의식을 다지는 데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한다. 철학적 소신, 반성과 성찰 같은 무형의 덕목이야말로 인프라와 경제성, 리그의 품질보다 더 소중한 가치다. KBO 리그 운영, 선수들의 노력, 팬들의 사랑, 이 삼두마차가 끌고 가는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기대한다.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
2023-03-22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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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빗장 풀린 케이블카, 전국 명산 뒤덮나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논란의 대상이었던 설악산국립공원 내 새 케이블카 설치가 환경부의 조건부 동의를 받으면서 전국의 다른 명산에도 다시 케이블카 설치 논의가 불붙고 있다. 환경부는 최근 강원도 양양군의 오색케이블카 설치 사업 환경영향평가에 대해 조건부 동의 의견을 밝혔다. 1972년에 설치된 기존 권금성 케이블카에 이어 설악산 내 두 번째 케이블카를 허용한 것이다.
상부 정류장의 위치를 하향 조정하는 조건을 덧붙이기는 했지만, 그동안 환경 훼손 등을 우려하는 케이블카 반대 측의 강력한 반발을 무릅쓰고 내린 결정이다. 이에 따라 그동안 환경부의 판단을 주시하던 전국의 다른 지자체들도 서둘러 케이블카 추진 의사를 밝히는 등 곳곳에서 케이블카 논의가 뜨겁다.
40년 만의 설악산 케이블카
설악산 오색케이블카 논의는 40년 전인 1982년 처음 제기됐다. 제기될 당시부터 찬반 논란으로 뜨거운 감자였던 오색케이블카 설치는 문화재현상변경허가 등 문제로 수년 동안 진척이 없었다. 그러다 2015년 대청봉~관모능성 구간으로 예정했던 노선을 오색지구~끝청으로 변경·보완한 뒤 국립공원위원회에서 조건부 승인을 얻으며 속도를 내는 듯했지만, 환경영향평가 조작·부실 의혹이 제기돼 다시 좌절됐다.
이후 몇 차례 더 우여곡절을 겪은 오색케이블카 설치는 지난해 대선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공약으로 탄력을 받기 시작해 결국 이번에 환경부의 승인을 얻었다. 오색케이블카는 길이 3.3㎞로, 8인승 곤돌라 53대가 시간당 800여 명을 실어 나를 예정이다. 사업비는 1000억 원으로 2026년 완공될 계획이다.
환경부 승인으로 40년 동안의 오색케이블카 논란은 일단 행정적으로는 마무리됐다. 하지만 이는 명산을 끼고 있는 전국 지자체에 ‘케이블카 설치 가능’이라는 새로운 불씨를 던졌다. 벌써 전국 곳곳에서 케이블카 설치 논의가 불붙기 시작한 점이 이를 잘 보여 준다.
‘지리산 케이블카’도 재점화
오색케이블카 허용으로 그동안 케이블카 설치를 저울질하던 전국 지자체들도 공식적으로 사업 추진을 밝히고 있다. “국립공원 설악산에도 케이블카가 허용됐는데, 우리 지역이라고 안 될 이유가 없다”며 앞다퉈 나서는 모양새다.
현재 케이블카 설치가 거론되고 있는 지역은 전국 10여 곳에 이른다. 남부권역만 해도 당장 지리산과 울산의 신불산, 부산 황령산, 대구 팔공산을 비롯해 서울의 북한산, 충북 속리산, 광주의 무등산 등 곳곳에 걸쳐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주목되는 곳은 경남·전남·전북의 3개 도에 걸쳐 있는 우리나라 제1호 국립공원 지리산이다. 지리산에 케이블카를 설치하는 논의는 오래됐다. 그러나 사업 주체를 둘러싼 지자체 간 경쟁과 정부의 승인 여부, 환경단체 반발 등 문제로 별다른 진척을 보지 못했다.
우선 경남도가 2012년, 2016년, 2017년 세 차례에 걸쳐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지리산 장터목~함양군 마천면 추성리를 잇는 길이 10.5㎞의 케이블카를 추진했으나, 환경부에 의해 3차례 모두 반려됐다. 그런데 오색케이블카 승인을 계기로 분위기가 바뀌자 박완수 경남지사가 이달 2일 지리산 케이블카 추진 재개를 선언하며 선수를 치고 나왔다.
여기에 최근 전남도와 구례군도 지난해 반려됐던 지리산 케이블카 재추진 의사를 밝히며 가세한 상태다. 예전 독자적인 케이블카 설치를 추진했던 인근 경남 하동·함양군, 전북 남원시의 움직임도 주목된다. 이들까지 합세할 경우 지리산 케이블카 설치의 주도권을 놓고 다시 이웃 지자체 간 과열 경쟁이 재연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신불산·황령산 케이블카도 시동
울산 울주군도 오색케이블카 승인에 고무돼 있기는 마찬가지다. 20년 숙원인 신불산 케이블카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이미 현직 지자체장이 신불산을 포함한 울주 7봉을 산악 대표 관광지로 만들겠다며 신불산 케이블카 설치를 공약한 마당에 오색케이블카 소식은 이 사업 추진에 더 없는 청신호라고 받아들이고 있다.
최근 울주군은 그동안 낙동강유역환경청의 환경영향평가 ‘부동의’ 의견을 반영한 새로운 현황 조사와 기본설계 등을 바탕으로 신불산 케이블카 설치를 위한 행정절차 진행에 착수했다고 한다. 내년 초 착공, 2025년 하반기 준공이라는 로드맵까지 마련하며 총력전을 펼 기세다.
부산에서도 민간 기업이 도심에 위치한 황령산 정상에 케이블카를 설치하는 사업을 진행 중이다. 지난해 말 부산시 도시계획위원회 심의에서 안건이 조건부 통과됐는데, 지역사회의 반대 여론 등 논란이 가라앉지 않고 있다. 대구시의 팔공산 케이블카도 주목 대상이다. 홍준표 시장 취임 이후 불교계와 환경단체의 반발에 밀려 사업을 중단했지만, 최근 케이블카 빗장이 풀리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대구시는 당장 사업 재개에 대해선 말을 아끼고 있으나, 언제든 사업이 재추진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정부의 명확한 가이드라인 필요
전국에서 케이블카 설치 논의가 봇물 터지듯 나오는 것과 더불어 이를 둘러싼 찬반 논란도 더 뜨거워질 전망이다. 케이블카 설치 논란은 오래됐음에도 불구하고 양측 주장의 논점은 그동안 거의 변하지 않았다.
반대 측의 주된 논거인 환경 훼손 주장과 찬성 측의 관광산업 활성화가 늘 팽팽하게 맞선다. 반대 측은 케이블카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빚어질 환경 훼손과 함께 설치 이후 많은 인파로 인한 자연 생태계의 훼손은 피할 수가 없다고 여긴다. 게다가 자연 공원은 그 자체의 가치를 존중하고 보존할 때 가장 빛을 발한다고 주장한다. 인공물 설치는 근본적으로 여기에 반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찬성 측은 자연환경도 지키면서 지역의 관광산업을 활성화하는 데 케이블카 설치는 괜찮은 방안이라고 꼽는다. 정해진 노선을 따라 관광객의 동선을 유도하면 오히려 자연 훼손을 줄이면서도 많은 사람이 편안하게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할 수 있다는 점을 내세운다. 관광객이 찾아오면서 지역경제도 활기를 띠는 효과를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양측의 주장은 어느 곳이고 지역 특성에 따른 세부 여건을 제외하면 크게 이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양측의 팽팽한 주장 사이에서 정부가 뚜렷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일관성 있게 이를 적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무엇보다 케이블카 입지 선정의 타당성과 재해 위험성 등을 비롯한 환경평가 과정에서 민주적이고 개방적인 논의를 보장할 필요가 있다. 결론을 내리는 데까지 시일이 걸리더라도 논의 과정에 진입 차단의 벽을 치는 것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바람직하지 않다. 케이블카 설치의 빗장이 열린 지금, 전국의 명산을 보존하면서도 지자체의 현실적인 요구를 양립시킬 수 있는 정부의 혜안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다. 곽명섭 논설위원 kms01@busan.com
2023-03-08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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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세계 최대 해운동맹의 해체 예고
지난 연말연시에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WB), 유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잇따라 올해 세계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당초 예상치보다 낮춰 잡았다. 24일로 발발 1년이 되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장기화와 미국·유럽 경제의 성장 둔화, 기후변화 등의 여파로 불확실성과 변동성이 커져 경기 전망이 어둡다는 이유에서다. 올 세계 경제성장률은 지난해에 비해 낮은 2%대 수준에 그칠 것이라는 암울한 예측이 지배적이다.
글로벌 경기 침체는 해운산업에 직격탄을 안긴다. 고속열차와 초음속 비행기의 등장 등 철도와 항공 교통수단이 발달했어도 전 세계 무역의 대부분은 여전히 선박을 이용한 해상 운송에 의존하고 있어서다. 실제로 올해 세계 교역 위축과 컨테이너선 수요 감소에 따른 해운 운임 급락세로 글로벌 해운사들의 실적 악화가 예상된다는 분석이 나온다. 여기에 선복량(배에 실을 수 있는 화물의 총량) 기준 세계 1·2위의 공룡 선사인 스위스 MSC와 덴마크 머스크가 2015년 결성한 최대 해운동맹인 ‘2M’을 2025년 1월 해체한다는 발표가 더해져 해운업계가 술렁이고 있다. 대형 선사들의 제 살 깎아 먹기식 치킨게임이 재현될 가능성이 생긴 까닭이다.
■치킨게임의 뼈아픈 기억
2017년 2월 국내 1위, 세계 7위 선사이던 한진해운이 파산해 68년 역사를 마감했다. 이는 글로벌 선사들의 해운 운임 인하 경쟁에서 패한 상대적 약자의 비극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원자재 수요가 급감하고 가격이 급락해 해운 수요도 급전직하한 게 발단이 됐다. 해운업계는 세계의 화물 물동량 감소와 운임 폭락이 이어지는 바람에 어려움에 휩싸였다. 그 이전 호황기에 기댄 선사들이 앞다퉈 선복량을 확대하며 덩치를 키운 터라 충격은 배가됐다. 선사마다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거액을 들여 초대형 컨테이너선 건조와 확보에 나선 상태에서 엄청난 타격을 받은 것이다.
해운 불황을 맞은 선사들은 2010년부터 생존을 위한 저가 운임 경쟁을 전개했다. 당시 선복량 세계 1위인 머스크가 운임 인하를 주도했다. 규모와 자본력에 밀려 치킨게임을 버티지 못한 선사는 경영 위기에 시달리거나 도산할 수밖에 없었다. 주요 국가의 자국 해운업을 지키려는 노력도 뒤따랐다. 중국은 막대한 지원금 투입과 M&A(인수합병)를 통해 자국 선사의 몸집을 키우는 데 주력했다. 일본은 정부 주도로 3개 대형 선사의 컨테이너 부문을 합병했다.
이와 달리 우리 정부는 한진해운 파산을 선택했다. 선복량 경쟁을 위해 값비싼 장기 용선 비중을 크게 높인 한진해운이 저가 경쟁과 적자 누적으로 경영난이 심각했기 때문. 이 회사 회장 일가의 도덕적 해이가 정부와 국민의 반감을 산 것도 파산에 한몫했다. 하지만 피해가 막대한 물류대란을 빚을 때마다 한진해운과 함께 사라진 거미줄 같은 원양 정기 항로는 포기해선 안 되며 새로 구축하기도 힘든 경제 인프라이자 해양영토란 사실을 뼈저리게 느껴야만 했다. 해운업은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의 수출입 화물 99%를 담당한 중요한 기간산업임을 간과해 한진해운의 회생을 외면한 결과다.
■2M 해체… 저가 경쟁 부르나
지난달 25일 MSC와 머스크는 2년 뒤인 2025년 2M 계약을 10년 만에 해지한다는 계획을 밝혔다. 2M은 세계 항로의 40%를 점유한 최대 해운동맹이다. 해운동맹은 정기 항로를 가진 선사들끼리 협정을 맺어 배와 부두를 함께 사용하고 노선도 조정해 공동 운항하는 국제 관행이다. 과다 경쟁을 피할 수 있으며 자원과 비용의 투입을 늘리지 않아도 독자 운항보다 더 많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어 장점으로 꼽힌다. 또 다른 동맹으로는 점유율이 각각 35%, 25%인 ‘디 얼라이언스(The Alliance)’와 ‘오션(Ocean) 얼라이언스’가 있다.
2M 해체를 전후해 선사들의 선복량과 노선 확보 경쟁이 불붙을 것으로 보인다. 두 거대 선사 MSC·머스크의 결별은 3개인 해운동맹이 사실상 4개 체제로 바뀌는 걸 뜻한다. 따라서 두 선사는 점유율 확대를 노린 경영이 불가피하다. MSC는 이미 단독으로 부산항 신항~인도 간 직항로를 개설해 다음 달 26일 1만 2000~1만 6000TEU급 초대형 컨테이너선 12척으로 신규 운항에 들어간다. 벌써부터 독자 노선 강화와 치열한 경쟁을 점칠 수 있는 대목이다.
머스크가 2020년대 들어 자체 선박을 늘린 MSC에 빼앗긴 세계 최고 자리를 되찾기 위해 공격적으로 선대를 확충할 경우 1·2위 다툼은 격화할 전망이다. 이 과정에서 또다시 운임 인하 등 출혈 경쟁이 벌어질 우려가 있다. 최근 글로벌 경기 둔화와 물동량 감소 탓에 폭락한 국제 해운 운임은 이 같은 걱정을 뒷받침한다. 15개 주요 항로를 종합한 상하이컨테이너운임지수(SCFI)가 지난해 1월 5000선을 웃돌다 이달 17일 974.66으로 폭락했을 정도다. 머스크만 해도 올 수익이 악화해 성장률이 -2.5~0.5%에 머물겠다는 예측이 잇따르는 실정이다. 줄어든 물동량을 선점하려는 선사들의 운임 할인으로 장기적으로 저가 경쟁이 심화할 수 있다는 주장이 일부에서 제기되는 이유다.
■국내 해운·항만업계 대응은
2M 해체 선언으로 최대 선사 MSC는 독자 노선을 걸을 가능성이 크다. 항공 분야까지 진출해 종합물류기업으로 변모한 머스크는 해운의 부족한 부분 보강이나 경비 절감을 목적으로 새로운 협력 선사를 찾아 동맹 관계를 형성할 개연성이 있다. 이로써 연쇄적인 동맹 탈퇴와 제휴가 논의되고 이합집산이 이뤄져 해운시장이 재편될 수도 있다. 이런 환경에서도 성장 기회를 만들려는 선사들 간 경쟁이 펼쳐질 것이 분명하다. 만일 경쟁이 과열된다면 해운 운임을 더욱 끌어내리는 요인으로 작용할 테다.
최대 국적 선사인 HMM(옛 현대상선)은 한진해운의 빈자리를 통감한 정부의 전폭적인 금융 지원에 힘입어 현재 선복량 세계 8위 규모로 급성장했다. 더욱이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세계적인 해운 특수 덕분에 창사 이래 최대 수익을 올렸다. 이를 계기로 HMM 최대 주주인 산업은행은 HMM 지분을 매각해 민영화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하지만 올해 글로벌 경기와 해운 업황의 극심한 침체가 예상되는 상황인 만큼 시기와 시장을 잘 살피는 등 신중하게 접근할 일이다.
또 HMM은 독일 하팍로이드, 대만 양밍 등과 함께 2030년까지 디 얼라이언스 소속으로 계약돼 있지만, 전문가들 사이에서 머스크가 신규 동맹을 제안할 유력한 상대로 평가된다. 2M의 과점 체제 붕괴는 선사들에게 위기인 동시에 기회이므로 HMM에 주요 선사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면서 이해득실을 꼼꼼히 따져 신속히 대응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글로벌 생존 싸움을 이겨 내고 국가 해운력을 강화할 경영전략이 요구되는 건 물론이다. 부산 항만 당국과 항만·물류업계 역시 해운시장의 동태를 면밀히 관찰해야 할 것이다. 3개 해운동맹은 부산 신항 2~5부두에 기항 중이다. 상황 변화에 맞춰 컨테이너 물동량 유치와 증대를 위한 항만 세일즈 대책이 마련돼야 마땅하다. 강병균 논설위원 kbg@busan.com
2023-02-22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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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빼앗긴 문화재 왜 돌려받지 못하나
약탈 문화재의 환수 문제와 관련해 지난 1일 대전에서 있었던 판결 하나가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대전고법은 이날 충남 서산에 있는 부석사가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유체동산 인도 청구 항소심(2심)에서 원고 청구 기각 판결을 내렸다. 여기서 유체동산은 하나의 불상이다. 부석사 측은 해당 불상이 원래 부석사에 있다가 고려시대에 일본에 의해 약탈된 것으로, 소유권이 부석사에 있다고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일본의 소유권을 인정한 셈으로, 대한불교 조계종을 비롯한 각계의 반발이 거세다.
■“소유권은 일본에” 2심 판결
문제의 불상은 50.5cm 높이의 금동관음보살좌상이다. 일본 쓰시마 간논지(觀音寺)에 있던 것을 2012년 한국인 도굴꾼들이 훔쳐 부산항으로 가져왔다. 이들은 국내에서 이를 몰래 팔려고 하다가 경찰에 의해 이듬해 검거됐고, 불상은 회수돼 대전 국립문화재연구소 수장고에 보관 중이다.
1951년 간논지는 이 불상의 복장(服藏)을 열어 부장품을 조사했는데, 그 안에 불상의 조성 경위를 밝힌 기록이 있었다. ‘1330년 2월 서주(현재 서산) 부석사에 관음상을 만든다’는 내용이었다. 지금 부석사가 불상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이유다. 부석사는 14세기 후반 왜구가 이를 약탈해 쓰시마로 가져간 것으로 본다. 실제로 〈고려사〉는 1352~1381년 다섯 차례 왜구가 서산 일대를 약탈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부석사는 이를 근거로 2016년 국가를 상대로 반환 소송을 제기했다. 2017년 재판부는 “왜구의 침입으로 비정상적 형태로 반출된 것으로 보인다”며 부석사 손을 들어 줬다. 사람들은 금동관음보살좌상이 당연히 부석사로 돌아오는 줄로 알았다.
하지만 간논지가 거부했다. 쓰시마와 교류가 활발하던 조선 초기 불상을 양도받은 것으로 약탈이 아니며, 수백 년간 점유했으니 한·일 양국 민법의 점유취득시효 개념상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거기에 더해 국가를 대리해 소송을 진행하던 검찰이 “1330년 부석사와 현재 부석사가 이름은 같아도 같은 절이라는 근거가 없다”며 항소했다. 부석사는 뚜렷한 반박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고, 결국 2심 재판부는 간논지와 검찰의 주장을 받아들여 부석사 측의 소유권을 확정해 주지 않았다.
파장은 커지고 있다. 일본 정부는 해당 불상을 당장 반환하라고 우리 정부에 요구하고, 조계종 등 불교계는 “문화재 약탈에 면죄부를 준 몰역사적 판결”이라며 대법원 상고 의지를 천명했다.
■약탈 문화재 반환은 국제 추세
약탈 등 불법적으로 반출됐으면 돌려받는 게 당연하지만 현실에선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약탈 행위를 증명하기도 어렵거니와 나라마다 복잡다단한 역사적 맥락을 무시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약탈 문화재를 놓고 국제적인 갈등이 끊이지 않는 까닭이다. 이런 현실을 개선하고자 나온 게 ‘유네스코 협약’이다. 1970년 체결된 이 협약은 전쟁과 식민지 지배, 도난 등 불법 반·출입된 문화재를 원래 자리로 반환하도록 규정했다. 140여 개국이 회원국이고, 한국도 1983년 가입했다.
그렇다면 이 협약에 근거해 부석사 불상 반환을 요구할 수 있지 않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실현성이 거의 없다. 이 협약의 내용은 1970년 이전으로는 소급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고려 때는 물론 일제강점기 약탈 문화재의 반환 요구도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네스코 협약은 아예 의미가 없는 것이냐. 꼭 그렇지는 않다. 적어도 약탈 등 불법으로 취득한 문화재는 반드시 환수돼야 한다는 원칙을 국제사회에 확산시킨 점은 충분히 의미가 있다. 문화재 환수에 대한 국제사회의 윤리적 도의적 책임을 새롭게 환기시킨 것이다.
실제로 근래 약탈 문화재를 반환하는 분위기가 국제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미국 최대 미술관인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전시 중이던 고대 그리스·로마와 이집트의 도난 문화재 상당수를 이탈리아와 이집트 등에 반환하기로 지난해 9월 결정했다. 지난해 11월에는 영국 ‘호니먼 박물관’이 영국군이 1897년 나이지리아에서 약탈한 청동제 부조 작품 같은 문화재를 나이지리아 당국에 돌려 줬다. 나이지리아 정부는 최근 독일과 프랑스로부터도 유물을 돌려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최근에는 영국박물관에 전시 중인 고대 그리스의 ‘파르테논 마블스’의 반환을 두고 영국 정부와 그리스 정부 사이 논의가 진행 중이다.
■한·일 정부, 협상 적극 나서야
국외소재문화재재단에 따르면 올해 1월 기준 국외에 있는 우리 문화재는 27개국에 23만 점 정도다. 그중 일본이 9만 5600여 점으로 전체의 41%를 차지한다. 하지만 이는 파악이 가능한 주요 박물관 등을 중심으로 조사한 결과이고, 개인 소장품 등 공개되지 않은 문화재는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문화재들은 대부분 불법적으로 약탈됐지만 약탈한 쪽에서 자발적으로 돌려주지 않는 이상 환수하기는 극히 어렵다.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부석사 불상도 대법원에 상고하는 것 이외에 다른 법적인 해결 방법은 보이지 않는다. 상고해도 2심이 1심 판결을 뒤집고 사실상 일본 측의 손을 들어 준 만큼 특별한 사유가 발생하지 않는 한 이기기는 힘들다는 게 중론이다. 요컨대 이를 환수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협조가 필수적이라는 이야기다. 피해 회복을 위해 가해자의 협조를 구해야 하는 게 억울하고 안타깝지만 그게 현실이다. 그래서 개인, 단체, 특히 국가 사이 협상이 중요하다.
결국은 정부의 외교력에 달린 문제라고 할 수 있다. 1866년 프랑스군에 약탈됐던 ‘외규장각 의궤’ 환수가 좋은 예다. 비록 온전한 소유권 이전이 아닌 장기 대여 형식이지만, 그래도 수십 년에 걸친 정부의 외교 노력이 없었다면 이루지 못했을 성과다.
부석사 불상에 대해서도, 대법원 소송과는 별도로, 우리 정부가 문화재 반환 논의 테이블에 일본 정부를 적극 끌어들여야 한다.
마침 일본과의 관계 개선에 유달리 애착을 갖는 윤석열 정부다. 부석사 불상 환수 여부는 향후 국제적으로도 약탈 문화재 문제 해결에 대한 시금석이 될 것이다. 그런 만큼 윤석열 정부는 가진 역량을 총동원해 국민이 납득할 만한 성과를 거두어야 할 것이다.
2023-02-08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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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책방골목에도 봄이 오는 소리
‘책의 위기’가 시작된 지는 오래되었다. 우리만 그런 것도 아니다. 출판사와 독자가 많아 ‘출판 대국’으로 불리는 일본조차 서점 수가 지난 10년간 30% 감소했다고 한다. 롯데마트는 올해 초 25년 만에 종이 전단지를 전부 없애고 모바일 전단으로 대체하기로 했다. 사소해 보이는 종이 전단지의 종말, 어쩌면 먼저 온 미래일지도 모른다. 보수동 책방골목의 위기도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1980년대 후반 70여 곳에 달하던 보수동 책방골목의 서점은 현재 31곳으로 줄었다. 서점 업주들이 대부분 고령이라 달라지는 세태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70년 전통을 얕잡아 봐선 안 된다. 혹한 속에서도 변화의 새싹을 틔우고 있는 보수동 책방골목으로 가 보았다.
■우리는 책방골목 서포터즈
“시간이 지나서/다시 나타난다면/나도 잊기 싫어 돌아간다고 넌 전해줘/Hey man 그래도 내 동넨데/Way 없진 않지 버텨 주길 바라/I say 2년 뒤에 나 다시 돌아올게/난 가더라도 여기에 추억은 그대로길 바라.” 보수동 책방골목을 걷다 공사판 가림막 위에 인쇄된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을 만났다. 유튜브에서 찾아서 들은 ‘보수동, 그 거리(In 책방골목)’ 노래의 가사 일부를 옮긴 것이다. 혜광고 학생들이 직접 작사 작곡한 랩 스타일 노래다. 젊음이 발산하는 그 풋풋한 감성에 반해 플레이리스트에 바로 저장했다. 유튜브에 남겨진 댓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보수동 책방골목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수많은 어른들은 해내지 못했지만, 우리 친구들은 그들의 책방골목을 위해 무언가를 해냈다.” 고맙다 우리 친구들!
커피 향은 책 읽는 운치를 더한다. 아직 스페셜티 커피 ‘보수동 블렌드’를 맛보지 않았다면 어쩌면 책방골목을 제대로 둘러본 게 아닐지도 모른다. 부산 중구시니어클럽이 운영하는 보수마루북카페와 건강북카페에서 보수동 블렌드를 한 잔에 1000원이라는 파격적인 가격에 판매하고 있다. 동구 초량동에서 마리스텔라 커피를 운영하는 박성우·이정민 부부 바리스타가 지난해 보수동 책방골목 살리기에 동참하면서 보수동 블렌드를 기꺼이 내놓은 덕분이다. 보수동 블렌드 원두도 100g에 5000원으로 너무 착하다.
보수동 책방골목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에 있었다. 보수동 블렌드 개발을 제안한 혜광고 김성일 교사도 그 중 한 사람이다. 그는 동주여고에 근무할 때 학생들과 함께 〈보수동 책방골목 와보시집〉, 〈와보시집 두 번째 이야기〉를 발간했다. 혜광고로 자리를 옮겨서도 학생들과 〈보수동, 그 거리〉 시집을 출간하고, 뮤직비디오까지 제작한 것이다. 동아대 산업디자인학과 김재홍 교수와 학생들은 지난해 12월 굿즈 개발과 QR코드 활용 등 MZ세대를 책방골목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아이디어 발표회를 열어 관심을 모았다.
■아테네 학당, 핫플레이스 예감
“저게 뭐지?” 부산 중구 대청로 63 부근을 처음 지나가는 사람이면 꼭 하는 말이다. 전에 못 보던 5층 높이(16m)의 거대한 책 다섯 권이 책장에 꽂힌 듯 나란히 세워져 눈길을 끈다. 책의 모양을 한 이 건물이 ‘아테네 학당’. 보수동 책방골목 문화관 바로 옆에 위치했다. 아테네 학당은 르네상스 시대 거장 라파엘로가 바티칸 궁전의 교황 개인 서재에 그린 벽화의 이름이다. 벽화에 등장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각각 들고 있던 책을 형상화했다고 한다.
아테네 학당이 들어서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지난해 11월까지만 해도 건물주이자 건설회사 대표는 기존의 건물을 헐고 오피스텔을 지으려고 했다(〈부산일보〉 2022년 10월 18일 자 등 보도). 오래된 서점 3곳이 또다시 사라질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오피스텔 설계비까지 포기하고 리모델링으로 급선회한 건설회사 대표의 변심은 큰 화제가 되었다. 김대권 아테네 학당(신양건설) 대표는 “사정을 잘 모르고 건물을 매입했지만 상인들과 시민들이 책방골목 쇠락을 걱정하고 고민하는 목소리를 직접 듣고는 외면할 수 없었다. 수익을 어느 정도 포기하고 책방골목 되살리기에 힘을 보태기로 했다”고 말했다. 참고로 지난 3년간 재개발이나 임차료가 올라 폐점한 서점은 12곳에 달한다.
2월 말 개장을 목표로 마무리 공사 중인 건물 내부를 미리 둘러봤다. 역시나 ‘아테네 학당’ 벽화가 천장을 장식하고 있었다. 1층에서는 우리글방 등 기존 책방 3곳이 그대로 장사를 하고 있었다. 2층부터 4층까지는 카페와 문화공간이다. 서재 콘셉트로 꾸며진 공간은 ‘독서 모임방’으로 만들겠다고 했다. 벽화에 등장하는 아폴론·아테나신상,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등의 흉상도 이미 만들어져 곧 설치될 예정이다. 카페에서는 시그니처 메뉴와 커피를 준비 중이었다. 책을 펼친 모양의 ‘보수동 책빵’은 사진만 봐도 인기 폭발을 예감하겠다. 예전 문인들이 좋아했다는 각설탕을 올린 진한 맛의 시그니처 커피 이름을 고민하길래 ‘밀다원’을 추천했다. 밀다원은 피난 시절 광복동에 있었던 다방이다. 밀다원에는 김동리, 황순원, 김말봉, 이중섭, 김환기 등 문인과 예술가들이 상주하다시피 했다.
■헤이온와이, 관광객 오며 살아나
아테네 학당이 들어서면서 보수동 책방골목에 대한 관심이 다소 살아난 게 사실이다. 새롭게 책방골목을 주목하는 프랜차이즈까지 있다고 한다. 하지만 제비 한 마리가 봄을 가져오진 않는다. 책방골목이 지금은 겨우 연명만 하는 수준을 지나 임종을 기다리는 상태라는 냉혹한 평가도 있다. 책방골목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아테네 학당 건물이 기괴하게 보인다는 말도 한다. 사업가 김대권 대표의 생각은 달랐다. “거리가 활성화되는 느낌만 들면 사람들은 오지 말라고 해도 몰려온다. 그것은 돈이 돌기 때문이다. 보수동 책빵이 잘 팔리면 빵 공장도 책방골목에 만들 생각을 하고 있다. 아테네 학당이 잘 되어서 그 영향을 주변에도 미치고 싶다. 책 모양 건물이 몇 개 더 만들어지면 책방골목이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공간이 될 것이다.”
영국 남서부 웨일스의 작은 시골이자 세계 최초 책마을인 헤이온와이를 떠올린다. 헤이온와이의 창시자 리처드 부스는 “사람들은 헤이온와이에서 어떻게 책을 팔 수 있겠냐고 묻곤 했다. 헤이온와이의 누구도 책을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관광객들이 오면서 상황이 나아졌고, 책은 이 나라 문화의 완벽한 상징이 됐다”고 말했다. 한길사 김언호 대표는 보수동 책방골목을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고 싶은 책의 고향이라고 자주 이야기한다. 그는 곧 동네책방을 연다는 문재인 전 대통령이 머무는 평산마을에 가서 보수동 책방골목을 화제로 대화하기도 했다. 공간이 사라지면 추억도 함께 사라진다. 보수동 책방골목은 부산의 미래유산이다. 책을 세운 건물에 이어 책을 차곡차곡 눕힌 건물이 생기면 어떨까. 한글 디자인 건물도 좋겠다. 책을 테마로 한 게스트하우스나 맥주·와인을 한잔하면서 독서를 즐기는 북카페도 대환영이다. 보수동 책방골목의 르네상스를 기대한다. 박종호 수석 논설위원
2023-01-25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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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빨라지는 국민연금 개혁 시계
국민연금 개혁의 시계가 빨라지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신년사를 통해 노동·교육 개혁과 함께 연금 개혁을 속도감 있게 진행하겠다고 드라이브를 걸면서다.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 산하 민간자문위원회는 ‘연금 개혁 방향과 과제’라는 보고서를 제출하고 이달 말까지 개혁안 초안을 내놓는다는 계획이다. 보건복지부도 3월로 예정된 국민연금 재정추계 발표 일정을 이달 말로 앞당겨 속도감 있는 개혁 논의를 지원하기로 했다. 안정된 노후와 기금 고갈에 대한 불안감으로 국민연금 개혁 논의를 지켜보는 국민들의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국민연금 개혁 왜 필요한가
2018년 재정추계에서는 국민연금을 현행(보험료율 9%·소득대체율 40%)대로 유지하면 기금이 2042년 적자로 전환된 뒤 2057년 고갈될 것으로 분석됐다. 정부는 2003년 1차, 2008년 2차, 2013년 3차, 2018년 4차 등 5년마다 국민연금 곳간 상태가 어떤지 진단하는 재정추계를 해 오고 있는데 저출산 고령화로 기금 고갈 시기가 빨라지고 있는 것이다. 올해 발표될 5차 재정추계에서는 4차 때보다 1~2년 더 앞당겨질 전망이다. 국회예산정책처는 2039년 적자로 돌아서고 2055년 기금이 모두 소진될 것으로 예측했다. 한국개발연구원은 이 시기를 1년씩 더 앞당겼다. 어쨌든 현재의 20대들이 국민연금을 받아야 할 시기에는 기금이 모두 고갈된다는 이야기다.
■정치 논리에 밀린 개혁 논의
국민연금은 1988년부터 35년째 시행 중이다. 초기 보험료율 3%에 생애 평균소득 대비 연금액 비율인 소득대체율 70%를 보장하는 제도로 출발했다. 보험료율은 5년마다 3%포인트씩 9%까지 높이기로 돼 있었다. 문제는 적게 내고 많이 받는 구조와 고령화로 기금 고갈이 불을 보듯 뻔한데 개혁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데 있다. 35년간 개혁은 1998년과 2007년 두 차례뿐이었다. 김대중 정부 때인 1998년 소득대체율을 70%에서 60%로 낮추고 수급 연령을 60세에서 5년마다 1세씩 2033년 65세까지 늦췄다. 노무현 정부는 보험료율을 12.9%로 올리고 소득대체율을 50%로 내리는 방안을 추진했지만 국회 논의 과정에서 무산돼 소득대체율만 2028년까지 40%로 인하했다. 문재인 정부 때인 2018년 기금 고갈 논란이 커지자 더 내고 더 받는 개편안이 추진됐지만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흐지부지됐다. 24년째 보험료율은 9%를 유지 중이다. OECD 회원국 평균 18.3%의 절반 수준이다.
■용돈 연금 vs 노쇼 연금
국민연금과 관련해서는 본격적으로 노후를 준비해야 하는 5060 세대는 물론이고 첫 걸음을 뗀 2030 세대까지 전 연령대에서 불만이 높다. 5060 세대는 현재 용돈 수준으로 전락한 소득대체율을 높여야 생계에 실질적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60세 정년인데 63~65세인 연금 개시 시기까지 소득 공백 기간에 대한 문제 제기도 많다. 반면에 2030세대 사이에선 퇴직 후 연금을 받을 수 없을 것이라는 불만이 팽배하다. 수십 년 보험료를 내기만 하고 정작 자신이 받아야 하는 시기가 되면 기금이 고갈돼 국민연금은 떼이는 돈이라 생각한다. 가뜩이나 취업난 주택난 등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인데 기성 세대 연금까지 떠받쳐야 하느냐는 불만이다. 국민연금 논의가 자칫 세대 갈등의 도화선이 될 수도 있는 지점이다.
■더 내고 덜 받는 vs 더 내고 더 받는
민간자문위는 보고서에서 현재 연금 제도의 기본 틀은 그대로 두고 급여나 보험료율 등 주요 모수를 개혁하는 모수 개혁을 제안했다. 급여 수준을 그대로 두고 보험료율을 인상하는 방안과 소득대체율을 인상하고 그에 따라 보험료율도 인상하는 방안이다. 현행 9%인 보험료율을 2025년부터 매년 0.5%포인트씩 올려 2036년 15%까지 올리는 안 등이 알려지고 있다. 2033년부터 65세인 연금 수급 개시 연령을 67세로 늦추고 현행 59세인 의무 가입 연령도 상향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기초연금과 공무원·군인·사학 등 직역연금 개혁도 언급됐다. 민간자문위 공동위원장인 김연명 중앙대 교수는 “연금 수급 연령은 2033년 기준 65세인데 기대 연령이 증가함에 따라 이를 67세로 늦추고 현행 59세인 의무 가입 상한 연령도 더 늦춰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며 “연령 조정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안 그래도 심각한 노후 소득 공백과 연금의 신뢰도를 종합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자문위의 생각이다”고 말했다.
■프랑스 연금 개혁 전 세계가 주목
일본은 2004년 13.58%였던 보험료율을 장기간 조금씩 인상해 18.3%까지 올리고 연금액은 임금과 물가 상승을 반영하되 기대수명과 출산율에 연동하도록 해 지속가능성을 확보했다. 공무원연금과 국민연금 통합으로 형평성 불만도 잠재웠다. 일본의 개혁이 성공한 데는 장기간에 걸친 국민 공감대 형성과 고이즈미 총리의 결단이 주효했다는 평가다. 이런 가운데 프랑스 마크롱 정부가 연초부터 구체적 연금 개혁안을 내놓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개혁안의 골자는 보험료를 내는 기간을 늘리고 연금 수령 시기를 늦춰 기금 고갈을 막겠다는 것이다. 올 여름부터 법정 정년을 현 62세에서 2030년까지 64세 또는 65세로 높이는 것이다. 정년(60세)과 연금 수령 연령(65세)이 다른 한국과 달리 프랑스에선 정년을 채우자마자 연금을 받는다. 주요 노조 단체들이 파업으로 대응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아 연금 개혁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이 불가피해 보인다.
■노후보장·재정안정 두 토끼 잡을 수 있나
국회 특위는 다양한 논의와 각계 의견 수렴 후 최종안을 10월까지 국회에 제출한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다양한 이해 대립과 2024년 총선 일정을 감안하면 개혁 논의가 간단치 않을 전망이다. 우리 보험료율이 두자릿수인 다른 나라와 큰 차이를 보인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OECD도 우리의 보험료율이 지나치게 낮다고 본다. 결국 더 내야 한다는 데 무게가 실릴 수밖에 없다. 문제는 급격한 보험료율 인상 부담을 줄이기 위해 연금 수급 연령을 늦추고 가입 연령 역시 높이는 경우다. 더 오래 가입시키고, 더 늦게 연금을 수령하게 해야 기금 고갈 시점이 늦춰진다는 것인데 이럴 경우 정년 연장 논의가 불가피하다. 연금도, 소득도 없는 ‘공백’ 기간이 길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연금 개혁 논의가 본격화하면 자연스레 정년 연장 논의에 불이 붙을 것이란 관측이다. kyk93@busan.com
2023-01-11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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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이민 사회, 그 명과 암
유색인 프랑스 월드컵 대표팀 맹활약
2022카타르 월드컵 결승전. 아르헨티나의 우승으로 막을 내렸지만, 반전은 프랑스 킬리안 음바페(파리 생제르맹)의 발에서 시작했다. 끝난 게임이라고 생각한 순간, 음바페가 해트트릭으로 기적적인 반전을 이끌어 승부차기까지 끌고 갔기 때문이다. 까무잡잡한 피부의 음바페는 카메룬 출신 축구 코치였던 아버지와 알제리 출신 핸드볼 선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이민 2세다.
프랑스 대표팀은 후반 선수를 교체하면서 골키퍼를 빼고는 유색인 선수 10명이 그라운드를 누볐다. ‘무지개 군단’이었다. 프랑스 국가대표 선수 24명 중 18명이 유색인이다. 이 중 13명은 아프리카 이민 2세로 채워져 있다. 부상으로 못 뛴 카림 벤제마도 알제리계다. 선수들 대부분이 프랑스 식민 지배를 받았던 콩고민주공화국, 세네갈, 카메룬, 토고, 말리, 알제리 등 아프리카 출신이다. 경기 직후 월리엄 루토 케냐 대통령은 자신의 SNS에 “아프리카팀(프랑스 대표팀)은 훌륭한 경기를 펼쳤다”면서 아프리카 출신 대표팀 15명의 사진을 게재하기도 했다.
프랑스 인구 구성에서 백인이 80%, 아프리카계가 8% 정도인 점을 감안하면 유색인 선수 비율이 월등히 높다. 프랑스처럼 이민자 후손들과 조화를 이룬 국가의 팀들이 카타르 월드컵에서 눈에 띄었다. 축구의 본향 영국 대표팀과 벨기에 월드컵 대표팀도 아프리카계 이민자 2세 출신들이 맹활약을 펼치고 있다.
이민으로 피지컬 경쟁력 급상승
프랑스 축구는 이민자들로 인해 강해졌다. 국가 대표팀은 선수의 신체적인 한계가 일정해 경기 스타일을 급격하게 바꾸기가 어렵다. 하지만, 프랑스처럼 이민자 출신 선수들로 대표팀이 채워지면서 피지컬이 강해지고, 팀 운용에 폭발적인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이민자 계통 선수의 비율이 높아지는 것은 프랑스에 국한된 현상은 아니지만, 오랫동안 식민지를 운영한 프랑스는 그 역사가 깊다. 이것이 프랑스 대표팀 레 블뢰(파랑을 뜻하는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 애칭)에 영향을 끼쳤다.
1958년 레 블뢰가 스웨덴 월드컵에서 3위에 올랐을 때는 폴란드계 레이몽 코파는 최다 어시스트로 발롱도르를 수상했고, 모로코계 스트라이커 쥐스트 퐁텐은 한 대회 최다 13득점을 올리는 기록을 세웠다. 1984년 유럽선수권대회에서 프랑스는 이탈리아계 미셸 플라티니, 말리계 장 티가나, 스페인계 루이스 페르난데스 등을 앞세워 스페인을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했다.
1998년 프랑스 자국 월드컵에서 내전(1953년)을 피해 프랑스로 이민한 알제리계 지네딘 지단과 티에리 앙리, 릴리앙 튀랑 등 아프리카계 선수를 대거 앞세워 브라질을 3-0으로 꺾고 우승컵을 들었다. 2018러시아 월드컵에서도 카메룬계 사뮈엘 움티티, 음바페 등 15명의 이민자 가정 출신이 모여 월드컵 우승컵을 거머쥐면서 프랑스 대표팀은 ‘무지개 군단’이란 애칭을 얻었다.
이민, 인구 위기와 경제 침체 해결책
1985년 영국. 저출산과 고령화가 심각해지면서 65세 이상 인구 비중이 15%에 이를 정도로 늙어 갔다. 유럽에서 핀란드에 이어 두 번째로 늙은 나라였지만, 지금은 유럽에서 네 번째 젊은 나라로 탈바꿈했다. 과감한 이민 수용 정책이 주효했다. 분야별 전문성 등 요건을 갖춘 외국인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이민 정책으로 경제활동인구가 25%가량 더 늘어났기 때문이다. 저출산과 인구 감소가 심각하지 않은 유럽과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 국가의 공통점도 이민을 꾸준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순혈주의 울타리에 스스로를 가두고 있는 한국과 일본 등은 인구 감소의 위기에 허덕이고 있다. 대한민국 총인구는 2021년 5173만 8000명으로 1년 전보다 9만 1000명(-0.2%) 감소했다. 정부 수립 이후 처음이다. 2050년에는 노인 인구 비중이 40%대로 늘고 생산가능 인구는 절반으로 줄어든다고 예측했다. 심각한 국가 재난 사태를 맞게 된다. 근본 원인은 역대 최저 수치인 합계출산율 0.81명인 저출산 탓이다.
옥스퍼드대 데이비드 콜먼 교수는 “대한민국이 저출산으로 인한 인구소멸 1호 국가가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인구 소멸은 다름 아닌 국가의 소멸이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도 최근 트윗에서 “한국과 홍콩이 세계에서 가장 빠른 인구 붕괴를 겪고 있다”면서 “한국은 현재 출산율이 유지된다면 3세대 안에 인구가 현재의 6% 이하 수준으로 급감하고 대다수가 60대 이상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을 정도다.
다문화사회에 접어든 대한민국
한국도 프랑스 대표팀처럼 보다 강해지고, 지속적인 성장 동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출산 장려 등과 함께 외국인 이민을 대폭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이민을 인구 감소와 우수한 인력 확보 대안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지적은 끊이지 않았다. 한국과 비슷한 일본은 향후 50년 이내에 1000만 명의 이민을 받아들인다는 정책을 공식화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총인구 중 이민 배경 인구가 4.3%에 육박해 사실상 다문화 국가이다. 일부 지자체에선 15% 수준에 이르면서 사실상 다문화·다민족 국가다. 다문화 학생도 16만 명으로, 초등학생이 70%, 중학생 21%, 고등학생 9% 순(2022년 청소년 통계)이다. 우리나라 초·중·고교 전체 학생 수는 감소했지만, 다문화 학생 수는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경향을 보인다. 이민 온 외국인 배우자들과 자녀들이 인구 유지에 기여하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최근 10쌍 중 1쌍은 외국인과의 결혼이고, 농촌의 경우는 절반까지 이르기도 한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다민족, 다인종 사회로 접어들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문화적 정치적 포용 가능성은
만약 월드컵 한·일전 대표팀에 프랑스와 같은 이민자 위주로 선수가 채워진다면 국민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여전히 단일 민족 신화에 빠져, 단일 민족 팀을 구성하고 있는 한국과 일본에서 이를 정서적으로 수용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또한, 이슬람권 이민자 가정 출신 학생들이 소속된 학교의 단체급식에서 돼지고기를 두껍게 썰어 넣은 김치찌개나 부대찌개를 일률적으로 배식하지 못하는 기본적인 불편함부터 빈곤과 양극화 등 이민 선진국에서 벌어지는 각종 문제를 어떻게 대응할지는 미리부터 고민해야 할 과제다.
실제로 2018년 제주도의 예멘 난민 신청에서 보여 준 사회 혼란, 대구 이슬람 사원 건설 현장 ‘삶은 돼지머리 사건’ 등을 떠올리면 갈 길은 멀고 험하기만 하다. 무엇보다 단일 민족이라는 폐쇄적 대외관을 극복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하지만, 프랑스 레 블뢰처럼 우수한 이민자층을 수용할 경우 사회의 다양성과 전문성 확대, 국가 운용 능력 전반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국가나 사회, 조직이 우수한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다양한 배경을 갖춘 구성원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다양성이 능력을 이긴다’는 조직 원리 때문이다.
프랑스에서 오랫동안 연구 활동을 한 부경대 국제지역학부 안상욱 교수는 “프랑스 극우 정당 후보가 2022년 대선에서 결선 투표에 올라가는 등 반이민 감정이 고조되면서 언제까지 다인종에 대한 톨레랑스(관용)를 유지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면서 ”이민 사회의 장점과 함께 피로감과 불편함을 극복하고, 함께 살기 위한 다양한 방안을 이제부터라도 찾아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2022-12-28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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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질적 도약’ 앞에 선 한국 축구
카타르 월드컵이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다. 2022년은 한국 축구가 의미 있는 결실을 거둔 해로 기억될 것이다. 여기서의 ‘의미’는 12년 만의 16강 진출이라는 외형적 성적에 한정되지 않는다. 강호들을 상대로 ‘빌드업’의 가능성을 엿보았고, 이를 통해 어떤 팀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기본 틀을 구축했다는 무형의 성취 또한 소중하다. 한국 축구는 이전과는 다른 수준의 질적 도약 앞에 선 것이다. 이제 월드컵을 준비하고 치르면서 겪은 일들을 냉정히 돌아볼 때다. 잘한 것은 이어 가고 부족한 것은 보완해야 더 나은 미래가 있는 법이다.
조별리그 32개국 경기 살펴보니
한국의 이번 16강 진출은 그 어느 나라보다 드라마틱했다. 해외 유명 스포츠 매체들도 한국팀의 경쟁력을 높이 샀다. “엄청난 부담에도 열세를 극복하고 (포르투갈이라는) 유럽의 거인을 꺾었다.”(ESPN) 그래서 한국은 다음 월드컵에서 가장 ‘멀리’ 갈 팀 중 하나로 당당히 평가받는다. 어린 선수들의 부각, 해외 진출에 대한 기대감, 여기에 더해 더 많은 ‘보석’의 발굴까지 겹친다면 장래가 밝다는 전망이다.
이번 월드컵의 한국 플레이를 분석한 결과가 있다. 글로벌 축구 통계 업체 ‘옵타’와 국제축구연맹(FIFA) 매치 리포트를 근거로 조별리그 결과를 들여다본 수치다. 한국 축구의 약점이 현저히 개선되고 있지만 여전히 한계를 지니고 있음을 가감 없이 보여 준다.
한국은 상대 진영에서의 볼 탈취 부문에서 독일에 이어 잉글랜드와 함께 공동 2위를 기록했다. 전방 압박이 위협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42개 슈팅으로 4골을 만들었으니 슈팅 수 대비 성공률은 9.5%로 낮았다. 패스 성공률은 81.5%(15위)로 나쁘지 않았으나 여전히 롱패스 비율이 14.9%(9위)에 달할 정도로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페널티 구역 안으로 공을 배달하는 크로스의 의존도도 78%(4위)로 아주 높았으나 이에 비해 성공률은 30.5%(7위)에 그쳤다.
반면, 상대가 볼을 갖고 공격할 때 10차례 이상 패스를 허용하면서 페널티 구역 안으로 패스 또는 슈팅까지 내준 경우는 9회로 공동 6위였다. 상대 공격을 끊는 수비에 취약했다는 의미다. 16강 진출이라는 성적 속에서도 공수에서의 이런 취약점들은 보완해야 할 부분이 아닐 수 없다. 한편, 게임당 실책은 32개국 중 가장 적은 53.7개로 고무적인 기록을 보였다.
한국 축구 가능성 높인 벤투호
파울루 벤투 감독이 일군 가장 큰 성과는 한국 축구의 체질을 바꿨다는 데 있다. 강호들을 만나면 움츠러들어 수비하기에 바빴고 공격 땐 ‘뻥 축구’에 의존했던 한국은 이제 어떤 상대를 만나든 밀리지 않고 준비했던 플레이를 구사할 줄 알게 됐다. 벤투가 한국 축구의 장단점을 면밀히 파악하고 우리만의 색깔을 입히는 데 정성을 다한 결과다. 이는 세밀한 패스를 기반으로 한 후방 빌드업, 빠른 움직임을 통한 전방위 압박으로 요약된다. 변화가 하루아침에 이뤄질 리 없고 당장의 성과가 없으면 비판과 질책에 시달려야 하는 감독 입장에서는 이런 일관적인 담금질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성과는 이번 월드컵 본선에서 입증됐다. 빌드업을 통한 능동적, 공격적 플레이는 축구 강호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았다. 후방부터 파이널 서드(상대 골문에서 40m 공간)까지 세밀한 직조를 통해 경기를 주도하는 현대적인 축구로 한 단계 발전한 것이다.
지도자로서 벤투 감독의 역할도 긍정적 평가가 가능하다. 벤투는 무엇보다 선수 보호에 최선을 다했다. 선수 부상이나 컨디션 관리에 집중했고, 언론에 비판받는 선수들은 기자회견을 자청해 감쌌다. 경기에 패했을 때도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면서 선수 탓을 하지 않았다. 용병술은 일부 비판을 듣기도 했지만 편견 없이 선수들을 발굴하고 기용했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벤투호는 월드컵을 위해 4년 세월을 한 감독에게 맡긴 한국축구사 최초의 결실로 기록될 만하다.
K리그 활성화와 함께 가야
지금은 한국 축구의 새로운 중흥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는 시점이지만 한국 프로축구 K리그의 활성화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K리그는 말 그대로 한국 축구의 뿌리다. 내년이면 개막 40주년을 맞는 K리그는 아시아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 최다 우승 타이틀을 거머쥔 맹주다. 이번 월드컵에서도 한국의 5득점 중 4골을 ‘K리거’가 넣었다.
아쉽게도 K리그의 인기는 일본과 비교하면 한참 떨어진다. 일본 J리그의 평균 관중은 우리의 4배 수준이다. 무엇보다 일본 정부의 과감한 투자가 부럽다. 일본은 독일에 거점센터를 만들어 해외파 배출과 효율적인 관리에 진력한다. 이번 월드컵에서 일본 최종 엔트리 26명 중 19명이 유럽파였다. 일본축구협회가 유럽의 큰물에서 놀 수 있도록 통 큰 지원을 한다는 얘기다. 물론 유럽파가 능사는 아니겠지만 한층 강한 상대들과 부딪쳐 경쟁하고 국제적 흐름을 파악해야 성장할 수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일본은 ‘2050년 축구 선수 1000만 명 확보 및 월드컵 우승’이라는 원대한 프로젝트를 세웠다. 우리도 장기적 안목에서 한국 축구의 새로운 중흥을 위한 마스터플랜을 짜야 한다. K리그에 대한 관심에 더해서 인프라와 유소년에 대한 과감한 투자가 여기에 포함된다.
긴 호흡으로 풀어 갈 숙제들
월드컵에서 한 번 효과를 거두는 것과 이를 유지하면서 더 높은 차원으로 끌고 가는 것은 다른 문제다. 벤투가 강조한 빌드업은 소기의 성과를 거뒀지만 이번 월드컵에서 득점으로 이어지는 결과는 없었다. 점유율에 기반한 축구 철학에 대해 객관적인 평가의 시간을 충분히 가질 필요가 있다. 전문가들도 대체로 “벤투의 유산을 최대한 살리되 압박과 역습, 스피드 등의 한국 특유의 강점을 접목해 나가는 일이 중요하다”는 목소리다.
벤투호의 완주는 축구협회의 믿음과 지원으로 가능했다고 본다. 그동안 월드컵마다 반복되던 감독 교체의 악순환에서 벗어났고 여러 차례의 위기와 비난 앞에서도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4년간의 동행에 성공했다는 자체가 기념비적이다. 그러나 더 높은 도약을 위해, 도약의 동력을 얻기 위해 해결해야 할 숙제도 적지 않다.
벤투 감독이 지난 7일 대표팀을 떠나면서 이런 말을 했다. “그라운드 안에서 일어나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라운드 밖에서의 준비나 지원도 중요하다.” 지난달 10일 카타르를 떠나기 전 기자회견의 발언은 한층 직설적이었다. “(한국에서) 선수 휴식은 필요 없고 중요한 건 돈, 스폰서 이런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요지인즉슨, 선수들의 혹사에 대한 우려였다.
이는 막판에 불거진 ‘2701호 사태’와도 무관치 않다. 그것은 개인 트레이너들과 대표팀 정식 의무팀과의 갈등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2701호의 깊은 속사정을 알 길은 없지만 학연과 지연, 혈연처럼 연줄이 작동하는 시스템은 더 이상 바람직하지 않다. 축구협회의 참된 역할은 이런저런 쓴소리와 공정성 시비 등을 해소하는 데 있다. 이런 노력들이 모이고 모여 한국 축구의 미래가 '빌드업'된다.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
2022-12-14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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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금융투자소득세 시행 유예?
국내의 주식 투자 인구는 대략 1300만~140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주식과 관련한 금융상품 투자는 연령과 계층을 가리지 않는 전 국민의 가장 보편적인 재테크 수단이 됐다. 특히 저금리 시기를 거치는 동안 대출까지 받아 주식 관련 상품에 투자하는 열풍도 일었다. 주식 투자가 국민적인 재테크 수단이 되면서 투자자들은 이와 관련한 정부 정책에 대해 예전보다 훨씬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적극적인 목소리를 낸다.
최근 정부·여당과 야당 간에 치열한 공방이 벌어지고 있는 금융투자소득세(금투세)가 대표적이다. 주식, 펀드 등 금융투자 상품의 소득에 세금을 부과하는 금투세의 내년 시행 여부를 놓고 정부와 여당 그리고 이에 맞선 야당은 새해가 한 달밖에 남지 않은 지금까지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다. 업계와 투자자들은 불안감 속에 이 문제가 어떻게 진행될지 술렁이고 있다.
■2년 전 여야, 2023년부터 시행 합의
금융상품 투자자들 사이에 초미의 관심사가 된 금투세는 기본적으로 주식 등 투자로 돈을 벌었을 경우 여기에 부과하는 세금이다. 구체적으로는 대주주 여부와는 별개로 주식, 펀드, 채권 등에 투자해 연간 5000만 원 이상을 벌었을 경우 여기에 22~27.5%(지방세 포함)의 세율을 적용해 세금을 원천징수 하는 것이다.
현재 주식 관련 세금으로는 코스피나 코스닥에서 주식을 매매할 때 각각 0.23%의 세율로 내는 통칭 증권거래세가 있다. 이는 이익·손실 여부와 관계없이 모든 투자자에게 부과된다. 또 주식 거래를 통한 양도소득세도 있는데, 이는 특정한 주식 종목을 10억 원 이상 혹은 일정 규모 이상의 지분(코스피 1%, 코스닥 2%, 코넥스 4%)을 소유하고 있을 때 해당된다. 따라서 보통 투자자라면 주로 증권거래세가 적용된다.
하지만 증권거래세는 소득 발생에 따른 부과가 아니라 거래 성사에 따른 부과로 후진적인 과세 방식이라고 지적받아 왔다. 게다가 ‘소득이 있는 곳에 세금이 있다’는 원칙과도 맞지 않았다. 이에 따라 2018년 12월 문재인 정부 당시 출범한 자본시장 활성화 특위를 통해 금투세 부과가 본격적으로 논의됐다. 그 결과, 2020년 12월 여야 합의로 세법 개정을 통해 2년간의 유예 기간을 거친 뒤 2023년 1월 1일부터 시행하기로 확정됐다.
■정치 상황 격변, 다시 오리무중
예정대로라면 내년부터 시행될 금투세가 삐걱거리기 시작한 것은 올해 5월부터다. 윤석열 대통령이 금투세 폐지를 언급하면서 다시 논의가 시작됐다. 저금리에서 고금리로 금융정책 기조가 바뀌면서 주식시장이 큰 폭으로 하락하기 시작한 데다, 경기 침체로 분위기마저 좋지 않은 상황에서 출범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새 정부가 금투세를 강행하기가 부담스러워진 것이다.
새 정부는 이 같은 기조를 반영해 금투세 도입을 2년간 재연기하는 내용의 세법 개정안을 올해 국회에 제출했다. 공은 야당인 더불어민주당 쪽으로 넘어간 형국이다. 그런데 이를 둘러싼 민주당 내 분위기는 다소 어수선하다.
본래 금투세 시행은 민주당의 당론이었다. 애초 민주당 정권에서 합의된 내용이고, 이제 와서 또 시행을 연기한다는 것은 현 정부의 ‘부자 감세’에 동조하는 꼴이라는 것이다. 일부에서 제기하는 ‘금투세=세금 폭탄’이라는 지적에 대해서도 전체 투자자의 1% 규모인 15만~20만 명 정도가 과세 대상에 해당할 뿐이라는 민주당 유동수 의원 등의 분석 자료를 제시하며 일반 투자자들의 세 부담은 사실상 없다고 반박해 왔다.
이런 민주당의 기류에 이상 조짐이 나타난 것은 지난달 중순 이재명 대표가 비공개 최고위원회의 석상에서 금투세 유예를 시사하는 듯한 발언을 한 사실이 알려지면서부터다. 이 대표가 “현재 주식시장 상황을 고려할 때 금투세 강행을 고집해야 하느냐”는 취지로 언급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민주당 내에서 이 대표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오면서 금융정책인 금투세는 어느새 정치 문제로 비화했다.
당내 의견이 분분해지자, 민주당은 정부가 제출한 금투세 관련 세법 개정안에 일정 조건을 덧붙여 2년간 재유예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증권거래세를 0.15%로 더 낮추고(정부안은 0.20%), 주식 양도소득세의 부과 조건인 대주주 기준의 상향(가족 합산 10억 원어치 보유→ 개인 100억 원어치 보유) 방침을 백지화하는 게 그 조건이다. 하지만 정부는 민주당의 이 절충안을 거부했다.
■여야 공방에 투자자들만 혼란
2023년 새해가 코앞으로 다가왔지만, 현재로선 뚜렷한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다. 금투세를 둘러싼 지지와 폐지 주장에는 각각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지지하는 측은 현재 주식·채권·펀드 등 상품 유형별로 설계된 복잡하고 형평성에 맞지 않는 과세 체계를 금투세를 통해 정리할 수 있다고 한다. 또 총 금융투자에서 손실이 발생해도 과세하는 문제도 개선할 수 있다. 반면 폐지를 주장하는 측은 부과 대상이 개인 투자자로, 오히려 외국인 등 특정 세력은 제외되고 또 이른바 ‘큰손들’이 한국 주식시장을 떠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적은 세율 차이에도 민감하고 국내 주식시장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큰손들이 빠지면 한동안 더 침체를 겪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여론도 엇갈린다. 한국주식투자자연합회가 지난달 18일 밝힌 리얼미터 조사 결과를 보면 금투세 도입에 부정적인 응답 비중이 57.1%로, 내년 시행 의견(34.0%)보다 많았다. 그러나 일주일 뒤인 25일 발표된 갤럽의 정례 여론조사에서는 43%가 ‘내년 1월 시행’을 찬성했다. ‘가급적 늦춰야 한다’는 의견은 41%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금투세 문제는 정부·국민의힘과 민주당 간 대립에다 민주당 내 논란까지 얽히면서 해결이 쉽지 않은 상태다. 게다가 금투세 등 내년 세제개편안을 처리해야 하는 국회 조세소위원회는 지난달 24일부터 가동 중단 상태다. 이 때문에 국회 세제개편안의 법정 시한(12월 2일) 준수는 현재로선 물 건너간 분위기다.
전문가들은 증시 상황에 따른 금투세 유예 논란은 접근 방식이 적절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모든 소득에 과세한다는 원칙을 감안한다면 계속 뒤로 미루기보다는 낮은 세율로 일단 시작한 뒤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절충점을 찾는 게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하지만 금투세 논란은 이미 정치 쟁점으로 비화한 상황이다. 결국 여야 정치권이 타협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는 형편인데, 현재 얼어붙은 정국을 감안하면 여야의 견해 차이가 쉽사리 해소될 것 같지도 않다.
새해는 벌써 저만치 다가와 있는데, 투자자들 사이에는 새로운 세금이 시행되는지, 아니면 유예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어 혼란과 불안감만 감돈다. 어떤 식으로든 정부와 정치권이 결론을 내줘야 한다. 그래야 속이 타들어 가는 투자자들이 예측가능한 연말연시를 보낼 수 있을 것이다.
2022-11-30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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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수도권 과밀화의 폐해
이달 9일 정부는 코로나19 확진자가 또다시 급증세를 보이자 7차 유행이 본격화했다고 공식 선언했다. 지난 14일 두 달 만에 7만 명을 넘어선 하루 신규 확진자 가운데 서울과 인천·경기 등 수도권 비중이 55.6%나 된다. 지난달 29일 발생한 서울 용산구 이태원 참사 희생자가 16일까지 158명(부상 196명)으로 늘어나 추모 분위기가 지속되고 있다. 12일 수도권에는 3시간가량 내린 50mm의 비에 쓸린 낙엽 더미가 배수구를 막는 바람에 침수된 곳이 속출했다. 수도권의 기록적인 폭우로 수십 명의 사상자와 막대한 재산 손실을 초래한 물난리를 겪었던 지난여름의 악몽이 되살아난 순간이었다.
■뭉치면 죽고 흩어져야 산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라는 명언이 있다. 1945년 10월 17일 임시정부 환국 환영회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이 해방 후 좌우익으로 분열된 국민의 대동단결을 호소하며 강조한 말이다. 앞서 1754년 미국 건국의 아버지이자 계몽주의 사상가인 벤저민 프랭클린이 같은 말을 남겨 미국이 자유를 얻기 위해 영국과 싸운 독립전쟁에 큰 힘이 됐다. 2600년 전에는 그리스 우화작가 이솝이 “뭉치면 서고 흩어지면 넘어진다”고 말했다. 고대부터 서양인들 사이에 강했던 개인주의 성향을 비판한 것일 테다.
지금은 반대로 “뭉치면 죽고 흩어져야 산다”는 말이 세간에 회자한다. 3년에 걸친 코로나 팬데믹 탓에 분산의 중요성을 절감해서다. 사회적 거리 두기가 바로 그것이다. 겨울철 코로나 대유행이 우려되는 만큼 방역을 위해 사람이 많이 몰리는 장소를 삼갈 당위성은 여전하다. 올해 수도권에서 빚어진 안타까운 대형 재해와 재난 역시 과밀화에 대한 경계의 필요성을 대변한다. 선진국 대한민국의 부를 상징하는 서울 강남에서 8월 8일 대규모 침수 피해와 교통대란이 일어나고, 대통령실이 위치한 데다 외국인이 즐겨 찾는 용산에서 핼러윈 압사 참사가 생긴 건 과도한 인구 집중이 근본적인 원인으로 분석된다. 재난과 안전사고에 취약한 수도권 과밀화 해소와 인파 관리를 위해 철저한 대책 마련이 절실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수도권 과밀화의 심각성
2020년 초 국토 면적의 11.8%에 불과한 수도권에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 수도권 인구는 2596만 명으로 비수도권 2582만 명을 앞질렀다. 지지난해 수도권의 인구 증가율은 1970년 대비 184.4%에 달했으나 비수도권은 11.7%에 머물렀다.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에 인구가 지나치게 집중되면서 과밀화가 심해진 까닭이다. 현재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인구 차이는 14만 명 정도지만, 50년 뒤 200만 명대까지 벌어질 것으로 통계청은 전망한다. 인구와 함께 자본과 기술을 가진 기업들도 수도권으로 쏠리면서 수도권 일극체제가 공고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수도권은 국내 모든 걸 빨아들이는 힘이 엄청나 진공청소기나 블랙홀에 비유되곤 한다. 반면 비수도권은 진학이나 취업, 창업을 위해 수도권으로 떠나는 젊은 층의 유출과 인구 급감으로 황폐화가 불가피하다. 기형적으로 비대해진 수도권과 지방 간 양극화의 심화는 국가경쟁력을 떨어트린다는 점에서 여간 심각한 폐단이 아니다.
수도권의 경우 끊임없이 유입되는 인구와 기업의 수요를 급히 해결하기 위해 난개발에 나서면서 도시 인프라와 편의·방재 시설을 제때,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다. 이상 기후로 증가세를 보이는 예측하기 힘든 자연재해에 대처하기 어렵고 각종 사고에도 취약할 수밖에 없는 구조인 셈이다. 올여름 거대한 물바다를 이룬 서울 강남 일대가 대표적이다. 한강변 저지대에 개발돼 상습 침수지로 꼽히지만, 거대 예산이 소요되는 빗물 저장 터널이 부족해 폭우나 홍수 피해를 크게 입는 사례가 잦다. 서울에 즐비한 반지하 주택도 그렇다. 서울 지하철과 서울~수도권 광역버스의 혼잡은 늘 불안하다. 코로나 사태에서도 초과밀화한 서울의 문제점이 여실히 드러났다. 의료 인프라와 방역 시스템이 어느 지역보다 우수하고 잘 갖춰졌는데도 서울 확진자 비중이 압도적이며 전국 확산과 재유행의 사다리가 되고 있는 실정이다.
■실효성 없는 지역균형발전
정부가 수도권 집중에 따른 부작용을 해소하는 데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82년 수도권정비계획법이 제정돼 수도권 기업에 대한 규제가 강화됐다. 정부는 수도권 기업에 부담금을 부과하거나 신·증설을 억제하는 규제를 통해 기업의 지방 이전을 유도했다. 하지만 2008년 글로벌 경제 위기 극복을 이유로 수도권 입주 조건 등 기업 규제를 완화했다. 이 바람에 수도권 기업의 지방행은 급감했으며 신규 기업 또한 수도권에 둥지를 틀기 일쑤다. 사람과 기업의 수도권 유입 방지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게다. 그런데도 수도권에서는 지역 발전을 내세워 주택 보급 확대와 추가적인 규제 완화를 촉구하고 있어 과밀화를 부채질한다.
전임 문재인 정부와 현 윤석열 정부의 지역균형발전 정책도 생색내기에 그치며 겉돌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가균형발전위원회는 대통령 자문기구에 그쳐 중앙 관료들에게 팽배한 수도권 중심주의조차 극복하지 못하는 모양새다. 각 부처의 정책을 통할하고 조율해 균형발전을 실효성 있게 강력히 밀어붙일 수 있는 추진력이 없는 것이다. 지난 11일 한덕수 국무총리가 곧 출범을 예고한 지방시대위원회도 힘 있는 정부부처가 아닌 자문기구여서 가시적인 성과를 내는 역할을 기대하기 어렵다. 이러니 현 정부가 내놓은 반도체산업 육성계획도 지방을 배려하지 않아 수도권 집중만 가속화할 거란 비난을 받는다. 이런 가운데 지방소멸 위기론이 불거진 지 오래다. 이제 비수도권의 상당수 농어촌과 소도시가 인구 감소에 따라 소멸 위험에 처했다는 뉴스는 식상할 지경이다. 급기야 14일 명색이 제2 도시인 부산의 중·동·서·영도구 등 원도심까지 소멸할 위기에 직면했다는 통계청 자료가 나와 지역민들에게 좌절감을 안겼다.
■지방분권 확립만이 해결책
수도권이 더욱 과밀화하면 그 부작용으로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지불해야 되고, 결국 국가적 재앙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2018년 서울 KT 아현지사 화재와 지난달 15일 경기도 성남시 SK C&C 판교데이터센터 화재가 그런 경우다. 두 사고로 각각 발생한 통신대란과 카카오 서비스 장기간 중단은 온 국민의 불편과 경제적 피해를 야기한 국가적 마비 사태다. 수도권과 중앙집중식 시스템을 탈피해 시설의 분산이 요구된다는 사실을 잘 보여 준다. 탈중앙화와 분산은 디지털 플랫폼과 데이터에 기반한 초연결 사회로 접어든 웹3.0 시대의 중요 덕목이기도 하다.
따라서 정부와 정치권은 비수도권에서 고조되고 있는 지방분권 개헌의 목소리를 경청해야 마땅하다. 헌법 조항에 지방분권을 명시해 지방자치와 균형발전 촉진을 위한 법적 강제력을 부여하자는 주장이다. 이를 실행에 옮겨 지방정부에 힘을 실어 주고 자치분권을 확립해야만 수도권 일극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을 수 있다. 올해 비극적인 사건사고로 얼룩진 수도권의 과밀화에 따른 폐단에서 교훈을 얻어 과밀화를 완화·해소하며 수도권·비수도권의 공멸을 막는 일이 시급하다.
2022-11-16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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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지도자의 무지와 그 죄
옛적에는 무당이 어떤 방식으로든 아픈 사람을 치료해 주는 역할도 했다. 하지만 의료 지식은커녕 굿 하나도 제대로 못하는 위인이라 엉뚱한 조치로 목숨을 잃게 하는 경우도 많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했다. 제 구실도 못하면서 스스로 재주가 많다고 착각해 큰일을 벌이다 낭패를 보는 사람을 경계하는 말이다.
■당백전의 계책
조선 말기 나라 살림은 몹시도 궁핍했다. 왕실의 위엄을 되찾고자 했던 흥선대원군과 고종의 고민이 컸다. 특히 무너진 경복궁을 중건하는 일이 화급한데 돈이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나온 게 그 유명한 당백전(當百錢)이었다. 고종 3년(1866년) 12월부터 2년 가까이 사용됐는데, 동전의 겉에는 ‘호대당백’(戶大當百) 네 글자를 새겼다. ‘호조에서 만든 일반 동전의 100배에 해당하는 큰돈’이라는 의미다. 하지만 말이 100배이지 구리 함량 등 실제 가치는 6배 정도에 불과했다. 한마디로 악화(惡貨)였다.
당백전 아이디어는 당시 좌의정 김병학이 냈다. 그는 당백전이 국가 재정을 늘리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며 고종에게 진달했다. 반대가 없었던 건 아니다. 판중추부사 조두순 같은 이는 당백전이 노력은 적게 들면서 이득은 매우 크기 때문에 악용 등 폐해가 우려된다며 임금의 재고를 요청했다. 하지만 우의정 유후조를 비롯해 정부의 주류들은 “경제가 궁핍한 형편에 훌륭한 계책”이라며 시행을 밀어붙였다.
이후의 일은 익히 아는 바다. 화폐 가치가 날이 갈수록 떨어지고 물가는 폭등했다. 민생은 파탄에 이르고 경제는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망가졌다. 결국 조선을 극복하고자 세운 대한제국이건만 나라 지킬 무기 하나 제대로 마련할 재정이 안 돼 마침내 국권을 잃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됐다.
■레고랜드발 공포
레고랜드 사태가 나라를 흔들고 있다. 전후 과정을 간추리면 이렇다.
강원도 레고랜드의 중도개발공사(GJC)가 테파마크 조성 계획을 세운 뒤 자금 조달을 위해 2050억 원의 어음을 발행했다. 2020년의 일이다. 이 어음에 대해 강원도가 보증을 섰고, BNK투자증권의 주관으로 증권사 등에 팔렸다. 해당 어음의 만기일은 올해 9월 29일. GJC는 이를 상환할 능력이 없었다. 그래도 어음을 샀던 증권사 등은 믿는 구석이 있었다. 강원도의 보증이었다. 그런데 날벼락이 떨어졌다. 김진태 강원도지사가 “법원에 GJC의 회생신청을 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회생신청은, 간단히 말해, 회사를 처분해 그 돈으로 빚을 갚겠다는 의미다. 어음을 산 증권사들은 깜짝 놀랐다. 강원도가 빚을 떠안을 생각이 없음을 공식적으로 밝힌 것으로 받아들였다. 설사 회생절차에 따라 CJC를 처분한다 해도 하세월이요, 제값에 팔릴지도 의문이었다. 투자자에겐 말 그대로 공포였다.
여파는 CJC 어음에서 그치지 않았다. 김 지사의 발언은 국가나 지자체가 보증 선 채권 등 금융상품은 안전하다는 기존 인식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공포는 국내 금융시장 전반으로 퍼져나갔다. 회사채 시장이 얼어붙었고 기업들은 자금조달 길이 막혔다. 한국전력, 한국도로공사 같은 우량 공기업들의 회사채도 팔리지 않았다. 한 조사에 따르면 지난달 국내 채권 거래금액이 전달보다 100조 원 가까이 줄어들었다. 채권 금리도 폭등해 2009년 금융위기 이후 최고를 찍었다. 대규모 건설·부동산 사업을 위한 프로젝트파이낸싱(PF) 시장도 꽉 막혔다. 지역 중소 건설사와 증권사의 부도설이 파다하게 퍼졌다.
■“좀 미안하다”
놀란 정부가 비상거시경제금융회의까지 열어 진화에 나섰다. 50조 원이 넘는 유동성 공급 계획을 발표했다. 하지만 투자자들의 불안은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다. 시장에서는 또 다른 채무불이행 사태가 촉발될 위험이 있다며 ‘제2의 레고랜드’가 어디가 될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 사태가 금융시장만이 아니라 실물경제까지 흔들 수 있는 상황이라며, 정부의 조치가 너무 늦었다는 비관적인 목소리가 나온다.
이처럼 경제에 엄청난 혼란을 초래한 김 지사이건만, 그는 “채무불이행을 선언한 적이 없다”며 억울하다는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강원도는 보증 채무를 반드시 이행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하지만 시장은 김 지사의 말을 신뢰하지 못하고 패닉 상태에 빠졌다.
이에 대해 김 지사는 지금껏 제대로 된 사과를 하지 않았다. “본의 아니게, 불필요한 혼란과 오해를 초래하게 해서 매우 유감”이라거나, “좀 미안하다. 어찌 됐든 전혀 본의가 아닌데도, 이런 식으로 흘러오니까”라고 언급한 게 전부다. 하지만 김 지사의 ‘회생신청 발표’가 쓰지 않아도 될 어마어마한 나랏돈을 쓰게 만들고 국가 경제를 혼돈에 빠뜨린 건 분명한 사실이다. 자신의 말 한마디가 이런 결과를 일으킬 줄은 몰랐을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현재 위기의 책임에서 김 지사가 자유로울 수는 없다.
■영국의 수모
비슷한 사례가 영국에서도 있었다. 올 9월 초 총리에 취임한 리즈 트러스가 상위 1% 고소득자의 소득세율 45%를 철폐하는 등 450억 파운드(약 73조 원) 규모의 감세안을 발표했다. 이는 1972년 예산안 이후 가장 큰 규모의 감세였다. ‘제2의 마거릿 대처’를 꿈꿨던 성장우선주의자 트러스는 평소 “낮은 세금, 높은 성장”을 추구했다. 하지만 시기가 좋지 않았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영국은 현재 물가와 금리가 폭등하고 중앙정부의 채무도 감당하기 힘든 수준이다. 이런 판에 세금을 줄이면 정부는 빚을 내 나라 곳간을 채울 수밖에 없다. 이미 영국 중앙은행인 영란은행이 물가를 잡기 위해 국채 매각을 예고한 상태였는데 또다시 국채를 대규모로 발행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영국 국채가 시장에 대규모로 풀릴 것이라는 전망에 채권값은 급락했고, 이 때문에 자금난에 봉착한 영국 연기금은 해외 금융자산을 대거 팔았다. 충격에 세계 금융시장이 요동쳤다. 영란은행이 다급하게 국채 매각 계획을 유보하는 등 진화에 나섰으나, 이미 파운드화 가치는 폭락했고 영국 연기금은 무려 1500억 파운드(약 244조 원)의 손해를 입은 뒤였다. 국가 경제를 위기로 몰아 넣은 감세안은 결국 철회됐다. 트러스는 지난달 25일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알아야 면장
평소 “너 자신을 알라”고 외친 소크라테스에게 어떤 이가 “그러는 당신은 자신을 잘 아느냐”고 물었다. 소크라테스는 말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모른다는 걸 나는 안다.” 비슷한 가르침은 〈논어〉에도 있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진정으로 아는 것이다.” 불가(佛家)에선 “모르는 줄 아는 아는 것이 곧 견성”이라고 가르친다. 모르면서 마치 아는 것처럼 나서지 말라는 이야기다.
깊은 지식도, 정확한 판단력도, 주변에 지혜를 구할 분별력조차 없으면서 무턱대고 내뱉는 말의 후과는 클 수밖에 없다. 특히 그것이 대단한 권력을 가진 지도자의 문제라면 피해는 특정 개인에 한정되지 않는다. 심하면 나라를 말아먹을 수도 있다. 그래서 지도자의 무지는 그 자체로 죄악이다. 모름지기 알아야 면장을 한다고 했다.
2022-11-02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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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영어상용도시’ 논란
박형준 부산시장의 대표 공약으로 부산시가 추진 중인 영어상용도시 정책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전국 100여 개 단체로 꾸려진 부산영어상용반대 국민연합은 강력한 반대 입장을 천명하고, 영어상용도시 백지화 시민대회를 잇따라 열고 있다. 부산시는 부산시교육청과 인프라 구축을 위한 협약을 맺고 밀어붙였지만 부산시의회에서 제동이 걸린 상태다. 국내 지자체에서 영어상용화 추진이 부산이 처음은 아니지만 성공사례는 아직 없다.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부산시가 영어상용도시를 추진할 때 고려해야 할 부분에 대해 체크해 보았다.
■ 영어, 대한민국 공용어로
상용화(常用化)란 무엇인가. 국립국어원에 따르면 상용화(常用化)란 일상적으로 쓰게 하는 것이다. ‘영어 상용화’가 낯설다 보니 공용화(共用化)나 공용어(公用語) 정책과도 혼동하기 십상이다. 공용화는 함께 쓰게 하는 것이고, 공용어는 한 나라 안에서 공식적으로 쓰는 언어를 의미한다. 재밌는 사실은 미국에서 영어는 공용어가 아니라는 점이다. 미국에서도 1907년부터 영어를 공용어로 지정하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하지만 미국 연방정부는 지금까지 영어를 공용어로 법제화한 적이 없다. 미국이 다양한 언어를 배경으로 한 이민자들의 국가인 만큼,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했을 때 차별과 혐오가 발생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대한민국에서 영어 공용어화에 대한 논의는 몇 차례나 있었다. 보수 성향 소설가 복거일이 최초였다. 1998년 복거일은 “세계화를 위해서 민족의 언어를 버려야 한다. 한국어 대신 영어를 대한민국의 공용어로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01년에는 민주당이 제주국제자유도시 계획을 발표하면서 영어를 제주도의 제2공용어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국립국어연구원과 한글학회 등이 반대하자 흐지부지됐다. 부산에서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게 만드는 계획이 발표된 일도 있었다. 2005년 교육인적자원부가 주최한 공청회에서 인천, 부산·경남 진해, 전남 광양 3개 경제 특구와 제주국제자유도시가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방안이 나왔다. 갈수록 부산과 경쟁 관계로 부딪히는 인천의 유정복 시장이 현재 ‘영어생활도시’ 정책을 밀어붙이고 있는 점도 흥미로운 대목이다.
■ 박형준 시장, 영어에 ‘진심’
“영어상용도시는 2030부산세계박람회를 계기로 토대가 만들어질 ‘글로벌 허브 도시 부산’으로 가는 첫걸음이다. 해외 사업가와 관광객이 활동하는 데 불편함이 없는 환경을 선제적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 영어상용도시 정책을 통해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영어를 사용하는 도시, 외국인과 외국 기업이 몰려드는 도시, 외국인이 사는 데 편리한 도시를 만들겠다.” 박형준 시장이 지난 8월 제2차 부산미래혁신회의에서 밝힌 내용이다.
박 시장은 영어에 진심인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12월에는 영어 ‘열공’에 빠진 박 시장이 부산 일부 지역에 대해 ‘영어 제2 공용어’ 지정을 구상하고 있다는 보도(부산일보 2021년 12월 15일 자)도 나왔다. 박 시장의 유별난 영어 사랑을 이명박 정부 청와대 정무수석을 지낸 경력과 연관시키는 해석도 있다. 당시 MB정부 이경숙 인수위원장은 “미국에서는 ‘오륀지’라고 해야 알아듣는다”라며 영어몰입교육을 강조하다 후폭풍에 시달렸다.
부산시민들도 부산시의 영어상용도시 정책에 대해 반대가 많다. 한글문화연대가 시민 500명을 대상으로 시민인식 조사를 진행한 결과 40.9%가 반대, 27.6%가 찬성했다. 각계의 반대가 잇따르자 부산시는 추진 속도를 늦추는 분위기다. 한 언론사의 관련 보도에 대한 부산시의 해명자료에서 “공용화가 아니라 영어를 쓸 수 있는 환경을 넓히는 방향이다”라는 설명은 곤혹스러움이 묻어 있다. ‘공문서 영어 병기’도 시청 내 해외 관련 부서의 공문서 중 번역이 필요한 문서에 한정했다. ‘공공시설물 영문 표기’도 확대의 의미지, 영어로만 표지판을 만들겠다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 그 많던 영어마을, 지금은
서울시는 이명박 서울시장 시절이던 2003년부터 ‘영어 상용화 사업’을 펼쳤다. 공문서를 영문으로 만들고, 직원들의 영어실력을 길러 간부회의를 영어로 진행하겠다고 했지만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 같은 실패를 교훈 삼아 MB정부 때 영어몰입교육은 벌이지 말았어야 했다. 지난 8월 부산시가 부산시교육청과 맺은 협약서에는 권역별 영어교육센터와 거점학습 공간, 부산형 영어교육프로그램 개발, 영어방송 전문화 등을 추진한다는 계획이 나온다.
골자는 영어마을 사업의 확대다. 영어마을은 2004년 경기도 안산에서 시작해 전국 지자체에 유행처럼 퍼졌다. 하지만 상당수 영어마을이 애물단지로 전락하면서 세금만 낭비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안산, 하남, 대전의 영어마을은 평생교육원으로 바뀌었다. 파주영어마을은 한류트레이닝센터, 양평영어마을은 소프트웨어교육을 하는 체인지업캠퍼스로 활용되고 있다. 부산시가 지원하고 시교육청이 운영하는 영어마을인 글로벌빌리지를 다른 곳에 추가 설치하는 것에 대해서는 부산시민의 58.9%가 반대하고 있다. 부산글로벌빌리지가 학생과 시민의 실질적인 영어교육 활성화에 크게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 한글 간판 vs 영어 간판
부산은 영어상용도시가 아니어도 이미 영어를 너무 사랑하는 도시다. 센텀시티, 마린시티, 에코델타시티, 그린시티 등 지역 이름마다 영어 이름을 붙이고 있다. 꼭 영어를 써야 글로벌이 되는 것일까(영어 잘하는 필리핀은 왜 선진국이 못됐을까). 방탄소년단은 한국어로 노래를 불러도 세계인들이 열광한다. ‘아민정음’이 큰 인기라고 한다. 아민정음은 아미와 훈민정음의 합성어다. 막내를 ‘maknae’로, ‘누구’를 ‘nugu’로 쓰는 식으로 직역이 쉽지 않은 한국어를 발음과 비슷하게 알파벳으로 옮겨 적는 것을 뜻한다. BTS, 블랙핑크 등 K팝 가수에 대한 관심이 한국 문화는 물론 한국어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1997년에 처음 생긴 한국어능력시험에 3000명이 응시했는데 지난해에는 30만 명으로 25년 만에 100배가 늘었다고 한다. 서울 종로구는 한글 사랑 조례와 함께 ‘간판이 아름다운 거리 사업’을 통해 한글 간판 제작을 지원하고 있다. 영어 간판과 한글 간판, 세계인의 눈에는 어느 쪽이 가 보고 싶은 도시로 비칠까.
〈한글의 탄생〉을 쓴 노마 히데키 전 교수는 “한마디로 한글의 위상이 완전히 달라지면서 대단히 높아졌다. 무엇보다 지구상의 많은 이들이 한글을 접할 기회가 많아졌다. 앞으로는 한글과 한국어가 세계의 문화를 선도해 갈 수도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 장기적 접근 없인 성과 힘들어
부산시의회는 무리한 추진을 이유로 심사를 보류해 부산시의 영어상용도시에 제동을 걸었다. 심지어 같은 당인 김태효 국민의힘 시의원조차 “협약을 이렇게 시급하게 해야 할 이유가 있었느냐? 이견이 존재하는데도 제대로 된 설명조차 없다”라고 비판했다. 파주 영어마을의 경우 설립비가 991억 원에 달했다. 전국적으로 영어마을 설립에 1조 원이 넘게 든 것으로 추정된다. 자칫 실패한 사업 답습으로 예산 낭비와 사교육 부담만 키울 우려가 있는 게 사실이다. 엑스포를 위한 대책이라면 영어전문가를 키우는 데 집중하면 된다는 주장도 일리가 있다.
서울과 인천 등의 사례로 볼 때 지자체장이 바뀌면 영어상용도시는 원점으로 돌아가기에 십상이다. 영어상용도시는 장기적인 계획을 갖지 않으면 가시적 성과를 내기 힘든 프로젝트다. 영어상용도시 관련 세부 추진 계획을 수립하기 위한 연구 용역을 내년에 착수할 계획이라고 한다. 여론을 잘 수렴하고, 지금까지의 실패 사례를 면밀히 검토하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해 보인다. 부산시민들이 영어를 습득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지 않으면 성공하기 어렵다.
2022-10-19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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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마약 청정국서 오염국으로
8월 21일 오후 울산 도심의 한 캠핑장에서 30대 남성이 웃통을 벗고 반바지 차림으로 캠핑장을 활보하며 화단에 들어가 소리를 지르는 등 기이한 행동을 했다. 놀란 캠핑장 이용객들이 경찰에 신고했고 출동한 경찰에 붙잡혔다. 같은 시간 함께 마약을 한 남성 2명은 차량 문을 연 채 질주하다 차량이 도랑에 빠지는 사고를 냈다. 경찰 조사 결과 이들은 평범한 일반인 친구 사이로 태국 여행 중 마약을 경험한 후 인터넷을 통해 마약류 LSD를 구입해 함께 흡입한 것으로 조사됐다. 해당 영상은 경찰청 페이스북에 ‘캠핑장 떨게 만든 마약 좀비 3인방’이라는 제목으로 올랐다.
마약이 우리 일상 속으로 파고들고 있다. 최근 몇 년 사이 마약 사범이 크게 늘었다. 이제 더 이상 마약은 폭력 조직이나 연예인, 부유층 자녀 등 일부 계층의 이야기가 아니다. 특히 최근에는 인터넷을 타고 1020세대 청소년들의 마약 범죄가 크게 늘어 심각한 문제다. 이대로 방치하면 대한민국의 미래가 위태로울 수도 있다.
■ 더 이상 마약 청정국 아니다
우리나라가 마약 청정국 지위를 벗어난 지는 꽤 오래됐다. 유엔은 마약류 사범이 인구 10만 명당 20명 미만일 때 마약 청정국으로 지정한다. 우리나라는 2016년 기준 25.2명으로 그 지위를 잃었다. 대검찰청이 발행하는 마약류 범죄 백서에 따르면 1만 명 미만이던 국내 마약 사범은 2016년 1만 4214, 2017년 1만 4123, 2018년 1만 2613, 2019년 1만 6044, 2020년 1만 8050, 2021년 1만 6153명으로 증가 추세다. 올해는 상반기에만 8575명으로 전년에 비해 크게 늘 것으로 보인다. 부산의 경우 올 8월 말 현재 628명의 마약 사범이 단속돼 전년 같은 기간 대비 6.8% 상승하며 전국적 증가 추세와 흐름을 같이하고 있다. 그러나 검거율 기준의 이 같은 수치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평가다. 마약 범죄는 수사기관이 인지하지 못하는 사건이 훨씬 많은 대표적 암수범죄다. 학계는 우리나라 마약 범죄의 암수율을 28.57배로 상정하기도 한다.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는 국내 마약 인구를 100만 명으로 추산하기도 했다. 5월 식품의약품안전처가 발표한 ‘하수역학 기반 신종 불법 마약류 사용 행태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4월부터 1년간 전국 57개 하수처리장 모든 곳에서 히로뽕, 펜디메트라진 등 불법 마약류가 나왔다. 검출량으로 역산하니 인구 1300명 중 1명꼴로 매일 히로뽕을 1회씩 투약하고 있다는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 마약의 늪에 빠져드는 청소년들
문제는 청소년 마약 사범 증가가 뚜렷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재범률이 높은 범죄 특성상 1020세대의 범죄 증가는 향후 사회적 확산세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다. 10대 마약 사범은 2017년 119명으로 전체의 0.8%를 차지했지만 지난해 450명으로 2.8%를 차지하며 급속한 증가세를 보였다. 같은 기간 20대 마약 사범도 2112명(15.0%)에서 5077명(31.4%)으로 크게 늘었다. 30대(25.4%)를 합하면 지난해 전체 마약류 사범 중 10~30대 비율은 59.6%에 달한다. 경남경찰청은 지난해 5월부터 부산·경남에서 합성 마약의 하나인 펜타닐을 불법 처방받은 뒤 투약·소지하거나 되판 10대 고교생 54명을 적발하기도 했다. 최근 경찰이 한 ‘텔레그램 마약방’을 수사하던 중 총책이 고등학교 3학년생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충격을 받기도 했다.
■ SNS·가상화폐 이용 비대면 거래 확산
최근 마약이 일반인들과 청소년들 사이에 급속히 확산되고 있는 배경에는 인터넷을 통해 손쉽게 이뤄지는 유통 구조의 변화가 있다는 분석이다. 국내 유통되는 대표적 마약류인 히로뽕은 과거 일본에서 제조되고 부산을 중심으로 반입돼 폭력 조직 등을 통해 유통됐다. 한때 부산이 마약 도시의 오명을 썼던 이유이기도 했다. 마약 거래 장소로 고속도로 갓길이 등장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이제 마약은 인터넷 등을 통해 비대면으로 손쉽게 거래가 이뤄진다. 텔레그램에 ‘아이×’ ‘빙×’ ‘얼×’ 등 마약을 의미하는 은어 광고가 등장한 지 오래다. 전자지갑에 가상화폐를 보내면 미리 약속된 곳에 마약을 두고 찾아가는 식의 일명 ‘던지기’ 수법으로 거래가 이뤄진다. 텔레그램의 보안 메신저는 물론이고 접속 정보를 암호화한 다크웹이나 딥웹 등을 이용한 마약 거래도 일반화되고 있다. 국제우편을 이용한 직구도 이뤄진다. 마약 전과가 없는 일반인이나 사이버 공간에 익숙한 10대들도 호기심에 범행을 저지르기 좋은 조건이 만들어진 것이다.
■ 마약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 무너졌다
부산경찰청 ‘마약범죄 근절 합동 추진단’ 이기응 간사(폭력계장)는 “인터넷 등을 통해 손쉽게 정보를 얻고 유통도 이뤄져 마약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이 느슨해진 것이 마약 범죄 확산의 원인이 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울산 캠핑장 마약 사건의 경우가 이 같은 사회 분위기의 연장선이라는 것이다. 2020년 9월 부산 해운대에서 40대 운전자가 대마를 흡입하고 포르쉐 승용차를 운전하다 7중 추돌 사고를 낸 것도 마찬가지 사례다. 지난해 12월 아프리카TV에서 VJ가 독일 음악 ‘코카인 2021’을 배경으로 춤을 추는 영상을 올린 뒤 밈(인터넷 패러디물)이 유행처럼 퍼지면서 10대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유명 영화배우와 걸그룹 멤버까지 가세하며 화제가 됐는데 마약에 대한 경각심이 느슨해진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 준다는 지적이다.
■ 마약과의 전쟁…종합적 대책 필요하다
윤희근 경찰청장은 8월 취임 일성으로 “SNS나 가상자산을 통해 마약이 쉽게 유통돼 청소년까지 무방비로 노출되고 있다”며 “집중 단속을 통해 국민들을 안심시키겠다”고 밝혔다. 이에 맞춰 부산경찰청이 합동 추진단을 설치하고 연말까지 집중 단속을 벌이기로 하는 등 전국 경찰이 마약과의 전쟁에 나서고 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마약 범죄의 특성상 강력한 단속과 함께 치료와 재활 등 종합적 대책이 이뤄져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특히 청소년 마약 범죄가 늘고 마약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이 느슨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마약의 심각성에 대한 교육이 절실하다. 재범률이 높은 범죄의 특성상 치료와 재활에 대한 사회적 투자도 필요하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국내 마약 치료재활병원은 21곳이 지정돼 있는데 실질적으로 치료와 재활이 이뤄지는 곳은 경남 창녕시 국립부곡병원과 인천 참사랑병원 등 2곳 정도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마약류 관리와 단속, 교육, 치료를 통괄적으로 수행할 마약청 신설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드라마 ‘수리남’의 마지막 장면에 등장해 우리 국정원과 공조수사를 벌이는 미국의 DEA가 바로 재범자 관리와 마약 유통, 관리 감독, 국제 공조까지 광범위한 역할을 수행하는 컨트롤타워다. 우리 사회가 마약의 수렁으로 더 깊이 빠져들기 전에 특단의 대책이 시급하다.
2022-10-05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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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기후 변화와 자연 재해
“모든 전력을 상실했다. 2011년 3월 11일 오후 2시 46분,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 1·2호기 원자로를 함께 관리하는 중앙제어실 벽 한 면을 가득 채운 계측기가 흔들렸다. 붉은 램프, 흰색 램프, 노란색 램프 등이 크리스마스트리처럼 깜빡이고 벨이 윙, 윙하고 울리기 시작했다. 화재경보기도 울렸다. 한번 껐다 켜자 경보기가 멈췄다. 오후 3시 27분 쓰나미 제1파, 오후 3시 35분경 제2파가 후쿠시마 제1 원전에 밀려들었다. 해발 4m 높이에 설치된 비상용 해수펌프를 삼키고 10m, 그리고 13m 위까지 솟구쳐 올라와 원자로 건물과 터빈 건물을 덮쳤다. 1·2·4호기는 내부 비상용 배터리로 움직이는 직류전원도 모두 상실했다. SOB-스테이션 블랙아웃, 교류전원 완전 상실이다. 모두 말을 잃었다.” 일본 아사히신문 후나바시 요이치 전 주필이 저서 〈후쿠시마 원전 대재앙의 진상〉에서 사고 상황을 묘사한 장면이다.
원전 사고… 위험한 건 전력 상실
원전 운영에 가장 큰 위협이 정전이다. 지진으로 전기가 끊기고, 낮은 지대에 설치돼 있던 비상용 발전기까지 바닷물에 침수되면서 원전 내 모든 전기 시설이 손상됐다. 후나바시 전 주필은 “후쿠시마 사고 당시 비상 매뉴얼북에는 교류와 직류 전원을 모두 상실해 전기가 일절 들어오지 않는 상황은 아예 없었다”면서 “직원들은 암흑천지의 중앙제어실에서 감과 전화로 상황을 파악할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고 서술했다. 전기가 끊기면서 원자로를 식히기 위한 냉각수 펌프는 모두 멈췄다. 치솟는 원자로의 열기에 냉각수가 증발하면서 노심 온도가 1200도까지 상승했다. 열기를 이기지 못한 수백 개의 연료봉이 녹아내렸다. 그러자 엄청난 양의 수소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격납용기는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압력밥솥 터지듯 폭발했다. 상상하기 힘든 방사성물질이 대량으로 대기와 바다로 대거 방출되는 ‘대재앙’이 발생했다. 모두 쓰나미에 의한 침수로 전력을 상실했기 때문이었다.
포항제철 전체 침수와 블랙아웃
경북 포항시 포항제철소 공장 안으로 해병대 상륙함이 출동했다. 지난 6일 새벽 ‘괴물 태풍’ 힌남노로 인해 포항 일대에 500mm의 기록적인 폭우가 폭포수처럼 쏟아지면서 오전 6시 20분께 냉천이 범람을 시작했다. 강물은 포스코 내 발전소와 제2문에 위치한 변전소 전기 배전시설을 덮친 뒤 공장 안으로 치고 들어왔다. 변전소가 침수되면서 공장 전체가 블랙아웃에 빠졌다. 오전 7시. 여의도 면적의 3배가 넘는 포항제철소 대부분이 흙탕물에 잠겼다. 이어 만조를 타고 바닷물까지 공장 안으로 밀려들었다. 예고된 태풍임에도 불구하고, 1973년 쇳물 생산 이후 49년 만에 처음으로 포항제철소 고로가 모두 멈춰 섰다.
포항제철소는 정전 사태를 풀기 위해 추석 연휴 기간에 하루 120만 원 일당까지 지급하면서 복구에 올인했다. 용광로는 겨우 재가동하기 시작했지만, 국내 유일의 전기강판과 스테인리스 등 최첨단 열연공장의 피해는 여전히 심각하다. 완전 정상화까지를 두고 산업부는 최대 6개월 이상, 포스코 본사는 3개월, 현장에서는 주요 전기 설비가 설치된 지하가 물에 잠겨 6개월 이상이 걸린다는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500년 만에 한 번 내릴 폭우와 만조가 겹쳤던 불가항력적인 부분과 냉천 상류 오어지의 홍수 조절 기능 부재, 냉천 하천정비사업과 구조물 문제, 포스코와 포항시의 불협화음 등 인재가 피해를 키웠다는 논란만 난무하고 있다. 확실한 점은 상상을 초월하는 기상 이변과 안일한 준비가 복합적으로 결합된 재해라는 점이다.
‘괴물 태풍’ 가능성 점점 높아져
힌남노는 기후 관측 사상 처음 있는 태풍이었다. 태풍은 주로 적도 인근에서 발생하고, 시계방향으로 돌면서 북서 방향으로 전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힌남노는 최초로 북위 25도 이북에서 발생해 반시계 방향으로 남서진하다가 급격히 북상하면서 다른 열대성 저기압을 흡수하며 ‘태풍 먹는 태풍’으로 커졌다. 제주도 한라산을 지나면서 “하늘이 뚫렸다”고 할 정도로 1년 내릴 양에 버금가는 1059mm의 비를 쏟아붓기도 했다.
걱정스러운 점은 괴물 태풍과 물 폭탄 등 이상기후 현상이 거의 매년 반복되고, 강도가 점점 세진다는 점이다. 세계적으로도 파키스탄은 폭우와 홍수로 국토의 3분의 1이 물에 잠겼다. 기후 전문가들은 “예전에는 100, 200년에 한 번 오던 폭우가 이제는 2, 3년마다 찾아올 수 있다”면서 “경우에 따라서는 1년에 몇 번이고 ‘괴물 태풍’을 겪을 가능성도 한층 커졌다”고 지적했다.
태풍에 멈추는 원전, 과연 괜찮을까
한반도 태풍의 상륙 경로인 동해안을 따라 18개 원전(고리 5, 새울 2, 월성 5, 한울 6)이 밀집해 있다. 원전은 냉각장치에 막대한 양의 물이 필요하기 때문에 바닷가에 입지한다. 이에 따라 태풍과 폭우, 해일 등에 따른 침수로 발전소 내부뿐만 아니라 송전선로 문제로 인한 외부전원 공급 차단 등 다양한 사고의 변수가 상존해 있다. 게다가 기존 원전은 고준위 핵폐기물 임시 적치장 역할까지 맡고 있어 예상치 못한 사고도 배제하기 힘든 상황이다.
실제로 태풍 힌남노 반경에 있었던 신고리1호기 원자력발전소가 수동 정지됐다. 신고리1호기는 당시 강풍으로 원전 터빈발전기에 영향을 줬고, 한수원은 전력 설비 이상을 사고 원인으로 추정했다. 태풍으로 인한 원전 가동 중단 사례는 과거에도 빈번했다. 2020년 9월 태풍 마이삭이 동해안을 따라 북상하면서 고리원전 1~4호기와 신고리 1~2호기, 월성 2~3호기 등 8개의 원전에서 전력 계통 문제가 발생해 잇따라 가동이 중단됐다. 2003년 9월에는 태풍 매미로 고리 1~4호기와 월성 2호기가 동시에 정지되는 사고가 있었다.
물론, 해일 등에 대한 안전 조치도 차츰 이뤄지고 있다. 한국수력원자력은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2013년 고리 원전의 콘크리트 해안 방벽을 기존 7.5~9.5m에서 10m, 총연장 2.1km로 증축하는 등 안전 설비를 강화했다. 하지만, 감사원은 2018년 “최고 해수위가 17m에 이를 수 있어 10m 방벽으로는 해일 등으로 인한 파고를 막지 못 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운에만 맡길 수 없는 안전
기상청은 힌남노 내습을 앞두고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피해를 낼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한국 포항제철소가 창사 이래 처음으로 공장 전면 침수와 3~6개월 조업 중단 사태를 겪고 있듯이, 원자력발전소도 이상 기후에 100% 안전하다고 확언하기는 어려운 지경이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수습을 총괄했던 간 나오토 전 일본 총리는 저서 〈나는 왜 탈원전을 결심했나〉에서 “화력발전소 화재 사고는 언젠가는 연료가 다 타버려 사고가 수습된다”면서 “이에 비해 원전 사고는 제어할 수 없는 원자로를 방치할수록 사태는 악화되고, 연료는 타지 않고 방사성물질을 대기와 해양으로 계속 방출한다”고 밝혔다. 간 전 총리는 “지금이라도 같은 사고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고 누구도 말할 수 없다”면서 “원전 사고는 한 민간 기업이 완전히 책임을 질 수 없고, ‘원전은 비용이 저렴하다’는 주장마저 붕괴했다”고 강조했다.
예측할 수 없는 자연재해에 마주 선 인류. ‘타지 않는 원자력발전소’의 안전에는 아무리 준비를 철저히 해도 모자람이 없다. 기상은 인간의 상상 이상으로 엄혹해지고 있고, 원전 사고는 단 한 번이라도 발생하면 되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2022-09-21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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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심심한 사과’ 논란이 말하는 것
‘심심한 사과’로 세상이 떠들썩하다. 얼마 전 한 업체가 인터넷에 올린 사과문에 네티즌들이 발끈했다. ‘마음의 표현 정도가 매우 깊고 간절하다’는 뜻의 심심(甚深)을 지루하다는 의미로 곡해한 탓. 문해력(文解力) 논란이 어제오늘 일은 아닌데 이 사건이 다시 기름을 부었다. 디지털 시대가 깊어 갈수록 문해력의 위기는 심화할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
■모국어 문해력, 그 심각한 하락
최근 ‘심심한 사과’ 사태는 근년에 잇따르는 문해력 논란의 연장선에 있다. 금일(今日·오늘)을 금요일로 착각하거나 무운(武運)을 ‘운이 없다’로 오해했던 여러 사례들이 떠오른다. 몇 년 전엔 ‘명징’ ‘직조’ 같은 단어를 쓴 한 영화평론가에게 “잘난 척한다” “엘리트주의의 향연”이라는 비난이 쏟아지기도 했다.
단어의 뜻을 모르는 일이 한자어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사흘’이 3일이냐 4일이냐로 포털 사이트 인기 검색어 1위에 올랐던 적도 있다. ‘사’가 들어가니 4일로 대강 이해했던 거다.
문해력 부족은 단순히 글자의 뜻을 모르는 것과는 다른 문제다. 유네스코는 문해력을 ‘다양한 내용에 대한 글을 이해, 해석, 창작할 수 있는 힘’으로 정의한다. 요즘 아이들은 글을 읽을 줄은 알지만 그 안의 생각과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 기성세대는 탄식한다. 대체 지금 우리나라의 모국어 문해력은 어디로 가고 있느냐고.
■교육 현장의 아우성
“아이들이 글을 읽는 걸 싫어하고, 읽어도 이해를 못 합니다.” 실제 학교 현장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들의 목소리는 충격적이다. 사회나 역사 수업 시간은 낱말의 의미를 설명하느라 진도가 안 나갈 지경이란다. 심지어 시험 시간에 “정의(定義)가 뭐예요?” “과도기가 무슨 뜻이죠?”라는 질문이 이어진다. 공지사항을 가정통신문이나 단톡방 메시지로 전달하는 일도 교사들의 큰 고민이다. 아이들이 내용 자체를 못 알아듣거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학생은 다를까 싶지만 오십보백보다. 예컨대, 문제를 미리 알리고 오픈북으로 시험을 보는데도 질문을 이해하지 못해 오답을 적는 학생이 대다수다. 정상적으로 맥락에 대한 이해력을 갖춘 학생은 한 학년에 서너 명 정도면 많은 편. 젊은 층은 줄임말만 접하다 보니 신조어는 잘 알아도 통상적인 단어의 유래와 의미는 모른다. 이게 ‘문맹률 1% 이하’를 자부한다는 한국의 민낯이다.
■디지털 시대에 더욱 악화
왜 이 지경까지 오게 됐나. 영상 문화가 문해력 저하의 가장 큰 원인이다. 화면 전환이 빠르고 대화 호흡이 짧은 영상에 익숙한 젊은 층은 줄글로 된 자료에 취약하다. 글 읽는 걸 어려워하기도 하지만 글 자체를 아예 읽으려 하지 않는 태도가 더 문제다. 읽더라도 원하는 정보만 취하고 나머지는 버린다. ‘스압 주의’라는 신조어가 그래서 나왔다. ‘스크롤 압박 주의’의 줄임말이다. 스크롤을 많이 내리는 장문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의미다.
디지털 기기에 길들여진 아이들의 문해력 하락은 빠른 속도로 진행 중이다. 이런 변화는 전국적인 현상이며 앞으로 한층 가속화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전망이다.
■미래 사회의 기초라는데…
디지털 세상이라지만 한국 학생들은 ‘디지털 문해력’도 꽝이다. 디지털 문해력은 ‘디지털 기기와 정보사용 능력’을 이른다. 지난해 한국 청소년의 디지털 정보 문해력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제학업성취도평가에서 바닥권을 기록했다. 이 충격적인 결과는 전통적인 문해력의 기초 없이는 디지털 문해력도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웅변한다.
한국 학생들은 주어진 문장에서 사실과 의견을 식별하는 능력도 최하위를 기록했다. 지식과 정보가 난무하는 시대에는 가치 있는 정보가 중요한데, 정보들이 어떻게 연결돼 있는지 살피고 선택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한다는 얘기다. 말하자면 가짜·진짜 뉴스를 구분하지 못하는 수준이다.
전문가들은 문해력이야말로 4차 산업혁명과 메타버스 시대의 소중한 덕목이라고 강조한다. 디지털 기술이 더 높은 문해 능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세대까지 갈라놓다
문해력 문제는 세대와 계층의 반대쪽에서도 제기된다. 디지털 기기와 그 언어를 불편해하는 시니어 세대의 고충을 가리킨다. 급변하는 디지털 세상은 시니어 세대에게 삶의 고단한 시험대이자 소외와 고립의 장벽이 된 지 오래다. ‘최애템’(최고로 아끼는 아이템), ‘킹받네’(열받네)처럼 영어와 한글을 섞은 무수한 신조어 앞에서 이들은 절망한다.
젊은 세대는 말 그대로 문해력이, 노인 세대는 새로운 디지털 기술에 접근하고 그것을 활용하는 문해력이 문제인 것이다. 청소년은 한자가 어렵고 어르신은 외국어가 낯선 것과 마찬가지다. 문해력의 위기는 상호 소통이 멀어진 세대와 계층 사이의 단절을 더욱 공고하게 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문해력을 높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독서와 글쓰기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의미를 구성하는 차원 높은 정신적 행위다. SNS 사용도 결국 읽고 쓰는 일이다. 아날로그 문해력은 디지털 문해력에도 영향을 준다. 과학기술이 날마다 새롭게 변하는 만큼 자신만의 문해력 향상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일이다.
물론 개인 차원의 문제만은 아니다. 공교육에서 담당해야 할 역할들이 대단히 중요하다. 사회적 문제로 접근해서 이와 관련된 공론화 과정이 필요하리라 본다. 아이들이, 나아가 국민들이 읽고 말하고 쓰는 데 흥미를 느끼게 해야 한다.
■결국은 소통의 문제
문해력 저하가 ‘한글 전용’ 언어 정책 때문이라는 주장이 일각에서 나온다. 글을 읽을 줄은 알아도 이해하지 못하는 실질적 ‘문맹’이 한자 교육의 실종 탓이라는 시각이다.
일리 없는 주장은 아니나 문해력의 본질은 아니다. ‘심심한 사과’ 사태의 심각성은 다른 데 있지 않다. 자신이 알고 있거나 생각하는 뜻이 아니라는 이유로 상대방을 비난하고 공격했다는 데 있다. 언어의 다양한 쓰임새나 의미를 찾아볼 의지가 없다는 것. 그 태도가 상징하는 바는 바로 편견과 단절이다.
문해력은 소통 의지와 관련된 문제로 봐야 한다. 결국 문해력의 위기란 나와 타자가 속한 맥락을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의 부재가 아닐까. 그래서 “문해력 저하는 민주주의 위기로 귀결될 수 있다.”(매리언 울프 <다시, 책으로>) 정보의 홍수 속에서도 확증 편향에 빠지지 않는 것, 이게 디지털 환경에서의 진정한 문해력이다.
곧 다양한 세대가 마주하는 추석 명절이다. 문해력은 위기를 맞고 있지만 그것은 세대 간 문화 차이를 해명할 단서이기도 하다. 갈등의 깊이 앞에서 절망하기보다는 그 간극을 메울 지혜를 쌓는 일이 급하다.
2022-09-07 [18: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