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戰犯아닌 전범 치욕 半世紀-日本징용 洪鍾默씨 수기]<17>동남아 各國 수십만명 노무자로 징집 희생자
희생자
태국과 버마(現미얀마)를 연결하는 철도가 개설될 때까지 日本군인 포로 노무자들의 인명희생이 얼마나 되는지는 오늘날까지도 명확하지 않다.
日本은 공사기간 후반무렵 패전의 위기에 몰리자 경황이 없었으며 관련서류를 소각,증거를 없앤뒤 희생자인원을 줄이려고 애써는데다 연합군측에서도 확증잡기에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이다.
다문 공사현장에 있었던 우리들은 철도건설작업과정에서 침목의 숫자만큼 희생자가 많았을 것으로 여겨져 「시체를 침목으로 깔아놓은 철도」라고들 말했다.
또 「도둑질한 철도」라고 부르기도 했다. 왜냐하면 철도노반공사를 마무리지었지만 레일이 없어 이를 노략질해왔기 때문이다. 애초 레일을 日本에서 수송해 올것이라고 믿고 있었으나 도착하지 않았다. 연합군 폭격으로 본국의 레일공장이 폭격당해 철물이 고갈상태에 빠졌으며 한국의 놋젓가락 반지까지 강제수집했지만 충분한 조달이 못되었다.
비록 본국에서 레일을 마들었다고해도 制海權이 연합군에 장악된 시점이어서 해상수송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철도건설 부대는 어쩔수 없이 레일의 현지조달을 궁리했다.
버마의 랑군(현재의 양곤)에서 만다제이에 이르는 복선철도의 한쪽을 걷어 오기로 한 것이다.
日本의 점령하에있었던 버마측은 이곳 복선철도의 한쪽 레일을 걷어가도 항변한마디 할 입장이아니었다.
이에따라 버마사람들은 日本軍이 건설한 철도를 「도둑질한 철도」라고 부르고 있었다.
우리 포로수용소 포로장교들의 증언에 의하면 노역에 동원된 포로들은 대부분 싱가포르 함락때 잡혀온10만여명의 포로라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日本이 하와이 眞珠灣을 기습공격한 1941년 12월8일 말레이시아 반도에도 같은 시기에 상륙,이듬해 2월15일 싱가포르를 함락시켰는데 이때 英國軍휘하에 있었던 英軍 호주 네덜란드군 포로 10만명이 사로잡혀와 이들이 철도건설공사장에 투입된 것이었다.
또 쟈와島의 반톤이 함락될때 이곳의 네덜란드 인도네시아 포로8만명도 합류했다.
이들과 함께 버마에서 17만명의 노무자가 강제징집당해 왔다. 태국에서도 수만의 노무자가 징집당해 왔으나 그 숫자는 아직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는 상태이다. 대충 10만명이상으로 추산되고 있을뿐이다.
버마에서 징집된 노무자는 한국에서의 노무자징집과 같은 수법으로 끌려왔다.
처음에는 「땀의 兵隊」라는 이름으로 親日派유지들의 권유에 못이겨 자진 참가한 노무자도 있었고,日本軍점령하에서 살길이 없어 돈을 벌겠다고 나왔거나 타인의 징집에 대리해 돈에 팔려 온 노무자도 잇었다.
그러나 거의 90%는 강제로 끌려왔었다.
각 지방별로 배당된 징집인원을 충당할 수 없자 13세부터 70세까지의 남자들을 사냥하다시피 끌고온것이다.
들일하다가 잡혀오기도 했고 땅굴에 숨어 있거나 정글에서 피신중 日本경찰과 헌병 친일파유지의 손에 닥치는대로 끌려왔다. 가족들에게 연락할 틈도 없었다. 특히 버마는 英國식민지로서 압정(壓政)에 짓눌려 왔었는데 무직 무의탁자는 형법으로 강제노역장에 동원시키도록 규정되어 있었으므로 강제징집을 피할 길이 없었다. 日本軍침공후에도 이 형법을 적용,기층(基層)노동자를 모두 끌고와 철도건설공사장에 밀어넣었다.
종전후에 안 일이지만 철도건설공사장에서 사망한 포로만해도 1만3천5백명으로 공식발표됐다. 이는 英國외무성이 전후처리를 위해 버마의 탄뷰자얏軍묘지에 묻혀있는 3천5백12명과 태국 묘지의 8천4백여명등 포로묘소에서 확인한 숫자이다.
이밖에 한 구덩이에 공동매장 혹은 공동화장으로 유골마저 찾지못한 숫자와 도망치다가 정글에서 맹수에 희생되었거나 병고로 사망한 인원까지 합친다면 2만명이상 될것으로 추산되고있다.
노무자의 사망자숫자는 더 많았다. 英國측 조사에서밝혀진 숫자만 해도 8만명을 넘는다(1947년8월7일 英國외무성 발표).
그런데 日軍의 패전이 임박할 무렵,버마출신 노무자17만명중 4만여명이 도주했다고 日本軍측은 주장하고있었는데 종전후 버마에서 조사한 결과 1만3천여명만이 무사히 귀향했다고 밝혀졌다. 이로 미루어 보아 버마출신 노동자의 희생은 8만명을 훨씬 웃돌 것은 명확한 일이 아닐수 없었다.
참고로 버마의 독립운동가 아웅산장군이 종전후 철도건설공사에 관련해 행한 연설문을 요약해본다.
「버마는 약 4년에 걸친 日本침략군의 전화(戰火)에 짓밟혀다. 日本군국주의자들,그 악랄한 파시즘체제가 버마를 휩쓸어 무수한 인명과 물자를 약탈 했으며 국토를 황무지로 만들었다. 日本군국주의자들은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국민탄압책으로 철도를 건설하면서 버마 노동자 약8만명 이상을 끌고가 이들이 병들고 굶주려 공사장에서 가엾게 죽어가도록 했다.
非道 野蠻의 日本파시즘에 우리는 분노의 불길을 가슴속에서 태우고 있으며 영원히 잊어서는 안된다. 그들이자행한 포악한 착취 노예화 약탈 억압등 비인도적인 이같은 만행이 다시는 이 지구상에 뿌리내릴 수 없도록 대응할것을 철도건설공사장에서 희생당한 영령앞에서 엄숙히 맹세하자.」
버마의 국부(國父)로 추앙받고 있는 이 아웅산장군의 연설문은 탄뷰자얏軍묘지 옆에 비문으로 새겨져 그뜻이 버마인의 가슴속에 오늘에도 면면히 흐르고 있다.
철도건설공사에서 英國포로들이 얼마나 뼈저린 희생을 당했는가는 종전후 英國정부가 철도를 처리한 과정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종전후 英國정부는 철도를 태국과 버마에 매각키로했다. 英國속령으로 지배하고 있다가 종전후 각민족의 자결과 독립추세에 발맞추어 나라를 독립시켜주면서 철도의 매각을 제시한 것이었다.
철도를 매각하지않고 그냥넘겨 줄수도 있는 사안이었으나 이철도에 英國軍포로의 너무나도 많은 땀과 피 그리고 생명이 처참하게 희생당했으므로 태국과 버마에 매각키로 한 것이었다.
이때 英國정부는 철도중 태국측부분은 100만 파운드 이상,버마측철도에대해서는 1천6백만파운드에팔아넘겼다. 英國정부는 이매각대금을 英國軍포로생존자들에게 골고루 분배해 주었다. 포로로 철도노역장에서 혹사·학대당한 대가로 바꾸기는 너무도 적은 것이었지만 그 희생에 대한 각별한 위로와 보상의 뜻으로 분배해준것이었다. 아무튼철도건설공사는 태평양전쟁중에 日本이 저지른 만행중 대표적인 공사로 손꼽히고 있다. 日本이 중국대륙침략이후 영구적인 지배를 꾀하는 한편 당면한 남방지구(동남아)의 전투에 필요한 군수품 수송루트 개척을 위한 철도개설이야말로 日本의 원대한 침략야욕을 대변해 주는 것이었다.
이 철도에는 우리 한국출신 군속인 포로감시원의 눈물과 피도 섞여있다. 日本식민지국민이었다는 불행한 처지 때문에 허수아비처럼 日本군복을 입고 日本軍의 하수인으로,「조센진」(朝鮮人:일본인이 한국인을 얕잡아보는 말투)혹은 「한토진」(半島人)으로 불리면서 뼈저린 민족차별을 감수하는등포로 못지않은학대를받아왔다.
나는 이 철도를 내인생을 송두리째 빼앗아간 「비운의 철도」라고 부른다. 이 철도공사에서 초로들을 노역시키지 않았던들 우리 포로감시원들이 그같은 지옥으로 끌려가지도 않았을 것이고 또한 포로들과의 마찰이나 원한맺힐 일들도 없어 홀가분한 마음으로 종전을 맞았을 것인데 이철도가 비운의 계기가 될줄이야 꿈에도 몰랐었다.
[사진]난공사끝에 태국과 버마를 잇는 철도가 개통돼 운행됐다. 이철도는 「시체를 침목으로 깔아놓은 철도」「도둑질한 철도」로 불렸다.
[사진]1944년10월 日本해군 기동부대 기함인 瑞鶴號가 연합군 해군의 공격으로 침몰되기 직전 승무원들이 군함기를 내리며 최후의 경례를 보내고 있다.
洪鍾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