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 신춘문예]문학평론 당선작-여성, 환멸을 넘어선 불멸의 기호
서영은論 - 정미숙

1. 서영은이 놓인 자리
서영은(徐永恩:1943~)은 올해로 화갑을 맞았고 등단 삼십 오년을 지났다. 지금쯤 장식될 법한 원로란 부호는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생의 현상과 본질, 이면과 진실의 틈새를 놓치지 않고 포착하는 그녀의 촉수는 여전히 젊다. 1968년《사상계》에 '교(橋)'로 등단한 이래 한동안 그녀는 남성화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워('교(橋)''나와 '나'''타인의 우물' 등) 일상의 비루함과 서로 화합하지 못하는 남녀의 섹슈얼리티를 서술해 왔다. 많은 여성작가들이 처녀작에서부터 작가와 화자의 젠더를 일치시키는 자전적인 소설쓰기로 서사의 포문을 여는 데 비하여 서영은은 남성화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일별하고 한참을 돌아 '먼 그대'(1983)에 이르러 여성화자 '문자'를 찾아 세운다. 단순한 현상인 듯하나 작가와 젠더의 불일치에서 일치로의 이행은 서영은 소설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그녀의 소설은 남성이 배려된 여성 이야기 혹은 남성이 먼저 이해된 여성 서사이다.
작가 서영은의 자전적 기억은 '문자'와 더불어 시작되어 '현석화'('그녀의 여자')에 이른다. 두루 알려져 있듯이 서영은 소설의 여성들은 중심과 제도적 권력인 결혼에서 소외된 위험하거나 불온한 여성들로 연인, 정부, 첩이거나 처첩의 경계에서 A(Adultery)의 표지를 달고 있다. 이는 이 글의 텍스트인 '먼 그대'(1983)―'사다리가 놓인 창'(1989)―'꿈길에서 꿈길로'(1994)―'그녀의 여자'(2000)의 계보를 잇는 자전적 소설과 여타 여러 소설들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비슷한 여성들을 복제/변형하거나 사실을 재현·방어하면서 이어지는 이러한 소설들의 공통화제는 불륜적 상황에 놓인 여성들의 정체성 문제이다. 서영은은 이러한 여성들을 끈질기고 집요하게 주목하기 위해 동성간의 응시라는 시점 전략을 구사한다. 이 경우 인물들은 대개 화자/해설자/특권적 시선자와 초점화자/대상자/관찰되는 자로 양분된다. 작가는 여성들의 실존을 관찰하듯 해석하며 고찰한다. 단편에서 중편을 지나 장편으로 소설의 몸체를 넓혀가며 그녀들의 문제를 심화시켜 온 것이다.
지난 90년대의 여성문학은 그 르네상스를 지나 21세기를 맞은 현 시점에서도 여전히 강세이다. 여성작가들의 관심이 몸과 위반의 섹슈얼리티의 문제에 집중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그 동안 소외되고 억압받았던 여성들의 반란과 주체 회복의 의미를 갖는 것으로 평가된다. 그런데 서영은의 경우 서술의 상황은 한 순간에 끝나는 반란이 아니라 지속되는 운명의 늪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 점에서 그녀는 다른 여성작가들과 달리 일부일처제 신화의 실체를 보다 선명하게 드러낸다. 이 글은 서영은이 천착한 성과 사랑,결혼과 가족,그 진실과 환영을 추적해 보고자 한다. 아울러 그녀의 정체는 과연 어디에서 어떻게 무엇으로 남겨져 있는지 그 과정의 진실을 탐색하려 한다.
2. 여성, 비극적 경계인
'먼 그대'의 '문자'는 서영은 소설의 원형적 여성이다. 서영은 소설의 여성은 대체로 '문자'를 닮았다. '문자'의 정체는 애매하고 불온하다. 노처녀인 그녀는 사실 처녀가 '아니고', 아이를 낳았으나 어머니도 '아니다'. 결혼생활을 하나 결혼하지도 '않았다'. '예'와 동시에 '아니오'인 비극적 경계인이 '문자'다. 그래서 그녀의 존재는 타인, 특히 동성의 여성들에게 '저렇게 될까 무서운' 공포의 대상이 된다.
이 소설에서 일부일처제의 신화는 왜곡되게 작동한다. 이는 '한수'와 그의 아내 그리고 그와 '문자' 사이에 형성된 기이한 관계로 표출되고 있다. '한수'의 아내는 그와 '문자'의 관계를 묵인할 뿐더러 나아가서는 협조적이다. '문자'와 '한수'의 관계가 미리 결정되어 있듯 '한수'와 '한수 아내'의 부부관계 역시 절대적이다. '한수'의 아내는 '문자'의 존재가 그들의 가정과 아내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조금도 위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 그녀는 법적 지위와 상속권을 갖는 대신 남편의 외도를 눈감아 주면서 변함없이 남편에 대한 정절을 지킨다. 이러한 관계에서 '문자'는 노예의 위치에 있다. 마치 시지프스가 신의 저주에 묶여있으나 불만 없이 그것을 자신의 삶의 방식으로 삼았듯이 그녀는 겨루듯 그를 섬긴다. 소설은 문자와 '한수' 사이에 어떠한 사랑이 있었고 무슨 맹세가 있었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문자'의 사랑은 선험적인 것 혹은 절대적인 것으로 전제된다.
그러나 '문자'의 소외는 이중으로 가중되어 있다. 그녀가 '등불'이요 '신'이라 생각하는 '한수'가 나약하고 이기적인 '남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는 무책임하고 유아적인 속물이자 '술주정꾼'이며 문자의 삶을 파괴하는 이다. 오물(abject)을 싸지르는 '그'에 투영된 문자는 또한 타자들의 눈에 '비체'(Abject)로 인식된다. 그녀는 독신녀/창녀의 경계에서 위태롭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 그녀의 선택은 독자들의 기대 지평을 뒤집는다. 서술자에 의해 제시되고 있는 '문자'의 내면이 읽는 이들을 당혹에 빠뜨리는 것이다. '문자'의 침묵은 '절대 긍정적 자신감'이고 그 확신은 '아주 높은 곳에 있는 어떤 존재'에게서 비롯한다. '문자'를 이해하지 못하는 '그네들'은 '무지'한 것으로, '한수'는 '시렁 위에 걸려 있는 등불'로 정리된다. '시렁 위에 걸려 있는 등불'은 무엇인가. 어두울 땐 길이고 빛이 되나, 밝고 따뜻할 땐 아무 소용에 닿지 않은 초라한 골동품 같은 것이 아닐까. '빛으로도 열기로도 인색한 것'에 메타포의 현실성이 있다. 그러나 '문자'는 여전히 그 비유에 사로잡혀 가슴을 펄럭인다. '문자'의 고독은 '그'를 얻는 대신 '그네들'의 비난을 감수하겠다는 태도에 연유한다. 그녀는 누구와의 소통도 원하지 않으며 거의 무조건적으로 자기의 상황을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한 남자를 위한 헌신과 희생에 어떠한 계산도 갖고 있지 않은 여성의 존재는 절대적이다. 그러나 초점화자인 '문자'의 내면은 환영과 환멸의 덮개로 무겁다.
'먼 그대'에서 '문자'가 보이는 침묵은 현실에 대한 자기 방어이자 세상에 대한 불신과 저항이라 할 수 있다. 몸도 영혼도 아이도 다 빼앗겨버린 여성, 그러고도 언제든 고통에 무릎 꿇을 수 있다는 낙타의 등가물인 '문자'는 환멸과 절망을 미리 안 매저키스트이다. 매저키스트인 희생자는 화를 내면서도 내심으로는 자신에게 가해진 벌을 마땅히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화인(火印)처럼 붉은 주홍색 'A'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요구하지 않으며 제 탓으로 돌리는 '문자'의 자기 학대는 모든 고통의 사실상의 원인 제공자인 남성을 베일에 가리게 한다. 주관화된 연민과 순정의 파시즘으로 무장한 듯한 '문자'의 이미지는 우리 시대에 대안 없이 존재하는 여성군의 상징이다. 따라서 '문자'의 막막함과 침묵은 그녀의 입장과 삶의 태도로 보아야 한다. 부당하게 사랑했기에 '할 말이 없는' '문자'의 상황은 '한수'와 더불어 우리가 요구한 희생양은 아닐까. 길을 잘못 든 속인처럼 만만한 그녀에게 몰아지는 가학을 통해 정렬을 재정비하는 일부일처제의 기만적 질서는 '문자'가 겨루는 고통이 크기에 계속될 것이다. 이는 이후 서영은 소설에서 매저키즘, 그리고 새도-매저키즘으로 이어지며 그녀들을 증명할 고통의 근거가 된다. 이 처절한 기록은 그 끝이 보일 때까지 이어진다.
3. 경계를 허무는 웃음의 전략
'사다리가 놓인 창'의 표제는 상징적이다. 이것은 가난이 밀어올린 지상에 없는 다락방을 가리키면서 비정상적으로 넘나들어야 했던 경계의 초월을 암시한다. 사다리를 타고 넘나드는 창은 창이자 출입구이다. 여기서 공간의 경계와 구분은 상실된다. 이는 소설 공간의 부당한 배치로 이어지는 전도된 질서를 암시한다. 스물 한 살의 처녀 화자 '나'(박정애)는 빈궁한 현실에서 지상의 방을 잃고 다락방으로 올려진다. 무참한 그곳에서 '나'는 '창(내면)'을 얻고 신산한 여성들의 삶을 발견한다.
화자의 집에 세를 든 '박상무'와 그의 아내는 실제의 부부가 아니다. 그는 처와 자식이 셋이나 있는 유부남이나 남편처럼 당당하게 행세하며 드나든다. 이 소설에서 '인애엄마'는 앞서 보았던 '문자'의 복제에 가깝다. 그녀 또한 무책임한 사기꾼인 '그'를 위해 어머니의 역할마저 유보하며 헌신하는 여성이다. 그러나 이러한 그녀에게 돌아오는 것은 모욕뿐이다. '문자'를 닮은 그녀는 '박상무의 아내/젊은 미망인/인애 엄마' 등 그 어느 기호에도 적합성을 얻지 못한다. '박상무의 아내'(혹은 아내)라 호명되었으나 그에게 본처가 있는 까닭에 사실이 아니고,'젊은 미망인'이라는 명명은 남편 사별 이후 '박상무'와 수년간 동거생활을 하고 있는 그녀에게 민망한 용어일 뿐이다. '인애엄마' 또한 그녀가 되찾은 이름이긴 하나 남편의 부재를 드러내는 기호이다. 이처럼 그녀의 현실은 모성/여성이 조화롭게 실현될 수 없다는 데서 신산스럽다. 부정의 기호인 그녀는 위치를 얻지 못한다.
이러한 그녀를 바라보는 화자 '나'는 그녀에 대하여 동정적인 입장을 갖는다. 그러나 '나'와 '그녀'는 정작 한 마디의 소통도 이루지 못하고 미지와 가능의 기호 '처녀'와 기지와 좌절의 기호 '첩'이 어긋나듯 헤어진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현실에 대한 환멸로 자살을 감행한다. 그러나 '나'는 거짓말처럼 살아난다. 이는 불우한 '인애엄마'를 위해 기꺼이 죽으려 했던 '나'의 태도 때문이라 해석된다. 웃으면서 자살을 택한 '나'에 의해 생존의 이유는 다시 분명해졌다. '나'가 현실의 아득한 장벽과 절망을 넘는 생존 전략으로 '웃음'을 선택한 것이다. 웃음은 바흐친이 역설했듯이 현실의 기만적 질서를 통쾌하게 무너뜨리는 민중의 힘이자 그것에서 비롯한 현실의 억압적 굴레를 가볍게 넘을 수 있는 태도와 전략이다. 놀랍게도 스물 한 살의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는 그녀에 향한 '애정'을 '웃음'과 연결시키며 극단에서 탈출한다. 극단의 끝에서 내면이 열리듯 '나'는 생을 도로 찾는다.
이 소설에서 화자인 '나'는 '인애엄마'의 고통을 '너무나 친숙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녀와 흡사한 인생을 걸어가야 할 운명'이 아닌가 의구할 만큼 그녀와 강렬한 동일시를 경험한다. '먼 그대'에서 '문자'가 세상에 대한 방어적 자세로 동성간의 소통 부재를 승인한 것과 달리 이 소설에서 순수한 화자 '나'에 의해 그 폐쇄회로가 열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스스로 소외되고 보상 없이 힘든 여성들은 모두 자기와 같은 동일자라고 인식한다. 그런데 이러한 인식은 무능한 남성들이 가한 폭력에 기반하여 생긴다. 아버지의 죽음과 오빠의 무능함 속에 메말라 현실적으로 변해 가는 엄마와 보상 없는 사랑에 내몰린 '인애엄마', 그리고 남편에게 저녁마다 구타당하는 이웃아줌마, 사랑을 잃고 자살을 세 번씩 시도한 올케, 교감의 아이를 임신한 '효순', 남편을 잃고 생계를 위해 몸을 상하는 선배 등, 모든 가난하고 소외된 여성들은 하나인 것이다. 그녀들을 통해 '나'는 인생의 함정과 고단함을 짐작한다.
이 소설은 순수하고 도덕적인 화자 '나'의 자격으로 인해 설득력을 갖는다. '나'는 구차한 것, 위선적인 것, 그리고 인간의 존엄을 짓밟는 모든 것에 대하여 항거하고 저항하는 순수하고 도덕적인 인물이다. 무엇보다 '나'의 이 순수함은 자신의 입장에 따라 편의적으로 사람을 구분하거나 경계 짓지 않겠다는 객관적인 시선을 확보하게 한다. 그래서 '나'는 '인애엄마'를 제도적 권력과 가부장적 기준으로 분류된 여성기호인 처/첩으로 구분하지 않는다.
'나'에게 그녀는 사랑을 잃은, 그리고 함정에 빠진 외롭고 가난한 한 '여성'일 뿐이다. 따라서 '나'의 자살기도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이익을 먼저 계산하는 몰인정한 현실, 그래서 인간의 존엄과 교신이 상실될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한 절망과 거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아직 세상과 인간 세사에 놓인 심연을 모른다. 남성이 친 빗장을 열고 여성들과 그녀들의 삶을 응시한 것일 뿐이다. 그래서 슬프고 신비로운 여운을 남기고 사라진 '인애엄마'의 후일담을 '나'는 짐작하지 못한다. 하지만 '나'는 주어진 삶의 무거운 짐을 회피하지 않고 세상을 향해 자신을 세운다. '나'는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높은 곳에 사는 남성'이 내미는 손을 단호히 거절하고, 더 높고 깊어진 안목으로 세상을 읽기 위해 부끄러움과 주저를 버리고, '더 불어날 사다리'의 두려움과 혼돈을 떨치며 당당히 나선다. 생의 고단한 무게를 대신 져줄 사람이 전무한 가운데 '나'는 만만치 않은 세상의 주체가 되려 한다. '사다리가 놓인 창'에 표출된 '나'의 이러한 긍정적 모습은 서영은이 긍극적으로 기대하는 여성의 한 모습이 아닌가 생각된다.
4. 제 3의 성, 모순의 기호
'꿈길에서 꿈길로'에 이르면 지금껏 어긋나던 여성들이 맞닥뜨린다. 이 소설은 소통부재와 자살시도를 넘은 대화적 소설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 이 소설은 화자 '나(박희주)'가 연극인 '한진옥'을 만나러 가는 데서 발단된다. 세간의 호기심인 그녀의 '내면(속내)'을 끌어내라는 남편의 주문으로 시작된 것이나 그녀의 실체에 도달하기 위해 다가앉는 밀착된 서술전략으로 볼 수 있다. 앞의 두 소설에서 엿본 비장함과 자기 연민의 도취('문자'), 순수한 동일시의 긍정적 승화('한정애')는 실존적 문제제기와 이해의 단초를 제기했으나 주관화되고 추상적인 이해의 서막에 불과했다. 이러한 점에서 '꿈길에서 꿈길로'가 침묵하고 사라졌던 '그녀'를 호출하여 이해한다는 것은 심대한 의미가 있다.
'꿈길에서 꿈길로'에 등장하는 두 여성은 모두 연애와 결혼의 과정을 거친 성숙한 여인들로 자격을 같이한다. 그러나 두 사람의 입장은 다르다. 주부이자 잘 나가는 기자인 '나'(박희주)는 '한진옥'에 대한 선입견을 쉽게 무너뜨리지 않으며 이를 '본능적 거부감'과 '당혹감'이라고 이해하는 입장을 갖고 있다. 그러나 둘은 '사랑에 실패한 여자'로 묶여진다. '나'의 실패는 남편과 나 사이의 어긋남이고('나'가 남편을 보지 않는 것이라면), '한진옥'의 좌절은 남편과 나의 사랑을 자식들과 타인에게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정통성이 확보된 '아내-처'인 '나'와 '연인(정부)/아내'의 경계에서 '아내'와 '어머니'로 옮겨 앉았으나 인정받지 못한 그녀의 절망은 다르다. 여기서 '나'는 관찰자이며 그녀를 읽는 해석자로 시선의 권력을 갖는다. 작가의 분신인 듯한 초점화자이자 실질적인 주인공은 보여지는 자로 '그녀'인 한진옥이 된다. 이러한 인물의 배치는 '고백'의 진실을 이끌어낸다는 서술전략에 부합된다. 서사가 심화되면서 관찰하는 '나'와 관찰 당하는 '한진옥'의 구분은 없어진다. 서로는 각자가 진정 말하고 싶고 알고 싶은 것의 '눈'이 되어 서로를 보완한다. 이는 두 몸이나 한 몸에서 나온 것 같은 강렬한 느낌을 던진다. 경험과 상처가 다르나 궁극적으로 모든 여성은 통하게 되어 있다는 확신에서 출발하여 두 인물간의 시선의 거리가 좁혀지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여성간의 이해와 연대를 절실히 구하고 가능성을 신뢰한 작가가 또 있을까.
인터뷰의 형식을 빈 탓도 있으나 두 여인의 대화는 주로 사랑과 결혼의 의미로 모아진다. 여기서 '그녀'를 취재하는 듯하나 그녀를 통해 '나'는 '나'의 이야기를 하고 '한진옥'은 '나'와 다른 자신의 입장을 자연스레 피력하면서 '섹스', '욕망, '일부일처제', '상처(trauma)'를 털어놓고 공감한다. 그러나 '일부다처제'의 나라 '이라크'에서 교감한 그녀들의 욕망과 고민은 '현실'에서 무력하고 '나'와 '그녀'의 대화는 그 고민의 깊이가 다른 까닭에 이해의 접점을 찾기 어렵게 된다. '한진옥'의 딜레마는 그녀가 여전히 '황진이/아내'의 경계에 서 있다는 것이다. 그녀는 '황진이'는 요부이나 그녀를 만든 것은 남성들의 요구라고 이해하며 나아가 황진이가 많은 여인들의 적수이나 그녀를 없앤다 해도 남성들의 요구와 욕망에 따라 황진이와 같은 여성은 끊임없이 생길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화자인 '나'는 이러한 '한진옥'과 황진이를 동일시하면서 그녀를 '여자/남자, 아픔/사랑, 아내/황진이' 등을 모두 포괄하는 '제삼의 성(性)'으로 인식하고 그녀로 인해서 '나'(우리)가 '삶의 무자비한 폭력에 대항할 수 있는 '창'과 '방패'를 동시에 획득한 것'으로 여긴다. 예사로운 듯하나, 기실 가학적이고 모멸적 해석이 아닐 수 없다. '창과 방패'는 문자대로 '모순(矛盾)'이 아닌가. 배제된 혹은 희생된 황진이(/한진옥)를 통해 우리들 가운데 누가 폭력에서 피해갈 수 있었는가. '그녀'는 우리들의 삶을 위해 마련된 '희생양'인가. '한진옥'은 끝내 이 문제를 직시하지 못한다.
남편의 연인으로 있다가 전처가 죽은 후에 그와 결혼해 '한진옥'은 '그의 아내'와 그의 자식들의 '어머니'의 지위를 가졌으나 남편이 의식불명이 된 뒤 남편이 세운 질서는 '그의 아들'에 의해 훼손된다. '사랑'이 '요강'으로 변함과 동시에 그녀의 자리도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영혼을 파먹는 상처로 '한진옥'은 '아무 것도 아닌 것' 즉 '궁극적 타자'로 낮아져야 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 듯 '오체투지'의 갈구를 보인다. 그녀가 확신할 수 있는 그의 증거는 '섹스'에 있다. 그것은 '수성'(水性)에서 '영성'(靈性)으로 바뀌는 '완벽한 교감'으로 그와 그녀를 확인하는 매개로는 충분했으나 '아내'―'어머니'로 그녀를 확장할 수 있는 열쇠는 아니었다. 자식들에게 그녀는 단지 '아버지의 연인(여자)'에 불과할 뿐이다. 이는 앞서 '한수'의 아내가 '문자'를 인정한 것이 그녀의 가정과 지위를 교란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였던 것과 같은 논리의 변형이 된다. 혈통의 정통성을 내세우며 아버지를 상속하려는 그들에게 그녀는 부당한 침입자일 뿐 아무 것도 아니다. 이로써 이 소설은 일부일처제 신화의 이면을 드러낸다. 헤겔이 우려했듯 상속의 문제는 비인륜적 가족 해체를 가능하게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그 동안 읽은 서영은의 모든 소설에서 '물질'과 '아이' 두 요소는 '그녀들'이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애써 부정했던 문제들로 남겨진다는 것이다. 경제적 배려를 하지 않는 남성에게 그녀들은 한결같이 그것을 요구하지 않고 그에게 자식이 있다는 이유로 아이를 갖지 않는다. 그러나 이 무슨 모순인가. '사랑의 진정성'을 위해 배제했던 두 요인이 그녀의 위치를 위협하는 '창'(槍)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그녀는 어떠한 선택을 할 것인가. 여기서 '한진옥'은 자신의 출구를 '동성애적 포즈'에 담는다. '동성애적 포즈'라 함은 그녀의 동성애적 태도가 이성애와 가부장제에 대한 확고한 반발에서 출발하고 있지 못하다는 의미이다. 그녀는 '부취'(butch;동성애 관계에서 남성역을 맡는 사람)로, 상대 여성은 모든 소외된 여성이 된다. 그래서 그녀의 동성애는 이미지(image)이다. 여행을 떠날 때 늘 복장을 남/여 두 종류로 준비하는 그녀는 성(sex/gender)의 구분을 초월하려 한다. 그러나 전제했듯이 이성애와 가부장제의 모순을 비판하고 여성적 대안을 마련하기 위한 전략과 실천의 의미를 갖지는 못한다. '남성성 연습' 혹은 '여성 이해'에 그 의미가 모일 뿐이다. 다시 말하면 여성은 약하고 힘없는 자라는 타자성에의 시인(是認)은 있으나 그것을 넘어설 현실적 대안은 부재한 가운데 '내 속에서 태어난 남성'으로 소외된 여성들, '누님들의 남근(phallus)'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이 경우 젠더 역할의 연기(演技)는 여성이나 남성의 복장 도착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남장옷을 벗고 머리를 푼 그녀는 다시 '한진옥씨'로 돌아오고, '힘'과 '자유'를 역설하나 그녀는 여전히 '그의 여자'일 뿐이다. 명쾌하게 해결된 듯한 그녀의 문제는 여전히 남고 그녀는 '지붕 아래서 익는' 여성의 안정된 행복에 우울해 한다. 모든 것은 그대로이다. 이후 '예술가'인 '한진옥'이 도모한 대안은 수난 받는 여성상의 예술적 승화이다. 그녀는 '바리데기 공주 설화'를 통해 운명을 이겨낸 여성상을 창출하겠다는 의지를 보인다. 모든 슬픔과 고통을 자신의 운명으로 안으며 낮추고 산 여성, 그래서 '모든 이의 어머니'가 된 바리데기의 이야기를 통해서 자신의 결락을 메우겠다고 달뜨는 것이다. 그러나 예술가인 그녀의 방식은 고독하고 숭고한 것이나 현실적인 대안으론 부족하다. 이는 마치 그녀의 소외가 헌신의 부족이나 애정 결핍이 아니라 가족의 이기와 사회 제도와 연계된 모순임을 제대로 지적하지 않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알고 있으나 말하지 않는 것은 그녀의 정체성에 걸린 장애(complex)탓이다. 장애에 걸린 그녀는 더 이상의 사고의 진전을 보이지 못하고 맴돈다. 이 경우 그녀가 견지하는 시점은 곧 그녀의 입장이고 태도이다.
'바리데기공주 설화'에 내장되어 있는 불교적 윤회관은 남성과 가부장적 제도에 부합되는 순응적 여성상을 생산하는 작동기제이다. '한진옥'은 '힘'과 '자유'를 역설하고 이어 그녀가 평생 '그의 여자'였음을 굳이 고백하는 순정의 모습을 보인 후 '바리데기 공주'를 쳐든다. 문자― 황진이―바리데기공주의 순환은 위태롭다. 그 어디에도 여성이 주체적으로 행복을 개척한 지경은 없다. 있다면 '운명의 꽃'을 피우듯 견디어 내는 것일 뿐이다. 세속의 속악한 논리와 이기를 모두 초월한 듯한 과장의 포즈! 부취의 동성애적 포즈를 통한 젠더 허물기가 이미지의 관념에 불과했듯 서영은의 고독과 절망은 현실적 개선의 여지를 보이지 않고 쉽사리 찾을 대안도 없는 듯하다. 그래서 그녀의 소설은 결단만을 남겨 놓은 듯 보인다. 그러나 절망의 끝에서 '눈(내면)'이 열리듯 대안이 있을 것도 같다.
5. 향락의 전이와 경계
서영은은 자신의 첫 장편인 '그녀의 여자'를 일컬어 '삶의 페허에서 벌인 굿'이라 하였다.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이 말은 작품 해석의 증요한 단서가 된다. '굿'은 '해원(解寃)'을 향한 '이별의식'인 법. 이 소설에 이르러 그녀는 죽어, 다시 태어난다.
남편을 잃고 실의에 빠져있던 중년의 여성 '현석화'는 마치 운명처럼 아들의 친구이자 연인인 '나'(방소연)를 만난다.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끌려 그녀들의 관계는 동성애적 코드로 변주된다. 이에 '현석화'는 그녀의 전부를 내어줄 듯 '나'를 향한 끝없는 집착을 보이나 '나'는 그녀를 건너 첫사랑 남성과 재회를 꿈꾼다. 더 이상의 출구를 찾지 못한 '현석화'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현여사'는 '소연'을 처음 만나면서 '자기 영혼이나 살의 일부를 얻은 것'같은 충격과 '존재의 충만한 포개짐, 성의 오르가슴을 넘어서는 그 무엇'과도 같은 운명적인 예감에 사로잡힌다. '소연'은 '양질의 진흙'으로, '현석화'가 직면하길 두려워하는 '젊음'이자 '가능성'이다. '소연' 역시 '현석화'에게 강력하게 이끌린다. 그녀는 '강인하고 억센 힘'과 '나이와 성별이 사라진', '섬뜩한 무기(巫氣)'를 갖추고 있으며 상대를 '압도'하는 마력을 지녔다. 무능력한 아버지와 오빠로 인해 평생 고생만 하고 살아온 어머니에게 '힘있고 늠름한 아들 같은 딸'이 되고자 욕망하는 '소연'에게 그녀는 그녀가 지향하는 미래적 자아의 표상이 된다.
지금껏 '연민'과 '사랑'의 동일시로 이어지고, '동성애적 포즈'로 젠더의 경계를 관념적으로 넘나들던 작가의 우애적 여성연대는 이곳에 이르러 위반의 장인 '동성애'(Lesbianism)로 치닫는다. 그러나 '그녀의 여자' 역시 동성애라는 하나의 기호로 집약하기엔 그 출발에서부터 어긋나 있다. 동성애가 되기 위한 기본전제는 이성애를 배제하고 동성간에 부부 혹은 연인이 되고자 하는 결단의 의기투합이 아닌가. 그러나 두 사람의 입장은 서로 다르다. '현석화' 편에서 관계는 '존재에 대한 영육의 물음'이라 전제된다. 그녀에게 육체적 향락의 덧없음은 이성애의 환멸에 기인한다. 그녀는 '소연'을 통해 '절대적 사랑'을 찾고자 한다. '소연'의 경우 관계는 동경과 연민의 몽롱하고 애매한 상태에서 시작된다. 그녀는 아직 '여자끼리도 결혼하는 줄 알았던' 사춘기 시절의 사랑과 동경을 지니고 있다.
'현석화'는 자신의 경제력을 동원하고 감정의 절박함을 사랑의 절대성이란 명제와 일치시킨다. '소연'은 그녀가 그럴수록 그녀의 감정을 진단하고 즐기는 정신적 여유 속에서 우위를 견지한다. 이러한 가운데 이들은 파국적인 새도-매저키즘적 관계에 놓이게 된다. '현석화'는 '소연'의 시간과 마음, 그녀가 만나는 사람들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간섭한다. 그녀에 속한 모든 것을 소유하려 들고 그녀의 미래와 기회마저 봉쇄하려 한다. 이러한 '현석화'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공포의 권력자'이다. 주체할 수 없는 그녀의 행동은 '죽은 남편의 방식'을 닮았다. 의처증이 있던 남편은 나이가 들면서 그녀를 잠시도 자기 곁에서 떠나지 못하게 했고 서로 뒤엉켜 싸우다 격렬한 정사를 반복했다.
그녀가 남편이 자신에게 줄 수 없었던 사랑의 절대성을 '소연'에게 주겠다고 했으나 진작 그녀가 줄 수 있는 것은 물질과 '소연'이 원치 않는 성적 관계이다. 그녀의 성애는 그녀의 것이 아니라 남편이 그녀에게 주었던 향락의 '모방'이다. 그녀는 페니스 중심의 섹스에 길들여져 있다. 놀랍게도 '클리토리스'를 모르는 '현석화'는, 남성 중심의 야만 사회에서 남근 중심의 향락만을 알도록 하기 위해 클리토리스를 할례했던 의도된 무지와 닮아있다. 이래서 '현석화'의 불안은 이중으로 겹쳐진다.
그렇다면 그녀는 무엇을 알고 있었던가. 그녀가 발화하는 '진실' '절대' '영원한 사랑'은 무엇인가. '남편'의 방식을 사는 그녀에게 그녀는 그이고, 그녀는 '소연'이다. 그녀는 그에 동일시되어 그녀 자신인 '소연'을 붙들고 있는 것이다. 이는 명백한 전이이다.
이러한 점에서 '현석화'의 욕망과 '소연'의 그것은 궁극적으로 만날 수 없다. 이러한 욕망 사이의 불균형으로 '현석화'는 점점 자신의 제물이 되어간다. 이는 그녀가 믿고 있는 사랑의 절대성이 서로간의 풍요와 확신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 휘둘린 음습한 감정적 혼돈이라는 것을 자인하는 것이다. 마침내 '소연'은 두 사람의 감정적 긴장 상태, 권력 관계를 완전히 내려놓으려 한다.
'소연'은 '지훈'에 이어 '김민서'라는 남성에 의해 프로포즈를 받는다. '현석화'와의 관계가 부끄럽고 혐오스럽게 인식된 것은 '소연'의 첫사랑이자 '잘생긴 성공한 남자'인 그를 우연히 다시 만나면서이다. 그가 던지는 빛과 강렬한 매력은 완전하다. '현석화'와 '소연'의 관계는 더 이상 진전되지 않는다. '소연'은 그녀와의 관계를 명쾌하게 '풋정열'?'청춘을 낭비한'?'모멸'로 정리한다. 이리하여 '소연'은 동성애적 공포, 무엇보다 결락을 번연히 알면서 지속되어야 하는 '진정의 파시즘'을 넘어 불안하나 다양하게 열려있는 가능성을 찾아 몸을 튼다.
'현석화'는 꿈속에서 성공과 권위를 상징하고 자신의 존재를 증명·과시하듯 거실에 걸려있던 '자식같은' 오백호 대형 그림을 박살낸다. 이어 자살한다. 그리고 그녀는 무관을 원하는 사람들에 의해 묻혀진다. 마치,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기에 떠돌았으나 다시 그대로 돌아왔던 포(Poe)의 '도둑맞은 편지'처럼 '어머니'로 마무리 된다. 그녀는 죽음으로 표피적인 성공을 거둔 듯하다. 그러나 '현석화'의 죽음은 간단하지 않다. 이는 이것이 서영은 소설의 새로운 지평을 예고하는 서막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먼저, 지금껏 유예되었던 '그녀'의 '자살'이 끝내 실행되었다는 의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혹자는 그녀의 자살을 몰락/추락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이는 표피적 해석이다. 나는 이를 '해방', '구원'이라 해석한다. 이미 살폈듯이 주변과 경계(境界)에 있는 서영은의 여성들은 정체의 장애로 침묵하고 도피하거나 아니면 힘과 자유를 역설하며 모든 고통을 초월한 듯한 포즈를 힘겹게 견지한다. 그러나 끝내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다. 그저 주어진 그녀들의 기호에 맞춰 순응할 뿐이다. 이것이 앞에서 살펴본 그녀들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 소설에 이르러 작가는 파격적이고 일탈적인 동성애적 코드를 통하여 '힘있고 카리스마 넘친' 남성보다 나은 여성 '현석화'를 창출한다. 물론 그녀를 통하여 남성들이 주지 못한 풍요와 사랑의 절대성을 찾을 수 있는 듯하다 끝내 좌절한다. 그것은 그녀가 돌이킬 수 없이 그녀의 남성에게 익숙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행위가 그를 '모방'하는 도착이었음을 깨닫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녀는 죽음 직전에 '소연'의 눈을 통해 자신의 실체를 확인한다. 그녀의 '자살'은 이러한 인식에 기반한 존재의 결단이다. 즉 남성의 망령에서 벗어남을 상징하는 실천적 행위의 의미로 볼 수 있는 것이다.
환멸을 '미리 안 자'는 매저키스트가 되고 끝내 그 결말이 절망일 때 위치를 바꿔 새디스트가 된다. 그래서 그 끝에서 가해자와 피해자간의 기묘한 '일치'를 우리는 목도한다. 이는 드러난 단순 모방이 목표가 아님을 의미하며 그것이 불행을 지나 자기들이 모방할 '강력한 존재'를 찾는다는 데 있음을 말해준다. '소연'에게 자신의 몸에서 '아브젝시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