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세상] 쾌락의 혼돈/ 티모시 브룩
'四季'로 풀어쓴 명나라의 부침
1634년 여름,장 니콜레는 중국시장으로 가는 항로를 찾기 위해 프랑스령 퀘백을 출발해 오대호로 향했다. 중국이 대서양 너머에 있다고 확신한 것. 지금으로선 우스꽝스럽기만 한 탐험은 그러나 '16세기 세계의 중심이 유럽'이라는 상식을 되짚어보게 한다. 당시 유럽이 남아메리카에서 약탈한 은을 기반으로 무역에 나섰을 뿐,생산품을 가지지 못했던 반면 중국은 비단과 도자기,향료 등을 생산하고 화려한 문명을 꽃피우며 유럽인들을 유혹했다. 그 때문에 이 시기 유럽의 모험가들은 중국으로 가는 최단거리 항로를 발견하려고 경쟁했다. 이 시기 세계의 중심은 유럽이 아니라 중국,즉 명(1368~1644)나라인 셈이다.
중국사학자 티모시 브룩(현재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 아시아연구소 중국학과장)이 쓴 '쾌락의 혼돈'(이정·강인황 옮김/이산/1만8천원)은 그 중심에 대한 초상이다. 책은 2000년 하버드대학의 레벤슨 상 수상작으로 명나라에서 상업이 차지한 위치와 그로 인한 문화적 '쾌락',또 그것이 불붙인 '혼돈'을 당대의 지방지와 논설,비문,서간문 등의 자료를 통해 거시적으로 추적했다. 전기(겨울),중기(봄),후기(여름)와 멸망(가을)의 사계로 나누어서 말이다.
명의 부침을 계절에 빗댄 것은 명 말기 난징 남쪽 서현의 관리였던 장타오(張濤)다. 그는 1609년 편찬한 지방지에 명조의 사계에 대한 글을 남겼다.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만족했다. 살 집이 있고,경작할 땅이 있었으며,땔감을 마련할 수 있는 산이 있었고 김을 맬 채소밭도 있었다.'(겨울) '장사꾼이 이미 많아지고 전토(田土)는 중시되지 않아서 자산을 가지고 다투거늘 흥망은 예측할 수 없다.'(봄) '상업으로 부를 이룬 사람이 많아지고 농사를 지어서 부를 얻는 사람은 드물어졌다. 부자는 더욱 부유해지고 빈자는 더욱 가난해졌다.'(여름) '부자는 백에 하나,빈자는 열에 아홉이다. 금령(金令·상업)은 하늘을 맡고 전신(錢神)은 땅에 우뚝 섰다.'(가을)
그는 명조 초기가 농경사회의 안정성 덕분에 고요한 겨울날 같았다면 중기는 투기적인 상업이 판치는 바람에 시끌벅적한 봄이 됐다고 비판한다. 이 같은 상업의 발전이 번화함이 물결을 이루고,사치가 언덕과 계곡을 메우는 여름(후기)으로 이어지면서 계급갈등과 빈부격차,도덕적 부패와 타락을 가져와 참혹한 가을(왕조의 몰락)을 예고하고 있다는 것.
유일한 치유책은 '관문을 폐쇄하여 상인들이 돌아다니는 것을 막는 정책을 수립하는 것'뿐이라던 그는 명 태조가 다스린 시기를 이상사회로 여겼다. 남자는 곡식을 재배하고 여자를 베를 짜던 자급자족적인 농경사회로 백성들의 이동이 금지되던 그 때 말이다.
그러나 이 같은 정책 덕분에 농작물의 생산은 늘어났고 이는 잉여 농작물을 거래하기 위한 상업의 발전을 촉진했다. 게다가 통치를 위한 교통통신 수단에 많은 투자를 한 결과,일상용품의 유통까지 용이하게 될 정도로 인프라가 구축됐다. 어느덧 상선은 정부의 세수 물자를 실어 나르는 배와 같은 운하를 통해 이동했고,상인들은 정부가 역전에 이용하는 길을 따라 여행했다. 대세는 이렇게 상업화로 기울어졌다.
오죽했으면 중국 기행문인 '표해록'을 쓴 조선 선비 최부(崔溥)가 요란한 상업도시 항저우에 처음 도착해 내뱉은 일성이 '완전한 별천지로다'였을까.
이 같은 상업의 발달은 문화생활에도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인쇄술의 발달로 기술서는 물론 점술책과 정전 등 온갖 종류의 책이 생산됐고,오늘날의 출판단지 같은 출판 전문지역도 여러 곳 생겨났다. 학자나 애서가들은 책 만 권을 소유하고픈 욕심을 굳이 자제할 필요가 없었고,사설 도서관은 3만,4만의 장서를 자랑했다. 심지어 5만 권의 책을 소장한 곳도 있었다. 말을 가려서 조심스럽게 표현한 정부문서에 만족하지 않는 식자층의 요구에 따라 상업적인 신문도 만들어졌다.
또 명대엔 상인들의 과시적인 예술품 구매와 이들을 경멸한 신사층의 예술적 심미안,직물생산이 뒷받침하는 도시의 유행과 자연경관과 명승고적을 찾아다니는 여행광의 출현을 거쳐 매춘업의 호황과 낭만적인 연애의 개념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의 산물들이 모두 존재했다.
이 같은 변화에 대해 장타오와 같은 신사층은 '말세'라고 개탄했지만 많은 이들은 상인행세를 하며 명청 교체기의 격변기에 살아남았다. 안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아는 것이 없었던 명대의 속내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김아영기자 yeong@busa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