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양성 함락되던 역사적 순간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신당 연합군 평양성 포위 고구려 보장왕 백기 투항

평양 금수산에 위치한 평양성 유적의 을밀대로 6세기 중엽에 건립되어 조선 숙종 때 중건되었다.

고구려의 멸망에 대해서는 연개소문 아들들의 권력싸움을 이야기하며 내재적 원인에서 찾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침략 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살수대첩을 비롯해서 고구려가 수·당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고구려가 단결되었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그렇다고 왕조의 멸망을 안에서만 찾을 수는 없다.

보장왕 27년인 668년에 고구려는 신당(나당) 연합군에게 평양성을 빼앗기며 멸망하였다. '삼국사기'가 전하는 고구려 왕실의 최후 모습은 이러했다. "보장왕27년 가을 9월…(당나라) 글필하력(契苾何力)이 먼저 군사를 이끌고 평양성 아래에 이르니 이적의 군사가 이를 잇따랐다.

평양을 포위한 지 한 달이 넘었다. 고구려왕 (보)장(臧)이 천남산(泉男産)을 보내어 수령 아흔여덟 명을 거느리고 흰 기를 가지고서 이적에게 항복하니 이적은 예절을 갖추어 이들을 접대했다." 그럼에도 연남건은 성문을 닫고 지키면서 자주 군사를 보내어 당군과 싸웠으나 모두 패전하였다.

그러나 남건으로부터 군사 일을 위임받은 중 신성(信誠)은 이적에게 사람을 보내어 서로 밀통하여 닷새만에 성문을 열어 주고 말았다.

이때에 남건은 제 목을 찌르며 자결하려 하였으나 죽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왕과 남건 등은 당으로 끌려가 당 고종의 명에 따라 당 태종이 묻힌 소릉(昭陵)에 바쳐지는 제물의 역할을 감당하기도 하였는가 하면,당에 협조하던 연남생 등은 벼슬을 후히 받기도 하였다.

반면에 연남건은 검주(黔州)로 귀양 보내졌으며 평양에는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가 설치되고 그 우두머리 안동도호에는 설인귀가 임명됐다.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

    실시간 핫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