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언의 한문 새로 보기] 당나귀 벤자민
나이가 들면 매사가 시들해지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다. 『수신기(搜神記)』같은 도교계 소설이나 설화에는 자칭 도사나 신선 지망생이 대거 등장하는데, 대개가 오랜 세월 연단술(煉丹術)을 익혀 일체의 정욕을 끊고 청수(淸秀)해진 몸으로 어느 날 우화등선(羽化登仙)했다는 스토리다. 정말일까? 나이 들면 정욕이 쇠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연단술을 한답시고 끓인 수은을 계속 흡입한 결과 중독증세로 삐쩍 말라 몽롱해진 상태이니, 하늘로 날아올랐다고 착각하기가 십상이다. 그러다가 발을 헛디뎌 골짜기에 추락했을 것이니, 종적을 감추었다는 말이 하나도 이상한 게 아니다.
스탈린의 전제적 공산주의 체제를 비판한 조지 오웰의 우화 『동물농장』에서 가장 흥미로운 캐릭터는 당나귀 벤자민이다. 동물 중 가장 나이가 많은 그는 세상사에는 도무지 웃을 일이 없기 때문에 웃지 않는다는 까탈스런 성격의 소유자다. 악마같은 주정뱅이 주인을 몰아내고 세계 최초로 동물 혁명을 달성했을 때도 들뜨지 않았고, 교활하고 잔인한 돼지 나폴레옹이 온갖 감언이설을 떠벌일 때도 그만은 속지 않았다. 숙명과도 같은 이기심과 탐욕이 우리 마음에 도사리고 있는 한 유토피아는 결코 찾아오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루의 피로를 씻고자 찾아드는 주막마다 온통 선거 이야기다. 소주 한 병 쯤 들어가면 이런 전쟁 마당이 없다. 인간 속에 내재된 편 가르기 심성은 죽어도 사라지지 않는 끈질긴 것임을 동양에서는 구양수가, 서양에서는 마키아벨리가 이미 논한 바 있다. 굳이 싸우더라도 사십년 지기가 하루아침에 결별하는 일은 없어야겠다. 벤자민의 눈으로 보자면 그 놈이 그 놈이요, 세상 바뀔 일도 별로 없다. 그저 히틀러나 스탈린이 등장하지 않으면 족하다.
요즘 뜨는 임금 정조(正祖)가 "우리나라 시로는 단지 그의 시를 알 따름이노라"고 격찬했던 눌재(訥齋) 박상(朴祥). 사림파의 리더였던 그는 젊은 시절 훈구파를 향해 "숫살무사 내 왼쪽서 노리고 있고 / 늙은 올빼미 오른쪽서 엿보고 있네. / 양두사(兩頭蛇) 내 앞에 똬리 틀고 / 구미호 내 뒤에 웅크렸다네."라고 저주를 퍼부었다. 그러나 숱한 시련을 겪고 난 후 나이 든 그는 이렇게 읊었다. "호젓이 숲에 깃들어 찾는 이 드무니 / 세상 벗어난 곳에서 뭐하러 괜시리 시비 따질고." 동아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