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일영화상] 영화인이라면 누구나 꿈꿨던 최고 권위의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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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상식 스타 보기 위해 팬 몰려 경찰 동원

부일영화상이 역사성, 작품성, 공정성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아 제17회로 부활한다. 사진은 부일영화상 시상식 안팎의 풍경과 극장 밖 팬들의 행렬, 공정성으로 정평이 났던 심사 현장. 부산일보DB

탄생, 그리고 의미

△"오직 영광이 전부인 꽃다발과 상패를 받으러 국내 수상자 전원이 항도 부산에 내려왔고…"(1958년 3월 28일자 제1회 부일영화상 시상식 기사 중)

1958년 3월 27일 부산 중구 중앙동 국제극장에서 열린 제1회 부일영화상은 모두 11개 부문을 시상했다. 작품상, 감독상, 남녀 주연상 외에 특이하게 외국영화에도 작품상, 감독상, 남녀주연상을 주었고, 우수극장과 수입사도 선정해 영화산업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2회부터는 각본, 촬영, 미술, 음악 등 스태프 부문을 더했고, 1966년 9회 때는 남녀 인기상도 신설됐다. 인기상 단골 수상자는 윤정희(4차례), 신성일(3차례) 등이었다. 수상자는 춤, 노래 등 장기자랑도 선보였다.

숱한 거장 감독과 은막의 스타들이 부일영화상을 거쳐갔다. 유현목 감독은 '잃어버린 청춘'으로 1회 작품상과 감독상을 수상하는 등 5차례나 감독상을 안았다. 김기영, 김수용, 정소영, 정진우 감독도 2차례씩 트로피를 가져갔다. 남녀 주연상은 김진규가 5차례, 최은희가 3차례 받았다. 시상식에는 국내 수상자들이 전원 참석했고, 스타를 보기 위해 몰려든 팬들 때문에 경찰들이 동원됐다. 수상자들은 '카퍼레이드'를 벌이기도 했고, 시상식은 동양TV, 부산MBC 등으로 중계됐다.

△"말하자면 영화는 가장 대중적인 문화재이기 때문이다."(1958년 1월 29일자 부일영화상 제정을 알리는 사설 중)

1940년대 말 편집국 내에 독립된 부서의 하나로 영화부를 두었고, 1953년 8월 획기적으로 '영화평'란을 신설했던 본보의 영화에 대한 애정은 부일영화상의 배경이었다. 특히 본보 문화부장 허창도(필명 허창)의 '영화평'은 1958년 10월부터 1969년 7월까지 10년이 넘게 연재됐다. 그의 날카로운 평론은 애독자가 많았고, 흥행을 좌우할 정도로 영화계에 미치는 영향력도 컸다. 박두석 당시 본보 논설위원과 허 부장은 1958년 3월 20일 장갑상, 이주홍, 김일구 등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창립보다 7년이나 앞서 부산영화평론가협회를 발족하는데, 이들은 부일영화상의 산파이자 심사위원으로도 활약했다.

1950년대 임시수도의 문화적 유산을 배경으로 전쟁 이후 별다른 오락거리가 없던 젊은이들의 영화 사랑과 열악한 조건에서 더욱 뜨거웠던 영화인들의 열정은 1960년대 한국영화의 황금기와 부일영화상의 전성기를 함께 이끌었다. 영화예술의 미래를 앞서 내다보고 빛나는 순간들을 치열하게 기록했던 부일영화상은 그러나 70년대 텔레비전이 등장하고 문화예술정책이 서울 중심으로 집중되면서 1973년 제16회를 끝으로 문을 닫는다.

부산영화평론가협회 회원으로 활동했던 이용관 부산국제영화제 공동집행위원장은 "부일영화상은 국내 최초의 영화제로 지역에서 16회나 이어진 정통성 있는 상, 어떤 입김도 작용하지 않는 공정한 심사로 영화인들이라면 누구나 선망하는 권위있는 상이었다"고 했다.

최혜규 기자 iwill@busanilbo.com


'여우주연상 3회' 최은희씨 - "상 부활 소식 너무너무 반가워요"

"정말이에요. 그런데 어쩌나. 난 트로피가 하나도 남은 게 없는데…."

원로 영화배우 최은희(79) 여사는 부일영화상 부활 소식에 소녀처럼 반가움을 금치 못하면서 이렇게 상패 이야기부터 꺼냈다. '지옥화'(2회),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5회),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9회)에서 열연한 최 여사는 여우주연상을 무려 3번이나 품에 안은 부일영화상 최다 수상자이자 당대 인기 여배우였다.

"아시다시피 내가 온갖 난리를 다 겪었고 지구를 한바퀴 돈 인생을 살았잖아요. 일제치하와 6·25 전쟁, 그리고 1978년 북한에 납치돼 8년을 지냈고…. 그러니 큰 궤짝 2개가 넘치도록 받았던 트로피들이 온전히 남아 있겠어요."

고전적 미색의 대표적 여배우였던 최 여사는 최초의 영화상이었던 부일영화상 수상 당시를 떠올렸다. "그때는 서울에서 침대차를 타고 밤새도록 달려 부산에 내려갔죠. 시상식장 주변은 그야말로 인산인해였어요. 특히 어린 아이들이 배우들 옷을 잡아 당기거나 허벅지를 꼬집는 등 많이 수난을 당했죠. 은막의 스타들 보기가 귀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죠."

피란살이를 하는 등 부산과의 깊었던 인연도 최 여사는 빼놓지 않았다. "지금까지 '성춘향' '빨간 마후라' '열녀문' 등 130여 편의 작품에 출연했어요. 그중에는 부산에서 촬영한 작품이 꽤 돼요. 당시 영화촬영을 하면서 다리를 들어올렸던 영도다리, 인파로 넘쳤던 국제시장, 풍광이 뛰어난 해운대도 자주 찾았죠."

지난해 겨울 낙상사고를 당해 몸이 다소 불편함에도 최 여사는 요즘 2년 전 작고한 남편 신상옥 감독 추모 사업 준비로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근황을 전해줬다. "아픈 몸을 이끌고 백방으로 뛰어다녀 지난 6월 문화부로부터 사업승인이 떨어져 내 작은 소망이 이뤄졌어요. 신상옥기념관은 충북 괴산에 짓기로 양해각서를 체결해 추진 중입니다." 김호일 선임기자 tokm@


이모저모 - "우리나라 영화상 효시… 옛 명성 되찾길"

○…"지금도 내 방에는 부일영화상 때 받은 상패를 잘 모셔놓고 있어요." 영화인 출신 첫 예술원 원장인 김수용 감독은 1966년 9회 부일영화상에서 '갯마을'로 최우수작품상, 감독상, 여우조연상 등 무려 7개 부문을 휩쓸었고, 11회 땐 '안개'로 감독상을 수상했다. "당시 영화상을 받기 위해 서울에서 밤차를 타고 내려가 호텔도 아닌 여관에서 잠을 잤다"고 그때 그 시절을 떠올린 김 감독은 "부산은 한국영화의 발상지나 다름없는 곳"이라면서 "우리나라 영화상의 효시인 부일영화상이 어렵게 부활되는 만큼 분명한 색깔을 갖고 공정한 심사를 통해 옛 명성을 되찾기 바란다"며 조언을 곁들였다.

○…"당시 배우들 보기가 힘들었던 시절이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극장 앞에서 배우들이 탄 자동차를 얼마나 흔들고 밀쳐댔는지 혼쭐이 났죠." 부산 출신 당대 최고 여배우 고은아 씨는 1966년 9회 신인상, 이듬해인 1967년 10회 인기여우상을 수상했다. 고 씨는 "전쟁을 겪고 난 뒤 물자가 귀한 시절이라 그랬는지 양복지 같은 옷감을 부상으로 주더라"며 환하게 웃었다.

○…"당신이 보내주신 훌륭한 상패는 저의 방 한가운데에 장식했습니다." '혁명아 사바타'로 1961년 4회 부일영화상 감독상을 받은 엘리아 카잔 감독이 본보에 보내온 편지가 그해 11월 18일자 본보에 실렸다. "저는 언어를 달리하는 딴 민족으로부터 글을 받았을 때는 언제나 영화에서 제가 표현하려고 한 것에 대한 비평에 유달리 '스릴'을 느낍니다." '에덴의 동쪽'으로 유명한 엘리아 카잔 감독은 1971년 14회 때 '열망'으로 또 한번 작품·감독상을 받아 외국인으로서는 최다 수상자가 됐다. 김호일·최혜규 기자



# 역대 주요 부문 수상작

제1회(1958)

작품상 잃어버린 청춘(조광영화사)

감독상 유현목(잃어버린 청춘)

남우주연상 김승호(시집 가는 날)

여우주연상 주증녀(실락원의 별)

외국영화작품상 길

제2회(1959)

작품상 인생차압(삼성영화사)

감독상 유현목(인생차압)

남우주연상 김승호(인생차압)

여우주연상 최은희(지옥화)

외국영화작품상 목노주점

제3회(1960)

작품상 십대의 반항(협이영화사)

감독상 김기영(십대의 반항)

남우주연상 김진규(비극은 없다)

여우주연상 조미령(십대의 반항)

외국영화작품상 저항

제4회(1961)

작품상 로맨스 빠빠(신상옥 프로덕션)

감독상 이성구(젊은 표정)

남우주연상 김진규(박서방)

여우주연상 문정숙(흙)

외국영화작품상 사랑과 죽음의 마지막 다리

제5회(1962)

작품상 사랑방손님과 어머니(신상옥 프로덕션)

감독상 신상옥(사랑방손님과 어머니)

남우주연상 김진규(성춘향)

여우주연상 최은희(사랑방손님과 어머니)

외국영화작품상 태양은 가득히

제6회(1963)

작품상 아낌없이 주련다(극동흥업)

감독상 유현목(아낌없이 주련다)

남우주연상 신영균(연산군)

여우주연상 이민자(아낌없이 주련다)

외국영화작품상 콰이강의 다리

제7회(1964)

작품상 고려장(한국예술영화사)

감독상 김기영(고려장)

남우주연상 신성일(가정교사)

여우주연상 황정순(혈맥)

외국영화작품상 로베레 장군

제8회(1965)

작품상 잉여인간(한양영화공사)

감독상 유현목(잉여인간)

남우주연상 김진규(벙어리 삼룡)

여우주연상 김혜정(아내는 고백한다)

외국영화작품상 태양은 외로워

제9회(1966)

작품상 갯마을(대양영화 주)

감독상 김수용(갯마을)

남우주연상 신성일(흑맥)

여우주연상 최은희(청일전쟁과 여걸 민비)

외국영화작품상 쉘부르의 우산

제10회(1967)

작품상 만추(대양영화사)

감독상 이만희(만추)

남우주연상 신영균(물레방아)

여우주연상 문정숙(만추)

외국영화작품상 알라바마에서 생긴 일

제11회(1968)

작품상 산불(태창흥업)

감독상 김수용(안개)

남우주연상 박노식(안개꽃 필 무렵)

여우주연상 주증녀(산불)

외국영화작품상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제12회(1969)

작품상 카인의 후예(동양영화흥업 주)

감독상 정소영(미워도 다시 한 번)

남우주연상 김진규(카인의 후예)

여우주연상 문희(카인의 후예)

외국영화작품상 남과 여

제13회(1970)

작품상 독짓는 늙은이(동양영화흥업 주)

감독상 정소영(잊혀진 여인)

남우주연상 황해(독짓는 늙은이)

여우주연상 전계현(잊혀진 여인)

외국영화작품상 사운드 오브 뮤직

제14회(1971)

작품상 동춘(우진필름)

감독상 정진우(동춘)

남우주연상 남궁원(필녀)

여우주연상 윤정희(첫경험)

외국영화작품상 열망

제15회(1972)

작품상 분례기(태창영화사)

감독상 유현목(분례기)

남우주연상 이순재(분례기)

여우주연상 김지미(옥합을 깨뜨릴 때)

외국영화작품상 올리버

제16회(1973)

작품상 석화촌(우진필름)

감독상 정진우(석화촌)

남우주연상 김희라(석화촌)

여우주연상 윤정희(석화촌)

외국영화작품상 프렌치 코넥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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