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間] 우생순 신화 전 핸드볼 국가대표 허순영
내 생애 최고 순간은 지금 여기 부산…
안녕하세요. 허순영입니다. 이렇게 인사드리면 제가 누군지 잘 모르시겠죠. 그럼 이렇게 다시 인사드릴게요.
안녕하세요. '우생순' 주인공 허순영입니다. 이제 이해하시겠어요. 3년 전에 임순례 감독이 만들어 갑자기 화제가 됐던 영화 있잖아요. 
거기에서 배우 김지영 씨가 맡았던 정란이라는 선수가 바로 저래요. 영화가 개봉됐을 때 저는 덴마크 프로팀에서 뛰고 있었거든요.
처음에는 몰랐는데 나중에 사람들이 전화를 하더라고요. '너희들 이야기가 영화로 만들어졌다'. 그래서 DVD를 구해서 봤죠.
두 번을 봤어요. 처음에는 아무런 감흥이 없더라구요. 그런데 이게 웬일이에요. 두 번째 영화를 보는데 눈물이 펑펑 쏟아지는 거예요.
나도 모르게…. 물론 영화니까 실제 우리 이야기하고는 많이 달라요. 재미있게 만들기 위해 각색을 많이 했더라고요.
우생순 신화 전 핸드볼 국가대표 허순영
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대구시청에 입단했죠. 그 이후 객지생활만 계속했어요. 외국에도 4년이나 나가 있었고요. 그러다가 올해 초에 다시 부산으로 돌아왔습니다. 해운대구 반여동에 있는 인지중 여자핸드볼부 코치를 맡았죠.
이래서 세상은 돌고 돈다고 하나 봐요. 제가 맡은 인지중 핸드볼팀이 완히 '우생순'이에요. 이 팀을 처음 맡고 보니까 정말 눈앞이 캄캄하더라고요. '내가 잘한 짓일까' 라는 생각도 들고. 아직도 우리 팀은 제대로 된 팀이 아니에요. 더 많이 가르치고 더 많이 훈련시켜야 해요.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아요.
나를 키운 건 땀·눈물 그리고 훈련
실업팀서 죽어라 뛰다 보니 어느새 국가대표
시드니 땐 메달 못 따 '그만둘까' 생각도
아테네 올림픽 준우승 두고 두고 아쉬워
어린 애들을 가르치다 보니 제 어릴 때 생각이 납니다. 저는 원래 경남 진주에서 태어났어요. 출생하고 이틀 만에 부산으로 이사왔대요. 그래서 어른들은 저보고 "네 고향은 부산이다"라고 해요. 처음에는 동래에서 살았는데 아버지 건강이 나빠져서 공기가 좋은 강서로 다시 이사갔어요. 그때 우리 가족은 아버지, 어머니 하고 형제가 1남5녀였어요. 제가 장녀구요. 부모님이 딸만 계속 낳다 아들 하나 만들려다가 결국 성공하셨다나.
저는 대저동에 있는 배영초등에 들어갔어요. 4학년 때 지금은 은퇴하신 이덕도 선생님이 핸드볼팀을 만든다고 하시더라구요. 저도 어떻게 하다보니 뽑혔어요. 그때는 몰랐는데 부모님께서 제가 핸드볼 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은 이유가 있었어요. 제가 운동을 잘 하면 부산 시내에 있는 중학교로 진학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운동을 시켰답니다.
그때 저는 핸드볼을 잘하지 못했어요. 주례여중에 진학했는데 중학교 때도 그다지 뛰어난 선수가 아니었어요. 그래서 주전으로 뛰지도 못했죠. 확실한 포지션도 없었고. 그래서 울고불고 하던 기억이 나네요. 당시 부산에는 주례여중 외에 여자중학교 핸드볼 팀이 4개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우리 학교는 3~4등을 했으니 거의 꼴찌 팀이었죠.
그러다가 부산진여상에 진학했어요. 중학교 때 동기 5명이 같이 갔는데 저는 사실 얹혀간 거나 마찬가지에요. 운동하는 사람 말로는 '삐꾸'죠. 처음에는 '고등학교 간 뒤에는 운동 그만 두고 공부나 해야지' 하고 생각했답니다. 그때만 해도 부산진여상이 전국적으로 유명하고 취직도 잘 되는 명문학교였거든요. 집이 넉넉하지 못했기 때문에 돈을 벌어 동생들 학비를 대야지 하는 생각을 했죠.
그런데 일이 뜻대로 안되더라구요. 당시 감독이 지금 부산핸드볼협회 전무 하시는 이상효 선생님이었어요. 아, 그 왜 아시죠. 88서울올림픽 때 남자 핸드볼 은메달 주역 있잖아요. 이 감독님이 첫 날 선수들을 불러놓고 "지금 이름 부르는 애들은 운동 그만 하고 교실에 가서 공부나 해라" 하시더라구요. 그래서 저는 제 이름도 부르실 줄 알았죠. 그런데 끝까지 저를 안 불러요. 이 분이 왜 이러나 했어요. 용기를 내서 감독님에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저는요" 하고 여쭤봤죠. 그랬더니 감독님이 화를 내시면서 "너는 운동 해" 하시잖아요. 눈앞이 캄캄했어요. 그때 이 감독님이 "너도 교실에 가" 하셨으면 지금 제 인생은 어떻게 변했을까요.
감독님이 그때 저에게 피봇 자리를 맡기시더라구요. 농구로 치면 센터 비슷한 자리죠.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피봇은 키작고 재빠른 선수들이 맡는 게 일반적이었어요. 그런데 키가 크고 덩지도 큰 제가 피봇을 맡은 거죠. 상당히 파격적인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못해도 장래성이 있다고 그렇게 시켰대요.
고교 때 이 감독님이 제게 붙여주신 별명이 뭔지 아세요. 빠삐용이랍니다. 주인공이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다가 늘 탈옥을 꿈꾸는 영화 제목이잖아요. 번뜩 감이 오시죠. 맞아요. 저는 운동 하기 싫어서 고교 때는 늘 도망 다녔죠. 우리끼리 도망가면 숨어서 놀던 아지트도 있었어요. 오죽하면 이 감독님이 고 3 때 저를 주장 시켰겠어요. 주장 시키면 책임감이 있어 도망 안 가겠지 하셨나 봐요.
제가 다닐 때 부산진여상은 성적이 별로 안 좋았어요. 고 1때 전국체육대회에 나가서 당시 전국 최강이던 선화여상과 붙은 기억이 있어요. 10점 이상 차이로 깨졌죠. 이겨본 기억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그리고-사실 이런 말 하면 안 되는데-그때 참 많이 맞았어요. 어떤 때는 너무 많이 맞아 '내가 맞았는지 안 맞았는지' 할 정도로 정신이 없을 때도 있었어요. '우생순'에 보면 선수들이 공으로 머리 맞는 장면 나오잖아요. 그 장면 보면서 옛날 생각 참 많이 했어요. 요새는 교육청 등에서 폭력 근절을 많이 강조합니다. 때리면 애들이 운동을 안 하려고 해요. 세상이 많이 바뀌었죠.
제가 고 3때 투병 중이던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순영이 네가 국가대표 되는 거 보는 게 내 꿈이었는데" 하시면서요. 나중에라도 국가대표가 됐으니 아버지 소망을 이뤄드린 셈이죠.
고교를 졸업하고 처음에는 종근당에 입단하려고 했어요. 그때 종근당 감독님이 임영철 선생님이셨어요. 나중에 국가대표팀 감독도 하신 유명한 지도에요. 그런데 대구시청에 가고 말았어요. 당시 대구시청에서는 부산진여상 졸업생 4명을 다 받아주겠다고 한 반면 종근당은 1~2명만 받겠다 했거든요. 어떻게 저만 살자고 종근당에 갈 수 있겠어요. 그게 1994년이네요.
이듬해 여름 꿈에도 그리던 국가대표로 선발됐어요. 세계선수권대회 출전을 앞두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지금 돌이켜보면 창피한 기억입니다. 대회가 열리기 1주일 전에 저는 탈락하고 말았거든요. 당시 감독님이 임오경 주장을 불러 "차비 줘라" 하시더군요.
대표팀에서 탈락했으니 당연히 대구시청 숙소로 가야 했죠. 그런데 속이 상했던지 저도 모르게 그냥 부산으로 내려온 거에요. 대구시청에서는 제가 탈락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숙소에 안 나타나니 난리가 난 거에요. 실망해서 잠적했다느니, 큰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느니 걱정이 컸데요.
집에 가니까 어머니께서 "너 여기 왜 왔냐" 하시더군요. 그리고 바로 팀으로 전화를 하시더라구요. 대구시청으로 올라갔죠. 저 때문에 아무 잘못 없는 주장과 다른 선수들만 혼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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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08년 베이징 올림픽 8강 중국전에서 허순영이 슈팅을 날리는 모습. 연합뉴스 |
4년 뒤인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는 4위밖에 못했어요. 욕 많이 들었어요. 각종 국제대회서 동메달도 못 딴 건 정말 오랜만이라고 다들 그러대요. 사실 세계 4등이 못한 건 아니잖아요. 그때 고참들끼리 모여서 그랬어요. "다 우리 잘못이야. 이 기회에 모두 대표팀 관두자."
2002년 부산에서 아시안게임이 열렸어요. 묘하게 대구시청 감독을 하시던 분이 국가대표팀 사령탑이 됐어요. 원래 대표팀 감독이 되면 원래 자기 소속팀 선수를 가능하면 많이 넣으려고 해요. 그러다가 저도 다시 대표가 됐어요. 다행히 아시안게임에서는 금을 땄죠. 고향에서 우승하니까 기분이 괜찮던데요.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준우승 이야기는 다들 너무 잘 아시니까 안 할래요. 참 이런 이야기는 들어보셨는지 모르겠네. 그때 우리가 페널티 드로우 끝에 졌잖아요.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세계핸드볼연맹에서 페널티 드로우에서도 계속 동점으로 가면 공동우승을 주기로 내부방침을 정했대요. 그런데 그 고비를 못 넘기고…. 이제 와서 이런 소리 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분위기도 바꿀 겸…. 외국 이야기 좀 해 드릴까요. 아테네 올림픽이 끝나고 저는 일본으로 갔어요. 오므론에서 뛰었어요. 그러다가 2007년에는 덴마크 오르후스에서 활동했죠. 덴마크는 정말 우리하고 달라요. 우리는 단체 운동하는 시간이 정말 많잖아요. 걔들은 안 그래요. 팀 훈련은 하루에 1~2시간이 고작이더라구요. 나머지는 개인훈련을 하고요. 시설이 너무 잘 돼 있어 혼자 훈련해도 아무런 지장이 없어요.
그리고 걔들은 다 프로 선수들인데 직장에도 다녀요. 낮에는 일하고 오후에 운동을 하죠. 낮에도 벌고 저녁에도 버는 거죠. 그러면 선수 연봉이 적지 않냐구요. 우리나라 핸드볼 선수들보다 많아요. 사실 우리나라 여자 핸드볼 선수들 연봉이래야 고작 3천만 원 안팎이잖아요. 선수들 실력이나 고생하는 것에 비하면 너무 열악한 거죠.
악바리 코치로 '우생순 2탄' 만들 거예요
지역 핸드볼 현실 이렇게 열악할 수가…
인지中 코치 부임 때 눈앞 캄캄했지만
한 발 한 발 전진하는 아이들 깊은 애정
전국 최고 선수로 키울 겁니다
부산에는 어떻게 해서 돌아오게 됐나고요. 지난해 대구시청에 복귀했죠. 전국체육대회에 참가하러 창원에 갔다가 이상효 선생님을 만났어요. 이 선생님이 저를 붙들고 그러시더군요. "운동은 언제까지 할래. 부산에 지도자 자리가 났는데 한 번 맡아보지 않을래. 대구시청에서 3~4년 더 할 것 아니면 내려와라." 그래서 대구시청 감독님하고 상의했죠. 감독님이 흔쾌히 허락해주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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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망의 슛은 이렇게 던지는거야." 인지중 허순영 코치가 부산체육회관에서 선수들에게 상대 수비를 앞에 놓고 슈팅을 하는 요령을 가르치고 있다. |
부산에 여고 팀으로는 문현여고 1개가 있어요. 여기는 선수가 몇 명인지 아세요. 4명입니다. 당연히 대회는 출전도 못하죠. 훈련도 우리 선수들하고 같이 해요. 고교생이지만 우리 선수들보다 기량이 낫다고 하기 어려워요. 이름만 팀이지 사실상 팀이 아니예요.
여고 팀이 제대로 있어야 초등학교, 중학교 선수들이 의욕을 갖고 운동할 것 아닙니까. 그래도 부산에 부산시설공단이라고 여자핸드볼 실업팀이 있으니까 여고 팀에서 좋은 선수가 나오면 취업하기는 쉬울 거예요.
인지중도 팀을 창단한지 몇 년 안됐어요. 저는 사실상 애들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있다고 봅니다. 아이들도 사실 힘들어요. 맨처음에 팀을 맡고 보니 기초는 안 돼 있고 정신력도 없고, 거기에 선후배 사이에 기강도 엉망이더라구요. 심지어 감독하고 농담 따먹기나 하려고 하는 애들도 있고. 그래도 몇 달 훈련시켜서 지금은 많이 나아졌어요. 요즘은 많이 풀어줘요. 며칠 전에는 영화도 같이 보러갔어요.
주변에서는 저보고 지금부터라도 꿈을 크게 가지라고 말을 많이 해요. 저는 대꾸를 잘 안해요. 일단 제가 맡은 인지중을 제대로 만들어놔야 제가 어디 가서 말을 하더라도 할 것 아니겠어요. 현재 저한테는 우리 애들이 전부고 우리 애들이 전국 최고 선수예요. 우리도 한 번 정도 '우생순' 같은 기적을 만들어봐야 하지 않겠어요. 2~3년은 걸리겠죠. 그래도 차근차근 한 걸음씩 걸어 나가면 언젠가는 기적이 현실이 될 수 있다고 저는 믿어요.
말이 길었죠. 이제 그만 애들 가르치러 가 봐야겠네요. 참, 팬 여러분. 핸드볼 참 재미있는 경기거든요. 대회가 열리면 체육관에 많이 보러와주세요. 아셨죠. 우생순 파이팅, 한국 핸드볼 파이팅, 인지중 파이팅!
글=남태우 기자 leo@busan.com
사진=김병집 기자 bjk@
영상=박정욱·이지은 대학생 인턴

1975년 경남 진주 출생
배영초등 - 주례여중 - 부산진여상 졸업
1994년 대구시청 입단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은메달
2000년 시드니 올림픽 4위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금메달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은메달
2005년 일본 오므론 진출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 금메달
2007년 덴마크 오르후스 진출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동메달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 동메달
2011년 은퇴 후 인지중 코치 부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