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 가득 소박한 안주… 술맛에 마음도 익어가고
주안상은 배려의 마음으로 내는 상이다. 먹는 이가 식사는 했는지, 어떤 술을 마시는지, 나이는 어느 정도인지, 몸 상태는 어떤지…, 그런 것들을 세심히 살펴서 주안상을 마련해야 한다. 사진은 장안요 임계화 씨가 보여 준 탁주에 맞는 주안상 차림. 추석 명절 음식을 활용한 것이다. 장안사 가는 길목, 그러니까 부산 기장군 장안읍 장안리 하장안마을 제일 구석진 곳에 '장안요(長安窯)'가 있다.
도예가 신경균(47) 씨가 도자기를 굽고, 전시하고, 아내 임계화(47) 씨와 함께 생활하는 곳이다.
그곳 안채 주방이 바빴다. 문어 삶아 내고, 탕국 끓이고, 버섯 찢어 담고, 닭살 발라내고, 전 부치고, 나물 무치고, 생선 굽고….
정신 없이 바빴을 터인데, 임 씨는 도리어 웃으며 반겼다.
"일이 커져 버린건가? 간단히 하자고 한 건데…. 뭐, 좋지 않나요?"
이야기인즉슨, 추석 명절 때 손님들에게 내놓을 만한 주안상을 미리 한 번 보여달라 했던 것이다. 그것도 추석에 흔히 사용되는 술인 탁주·소주·청주에 어울리는 주안상을 따로따로 말이다. '차례상에 올릴 재료를 이용해 간단히 차려 낼 수 있는 주안상'을 한다고는 했지만, 일부러 추석 모양새 내기에는 재료 준비에서 손질, 요리까지 그 과정이 결코 간단치 않았을 터. 그래도 그는 사람 좋은 웃음을 터뜨렸다. "취재도 취재지만 모처럼 오셨는데, 대접 잘 받았다는 느낌 갖고 가셔야죠. 이왕에 차려내는 거. 하하."
솜씨 좋은 임 씨로부터 받는 주안상. 오래전부터 욕심내고 있었다. 그의 손맛을 아는 사람은 안다. 남편의 도예 작품을 보러 오는 사람들을 맞아 음식을 내다 보니 그 손맛이 알려진 것이다. 그가 한여름에 내놓는 냉면은 일품이다.
그에게 주안상을 부탁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보통의 가정 주부이면서도 전문 요리사 못지않은 손맛을 내는 그라면 평범한 가정의 주안상을 맛깔나게 표현해 줄 것 같았던 것이다. 값비싼 재료, 특별한 요리가 아니라도 말이다.
"탁주엔 부추전, 소주엔 육고기
청주엔 생선·버섯 '궁합' 좋아
안주는 눈으로 먹는 음식
차리는 사람 배려의 마음 중요"
·탁주-박주산채나마 소박한 정이 있는 주안상
"상 여기 있어요!"
 |
| 장안요 임계화 씨가 주안상에 낼 닭고기를 손질하고 있다. |
신 씨와 거실에 앉아 있으려니 주방 쪽에서 임 씨가 소리친다. 들고 가라는 소리다. 한데, 신 씨. 일어날 기색이 아니다. "주안상, 그거 여자가 들고 와야 돼. 여자가 해야 될 일이야."
허! 이리 대담한(?) 말이라니. "힘 좋은 남자가 들고 와 주면 어때서." 핀잔을 줘도 쓰윽 웃고 만다. 여하튼 요즘 세상에 집에서 대접받고 사는 부러운(?) 남자, 신 씨다.
들어온 상에는 부추전과 나물무침, 묵은지가 올려져 있었다. 나물은 콩나물과 가지, 박을 각각 무친 것이다. 탁주에 맞춘 주안상이라 했다.
"탁주에는 소박한 안주가 어울릴 거라 생각했어요. 남자들, 김치 하나만 있어도 좋다 하잖아요. 부 추전은 차례상에는 안 올라가지만 간단히 만들 수 있는 거라 만들어 봤어요. 파전도 생각했지만, 요즘 쪽파 철이 한참 지났거든요. 부추는 끝물이라 해도 맛은 남아 있어서. 청양고추, 방아, 담치 남은 거, 그런 걸로 버무려 부친 겁니다. 3색 맞추려고 비름나물을 찾았는데 집에 없네요. 제일 흔한 거, 밥 해 먹다 남은 걸로 차려냈는데, 그래도 때깔 나지 않아요?"
걸죽한 막걸리 한 잔 따라 놓고 보니, 말 그대로 박주산채(薄酒山菜)다. "술 먹는 건 역시 행복한 거"라는 신 씨의 얼굴에 화색이 가득해졌다. "한 상 대접받는다, 할 때 그 한 상은 원래 이리 소박한 1인상이었어요. 얼마나 좋아. 정겹고."
 |
| 소주에 맞는 주안상. 술이 독한 만큼 안주는 속 든든하게 하는 고기 위주로 차렸다. |
·소주-속 든든해지는 고기 중심의 주안상
소주 주안상에는 육고기와 해산물을 간장에 조린 것 한 접시, 문어 숙회 한 접시, 그렇게 올라와 있었다. 조림은 산적용으로 쓰는 쇠고기와 상어고기, 그리고 해산물인 군소, 홍합으로 이뤄졌다. 임 씨는 일단 근기 있는 재료로 만든 안주를 냈다고 했다.
"우리 집에선 보통 명절 때 알코올 45도짜리 독한 걸 마시거든요. 독주에는 아무래도 육류 위주의 안주가 어울릴 거라 봤어요. 또 탁주는 그 자체로 배를 부르게 하는 술이지만, 소주는 양을 적게 마시니까, 일단은 영양가 높은 걸로, 또 속이 든든해지는 걸로. 과일같은 근기 없는 안주는 맞지 않아요."
쇠고기와 상어고기 산적은 겉은 단단했지만 속은 아주 부드러웠다. 간장에 부드럽게 조린 것이라 했는데, 특별히 이가 안좋은 노인들도 씹기 쉽도록 겉에 칼집도 내놓았다. 군소는 혹 갯내음이 많이 날까 생강을 많이 넣었다.
"쇠고기는 기름기 적은 등심살로 했어요. 그냥 보통 산적용 살로 하면 텁텁하고 맛이 안나. 술안주로는 안 맞아. 문어 숙회나 홍합 같은 것은 부산 같은 데서 차례상에 흔히 올리는 것이죠. 영양가도 높고."
신 씨는 군소를 좋아한다고 했다. 어릴 때 자주 먹던 것인데 시중엔 파는 데가 잘 없어 아쉽다고도 했다. "명절 음식은 추억으로 먹는 게 아닌가 싶어요. 어릴 때 평소에는 잘 못 먹지만, 제사 같은 특별한 날에 먹었던 음식에 대한 기억, 그런 거 말입니다. 난 이 군소가 그래요."
 |
| 청주에 맞는 주안상. 청주는 주로 연세 지긋한 어르신들이 마시는 만큼 씹기 쉽고 부드러운 안주로 준비했다. |
·청주-어르신들을 위한 정성이 깃든 주안상
싸리버섯 닭고기볶음, 생선구이, 탕국, 새우튀김, 생선살 부침, 간·지라 부침. 청주 주안상은 앞의 두 주안상에 비해 종류가 많았다. 청주는 아무래도 나이 든 어르신들이 주로 드시는 술이라 좀 푸짐하게 했단다. 부드럽고 맑은 술이라 흰살 생선은 꼭 곁들여야 한다고 했다.
싸리버섯은 송이나 능이에 비해 좀 이르게 난다. 요즘 막 맛이 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신 씨는 "글 쓰는 사람 이거 먹으면 글발 좀 받지"라는 묘한 말을 했다. 힘이 난다는 이야기다. "싸리 중에서도 참싸리를 닭고기 살에 버무려 먹으면 최고라. 요즘 철이면 이 싸리가 송이 안 부럽습니다. 제철이라." 임 씨는 싸리버섯은 하룻밤 정도 소금물에 담가 두어 아린 맛을 빼야 한다고 했다. 그러지 않으면 배탈 나기 십상이라는 것.
생선구이는 눈볼대라는 생선을 썼다. 일본어로 흔히 '아카무츠'라 불리는 생선인데, 살이 부드럽고 고소하다. "우린 이거 제사상에 꼭 올립니다. 시아버님이 생전에 너무 좋아하셨어요. 우리 애들도 명절 때면 이거부터 먹고 다음에 밥 먹을 정도라니까요. 비늘만 약간 제거하고 소금만 조금 쳐 오븐에 구우면 돼요. 가시도 거의 없어 어른들 드시기 편해요."
소의 간과 지라는 껍질을 벗기고 겉에 계란과 메밀을 입혀 기름에 부쳤다고 했다. "간과 지라는 노인분들 혈압이나 그런데 좋대요. 메밀도 원기 보충에 좋고. 바깥에 있는 막 같은 껍질을 벗기면 먹기가 부드럽고 고소합니다. 애들도 잘 먹어요."
·밥상보다 손님을 더 감동케 하는 배려, 주안상
 |
| 도예가 신경균 씨가 아내에게서 주안상을 받았다. 그는 이런 주안상 문화가 사라지고 있는 게 안타깝다고 했다. |
"밥 반찬보다 간을 좀 싱겁게 하고. 안주는 또 눈으로 먹는 음식이라고 봐요. 일단 눈이 즐겁게 풍성하고 예뻐야죠. 기본적으로 술을 마시는 자리니까, 속 버리지 않게 부드러운 걸로. 그런게 주안상을 내는 기본이 아닌가 생각해요."
보통의 음식과 주안상의 음식이 어떻게 달라야 하는지 묻자 임 씨는 그리 답했다. 그는 무엇보다 "주안상은 배려의 음식"이라고 했다.
"허기진 배 채우려고 급하게 먹는 게 주안상은 아니잖아요. 손님 보고 빨리 가라고 주안상 내는 사람은 없죠. 엉덩이 붙이고 오래 있으시라, 있는 음식과 술을 주인과 즐겁게 나누고, 문밖에 나설 때 그 좋은 기분 그대로 안고 가시라, 그런 배려의 마음을 담아 내는 게 주안상 아니겠어요?"
그러나, 주안상은 우리 주변에서 점점 사라지는 문화다. 손이 찾아와도 그냥 밖에서 술 한잔 하고 집에선 간단한 다과로 끝내는 게 요즘 풍토. 신 씨는 안타깝다.
"한 상 받는다? 여기 보세요. 별 대단한 거 아니죠? 소박하게 이리 차리면 돼. 집에서 먹는 거 조금만 더 신경쓰면 대접받는 사람 마음이 얼마나 푸근해지는데. 여유? 이런 작은 걸 하자는데, 여유가 아니라 정성과 생각의 문제인 거요. 쉽게 생각하면 돼. 남자는 밥상보다 주안상 잘 받으면 진짜 대접받는다 그런 느낌 가진다니까요."
어쨌거나 이날 아내가 고생해 내온 주안상에 대해 신 씨가 한마디 했다. "잘됐어." 어쩔 수 없는 경상도 남자! 하지만 그는 입이 느끼는 그대로 말한, 최대의 찬사라 했다.
글·사진=임광명 기자 kmyim@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