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해! 돼지국밥, 부산사람 '솔푸드' 네 생일도 몰랐구나…
부산 서면시장 명가국밥의 육수 스타일은 '돼지 설렁탕'식으로 사골만을 우려내 뽀얀 우윳빛이 특징이다. 다진 양념(속칭 '다대기'), 매운 고추와 양파, 부추, 면 사리 따위는 다른 집과 같은데 돼지고기 소스로 고추냉이와 간장을 내는게 특이하다.부산은 명실상부 돼지국밥의 도시다. 어느 골목에 접어들더라도 뜨거운 돼지국물이 펄펄 끓어 넘치는 솥과 맞닥뜨린다. 그 속에는 화끈한 것들끼리 서로 뒤섞인다. 재빨리 꼭짓점까지 치솟았다가 뒤끝 없이 마무리된다. 부산사람의 기질을 빼닮았다.
일제강점기와 전쟁, 산업화로 이어지는 신산의 근현대사를 뚫어온 부산사람들에게 돼지국밥은 '전투식량'이었다. 뜨뜻한 국물 한모금으로 속을 데우고 기운을 차려 일어났다. 같은 장터음식으로 출발한 비빔밥이 세계화를 구가하는 사이에도 국밥은 여전히 시장바닥의 야성, 그 출신 성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푸대접이나 무관심의 대상인 것이다. 그래서 돼지국밥은 억울하다. 우리 입장에서는 미안한 생각까지 든다.
부산시가 지난 2009년 발간한 '부산의 향토음식'에 돼지국밥은 생선회, 동래파전 등과 함께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그런데 표준국어대사전에 삼겹살과 돼지갈비 혹은 설렁탕, 곰탕, 따로국밥은 올랐지만 돼지국밥은 찾을 수가 없다. 부산은 물론이고 경남 창원, 김해, 밀양 사람들의 영혼의 허기를 채워준 '솔푸드'가 사전적으로는 음식 대접을 못 받고 있다. 국회전자도서관에서 '돼지국밥'을 입력해보라. 검색되는 자료가 단 한 건도 없다.
"돼지국밥 맛이 다 똑같지 뭐!" 저급하고 몰개성적일 것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국밥 골목을 돌다가 집집마다 육수를 내는 법, 양념과 상차림이 천차만별이라는 점을 깨닫고 내심 놀랐다. 맛있는 집을 추천해달라고 하니 "당신은 어떤 스타일의 국밥을 좋아하느냐"고 되물어 답을 못했다. "돼지국밥의 맛이 얼마나 섬세한 줄 아느냐?"는 질문에 우물쭈물했다. 돼지국밥의 세계는 변화무쌍하고, 재야의 고수들끼리 진검승부가 벌어지는 곳이었다.
'부산의 향토음식' 기술을 비롯한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한국전쟁 때 피란민들과 함께 내려온 이북식 순대국밥이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잔반으로 끓인 '꿀꿀이죽'(혹은 '유엔탕')과 만나면서 돼지국밥의 원형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해왔다. 일종의 비극적 탄생론이다.
그런데 이번 취재에서 통설보다는 훨씬 빠른 일제강점기 때 문을 연 돼지국밥집을 발견했다. 1938년 문을 열어 75년째 같은 장소에서 돼지국밥을 팔고 있었다. 영도 대교동 '소문난국밥집'의 김현숙(80) 사장은 "꿀꿀이죽은 쌌지만 돼지국밥은 당시 고급음식이었다"고 회상했다.
예전 돼지국밥 상차림을 재연해서 비교해봤더니 요즘 먹는 국밥이 맵고 짜게 진화해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억척스러울 수밖에 없던 지난 세월 부산사람들에게 힘이 되어준 돼지국밥. 그 유래나 변화 과정을 밝히는 것은 향토사의 중요한 고리를 찾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 돼지국밥은 뿌리없는 음식 취급을 받고 있다. 일본의 '라멘 박물관' 같은 기념 시설이 생길 때도 되지 않았을까? 아쉬운 대목이다.
찬바람이 솔솔 부는 계절, 김이 모락모락 나는 돼지국밥이 그립다. 잊히지 않는 오랜 맛의 추억을 찾아 떠난다. 돼지국밥에 미안한 마음을 갖고. 김승일 기자 dojune@busan.com
사진=강원태 기자 wk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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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 영도구 대교동의 '소문난돼지국밥'에서 차려낸 '아주 오래된' 돼지국밥 상차림. 이 가게는 일제강점기 시절인 1938년 문을 열어 75년째 한자리에서 돼지국밥을 팔고 있다. 예전에는 토렴한 국밥에 대파와 후추를 올리고 새우젓과 마늘, 쌈장, 김치만 곁들여 단출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