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한흥교(父·부산 최초 양의사)·한형석(子·음악가) 생가터 찾았다
먼구름 한형석 선생 장남 한종수 씨와 동래구 관계자가 한흥교·한형석 부자의 생가터 일대를 둘러보고 있다.부산 동래출신 부자(父子) 독립운동가인 한흥교, 한형석 선생의 정확한 출생지가 본보 취재를 통해 확인됐다.
본보 취재진·한형석 선생 장남
자료·증언 조사해 출생지 추적
동래구청 인근 주택가서 확인
현재 기왓집·주차장으로 이용
12일 낮 동래구청 맞은편 오래된 주택가 골목길. 동래읍성 야문터 인근 주차장을 지나자 붉은 벽돌 담장과 함께 기와 지붕을 얹은 대문이 눈에 들어왔다. 안으로 들어서자 'ㄱ자' 형태의 고풍스러운 기왓집이 나타났다.
이 기왓집 일대는 먼구름 한형석(1910~1996)과 부친 동해 한흥교(1885~1967)의 생가가 있던 자리이다.
그동안 두 인물에 관한 각종 자료에는 출생지가 교동(지금의 명륜동) 또는 복천동으로 다르게 표기돼 있어, 정확한 생가터 위치 확인이 어려웠다.
취재진은 광복 70주년을 맞아 부산이 낳은 두 독립운동가의 뿌리를 찾기 위해 한형석의 장남 한종수(55) 씨와 함께 생가터 찾기에 나섰다.
수기(한자)로 된 한흥교의 제적 등본 등 각종 자료와 친인척들의 증언에 따라 현장 조사를 한 결과 '교동 278, 279번지'가 두 부자의 출생지임을 밝혀냈다.
현재 이 지역은 여러 필지로 분할돼 기왓집 형태의 주택, 주차장 등으로 이용되고 있다.
당초 두 부자의 생가터는 복산동주민센터 인근의 한 주차장 부지로 여겨졌다. 친인척들은 해당 지역을 한흥교 선생과 장남 한원석이 살았던 '큰집'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고문서 등을 근거로 볼 때, 이 부지는 1950년대 서구 충무동에서 내과를 운영하던 한흥교가 다시 동래로 돌아오면서 새로 잡은 터전으로 추정된다. 그는 은퇴 후 이곳에서 거주하다 1967년 생을 마감했다.
부산 최초의 양의사이자 독립운동가인 한흥교는 둘째 아들 한형석의 활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지만 상대적으로 관련 업적이 덜 알려져 있다.
그는 일본 유학시절 중국인 동창생의 권유로 1911년 상하이로 건너가 쑨원이 이끄는 중국혁명군에 가담했다. 이후 의원을 열어 수익금으로 독립운동가들을 뒷바라지하다, 상하이와 베이징에서 신채호 등과 함께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한흥교는 중간 중간 고향 동래를 오가며 1916년 지금의 대동병원을 세우기도 했다. 1930년대에는 동래지역 여론기관인 '경오구락부(庚午俱樂部)'에서 활동하며 지역사회 운동에 앞장섰다.
한종수 씨는 "친척들의 증언에 따르면 5남 1녀 중 맏아들인 할아버지뿐만 아니라 나머지 형제들도 동래지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신 것으로 전해진다"며 "조부와 부친을 포함해 부산지역 독립운동의 뿌리에 대한 조사·연구가 미진해 안타깝다"고 말했다.
동아대 사학과 홍순권 교수는 "한형석이 독립운동에 투신한 데에는 아버지 한흥교의 영향과 의지가 크게 작용했다"며 "독립운동사에 여러 업적을 남긴 지역인물에 대해 지역사회가 관심을 갖고 본격적인 연구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글·사진=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