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시립미술관 '김태호 전' 60대 거장이 꾸민 '치열한 공간 질서'
"잠시도 머무른 적이 없었습니다. 늘 한 단계 더 도약하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습니다. 지금도 캔버스 앞에 앉으면 치열해집니다."
60대 후반의 거장은 지난 30년의 작품이 모인 자리에서 '치열함'을 가장 먼저 이야기했다.
부산 출신 화가·인체 형태 시리즈 유명
물감 작품 등 30년간 그린 80여 점 선봬
4일 부산시립미술관에서 개막해 두 달여 이어지는 '공간구조를 조작하다' 전의 주인공, 김태호 작가이다. 부산에서 태어나 중학교까지 마친 후 서울에 있는 서울예술고등학교와 홍익대 회화과를 거쳐 작가로, 홍익대 교수로 평생 활발하게 활동을 펼친 그이다.
"부산 사람으로 서울예술고등학교에 입학한 사람은 제가 처음이었죠. 학교에서 '모르겠심더'로 통했습니다. 선생님도 저를 '모르겠심더'로 불렀죠. 그런데 주눅 들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있었죠. 누구보다 작업을 열심히 했으니까요."
타고난 재주에 노력까지 더해져 김 작가는 일찌감치 한국 화단의 거장들 눈에 들었다. 고등학생 때 거장 박서보 화백을 개인 선생으로 모셨고 이후 정상화, 김창열, 김병기, 하종현 등 거장들에게 배우며 가까이서 그들의 예술 세계를 만날 수 있었다.
"선생님들에게 배운 가장 큰 가르침은 치열함을 이겨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림에 대한 진지함과 절실함이죠. 김창열 선생님은 마구간에서 그림을 그리셨고 정상화 선생님은 사우나에서 일하시며 작업을 이어가셨습니다. 캔버스를 살 돈이 없어 종이로 작업을 해야 했고요. 저 역시 힘든 시절 덕분에 작업에 대한 절실함이 더 커졌던 것 같습니다."
김 작가의 치열함은 작품에 잘 드러난다. 1977년 첫 개인전에서 수평선 아래 숨어 있는 인체를 그린 '형태(form)' 시리즈를 발표했다.
스프레이로 제작된 이 작품들은 은행 문이 굳게 내려진 셔터에서 영감을 얻었다. 굵은 셔터 뒤에 갇힌 인체는 현대인의 고립감, 소통의 단절을 표현하고 있다. 잠시도 머무르지 않았다는 작가의 말처럼 형태 시리즈는 계속 변화한다. 직선이 사라지거나 행위의 흔적이 남는 등 작가는 새로운 것을 보여주기 위한 시도를 이어간다.
그러다 재료를 한지로 바꾸었다. 캔버스에 한지를 붙이며 캔버스 표면에 나타나는 형상에 초점을 맞추었다. 현재까지 이어지는 '내재율'의 시작이다.
한지를 붙이다가 물감으로 재료를 바꾸었다. 물감을 몇 겹으로 쌓아 층을 만들어 캔버스 위에 입체 공간을 구현하는 식이다.
여러 층의 물감을 쌓아올린 후 물감을 깎아내는 과정을 반복하며 캔버스 위에 김 작가만의 공간 구조를 만들었다. 다양한 목소리가 모여 하나의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작가의 표현은 국내외에서 호평을 받았다.
이번 부산시립미술관 전시는 김 작가의 지난 30년 작품들이 총출동한다. 3개 전시실에 80여 개 작품을 만날 수 있다.
"한 번도 팔기 위해 그림을 그려본 적이 없습니다. 후배 작가와 제자들에게도 팔기 위한 작품이 아니라 좋은 작품을 만드는 데 집중하라고 합니다. 아마도 평생 작업을 할 수 있었던 이유인 것 같습니다."
곧 정년을 맞이한다는 김 작가는 지금도 매일 강의 시간을 빼면 오롯이 작업에 매달린다. 학교를 퇴임하면 작업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져 좋다는 김 작가. 김 작가의 치열한 그림이 일상에 지친 많은 이들에게 새로운 에너지를 줄 것 같다. ▶김태호 '공간구조를 조작하다' 전=11월 15일까지 부산시립미술관 3층 전시실. 051-744-2602.
김효정 기자 teresa@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