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옥연 화백 작고 4주기 회고전… 부인 이병복이 말하는 권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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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에겐 비평가, 그래도 그가 즐겨 그렸던 건 나"

권옥연 화백이 1951년에 그린 부인 이병복 여사 초상화. 가나아트부산 제공

"인터뷰 그런 거 딱 질색이야! 나는 기자하고 정치가는 만나기 싫어."

지난해 구순을 넘겼다는데 목소리는 카랑카랑했고 카리스마 넘치는 눈빛에 기자가 주눅이 들 정도이다.

예술원 부부 회원으로 명성
미술계 거목·연극계 대물로
각자 영역서 미친 듯이 작업

정물·인물 등 40개 작품 전시

종이 꼬아 설치 작품 만들어
자기 방식으로 남편 사랑 표현


눈치를 보다가 슬며시 다시 다가갔다. "권옥연 선생님과 부산에서 만나 결혼하셨다면서요? 여기 해운대로 신혼여행 오셨다던데요. 오랜만에 해운대 오시니 좋으시죠?" 청춘의 이야기가 통했는지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로 "피란 왔을 때지. 눈이 뒤집혔나 봐. 결혼하며 권을 한국의 피카소로 만들겠다고 결심했지. 당시 부산에 미국인들이 많았는데 권의 그림을 알아줄까 싶어 이리저리 뛰어다녔지."

한국 추상미술 1세대이자 한국 현대미술의 거목 권옥연(1923~2011) 화백. 작고 4주기를 맞아 부산가나아트에서 대규모 회고전이 열리고 있다. 전시장에서 권 화백의 아내 이병복(사진) 여사를 만날 수 있었다.

남편은 한국 미술계의 거목이지만, 이 여사는 한국 연극계의 '대물'이다.

한국무대미술 1세대이며 1966년 극단 자유를 창단해 100여 편의 연극을 만든 연극계의 산증인이다. 박정자, 김용림, 윤소정, 최불암, 김혜자가 창단 멤버였다. 이 여사는 이 기센 배우들을 진두지휘하며 한국 연극계의 역사를 만들어갔다.

권 화백 살아생전에 두 사람은 한국 예술가들의 '명예의 전당'으로 불리는 예술원의 유일한 부부 회원이었다.

이화여대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연극을 하던 이 여사는 피란 시절 부산에서 권 화백을 만나 결혼했고 권 화백을 위해 1957년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났다. 당시 유학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이 여사는 "도둑질, 서방질 빼놓고는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였단다.

파리에서 권 화백은 미술을, 이 여사는 의상을 공부한 후 1961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두 사람은 각자의 영역에서 미친 듯이 작업했다. "권은 남편으로, 아빠로선 빵점이야. 작업실에서 그림만 그렸어. 작업실에는 가족도 들어갈 수가 없었지. 작업실이 엉망이 돼 3년마다 새 작업실로 옮겼는데 그때만 청소하러 작업실에 들어갈 수 있었어."

두 사람은 평생 서로에게 가장 무섭고 날카로운 비평가였다. 좋은 말을 들은 기억이 없단다. "권은 내가 힘들게 만든 무대 세트를 보고서 '이게 객석에서 보이겠어'라고 하면 나는 '그만 좀 칠해. 영화관 간판 그리려고'라며 맞섰지. 서로 칭찬 한마디 없이 빈정대는 사이였어."

말은 그렇게 해도 권 화백이 가장 즐겨 그렸던 모델이 아내였다.

이번 회고전에서도 이 여사의 젊은 시절을 담은 그림을 만날 수 있다. 이 여사는 권 화백의 작업실에 굴러다니던 종이를 꼬아서 회고전 한쪽에 설치 작품을 만들었다.

인터뷰 내내 남편에 대한 칭찬을 전혀 하지 않던 이 여사였지만 이 작품은 자신의 방식으로 남편에게 전하는 사랑의 표현인 것 같다.

"연극이 끝나면 세트는 사라지는데 그림은 이렇게 남아서 사람들의 평가를 받으니 권이 그렇게 힘들어했구나 싶어. 고생했네." 이 여사가 밝힌 회고전의 담담한 소감이다.

전시에는 정물, 인물, 추상까지 권 화백의 다양한 작품 세계를 담은 40개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중간 계열인 청색, 회색, 녹색을 여러 번 칠해 만든 청회색 바탕 위에 우울한 표정을 지은 여인의 초상화는 특히 유명한 작품이다. ▶권옥연 회고전=4월 16일까지 가나아트부산. 051-744-2020.

김효정 기자 teresa@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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