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애국가 일본의 기미가요 작곡가는 한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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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에케르트/한스 알렉산더 크나이더

"상제(上帝, 하느님)는 우리 황제를 도우사/성수무강(聖壽無疆) 하사/해옥주(海屋籌, 큰 수명의 수)를 산(山)같이 쌓으시고/위권(威權, 위엄과 권세)이 환영(環瀛, 천하)에 떨치사/오천만세(於千萬歲)에 복녹(福祿, 기쁨과 즐거움)이/일신(日新)케 하소서(하략)."

1901년 9월 7일은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마흔 아홉 번째 생일인 만수성절(萬壽聖節)이었다. 이날을 기념하기 위해 신료들과 조선 주재 해외 공관원, 귀빈들이 모인 경운궁에서 군악대의 연주로 새로운 곡조가 울려 퍼졌다. 일간지 는 "말쑥한 제복, 광택이 나는 악기들, 완벽한 박자, 부드러운 리듬과 하모니, 이 모두가 어우러져 듣는 이들이 전혀 예상치 못한 즐거움을 만끽했으며 환호 갈채가 이어졌다"고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대한제국과 일본, 두 나라의 국가 만든
독일 출신 프란츠 에케르트 삶 조명

민영환 작사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 작곡
서양 음악 한국에 들어오는 가교 역할
국권침탈 후에도 한국에 살고 한국에 묻혀

이날 공개된 곡의 제목은 '대한제국 애국가'. 고종의 지시로 충정공 민영환이 가사를 짓고, 당시 군악대 교사로 초빙된 독일인 프란츠 폰 에케르트(1852~1916)가 작곡한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國歌)였다. <프란츠 에케르트>는 19세기 말~20세기 초 한국과 일본에서 독일 취주악을 전수하면서 두 나라의 국가를 작곡한 독일인 에케르트의 생애와 활동을 조명한다.

1852년 4월 독일 슐레지엔에서 출생한 에케르트는 독일 해군 소속 음악가로 일본 정부 초청으로 1879년 3월 일본에 건너가 해군 군악대 교사, 궁내성 아악과 전임교사로 근무하며 20년 넘게 머물렀다. 그는 1880년 일본 해군성의 요청을 받아 국가 '기미가요'의 새 멜로디를 작곡하기 위해 창설된 위원회의 일원으로 참여했고 관악기용으로 편곡하는 일을 맡았다.

에케르트는 대한제국의 초청으로 1901년 2월 28일 정규 군악대에서 사용할 각종 악기를 가지고 조선으로 들어왔다. 군악대를 조직하고 대원들에게 서양악기 연주법을 가르쳐 달라는 요청을 받았기 때문. 한 달 봉급은 '300원'으로 1900년 무렵 쌀 2㎏에 3전(1전=1원의 100분의 1)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상당히 후한 금액이었음을 알 수 있다.

군악대원들에게 에케르트는 열정적이면서도 무서운 선생이었다. "진도가 느리고 성적이 불량한 대원이 있으면 끝까지 지도해서 낙오자가 되지 않도록 끈기 있게 가르쳐 쓸모 있는 대원으로 만들어 냈고, 가르치는 것이 잘 안 되면 독일어로 욕설을 퍼붓고 문을 박차고 나가 창밖을 내다보며 술 한 모금을 들이켜기도 했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일본에서 9개월 교육한 실적과 한국인이 3개월 교육받은 실력이 맞먹는다"며 한국인의 재능과 열의에 감탄했다고 한다.

군악대는 황실에서 정기적으로 공식행사를 가졌다. 1902년 6월부터는 매주 목요일 오전 11시에 파고다공원(현재의 탑골공원)으로 연습 장소를 옮겨서 연주회를 펼쳐 인기를 끌기도 했다. 에케르트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서양음악이 한국에 들어오는 데 가교 역할을 했다. 특히 그가 아꼈던 제자 백우용은 이 땅에 서양음악이 뿌리내리는 데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

대한제국 애국가는 1902년 8월 15일 국가로 공식 지정돼 세계에 알려졌다. 악보 인쇄를 독일에서 해야 했기 때문에 시간이 걸렸다. 1902년에 10쪽 분량의 애국가가 네 가지 색상으로 인쇄돼 50여 국가에 배포됐다. 에케르트는 애국가를 작곡한 공로 등으로 '태극 3등급 훈장'을 받았다.

대한제국 애국가는 국가가 된 이후 공식 국가 행사나 각급 학교의 행사에서 의무적으로 제창됐다. 그러나 1910년 일제의 국권침탈로 기미가요가 공식 국가가 되면서 이 노래는 탄생한 지 8년 만에 금지곡이 됐다. 기미가요의 작곡자 역시 에케르트라는 점을 생각하면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1945년 해방된 후에도 에케르트가 기미가요를 작곡했다는 이유로 대한제국 애국가는 국가로 채택되지 못하는 비운을 겪는다.

에케르트는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면서 군악대가 없어진 후에도 조선에 남았다. 개인 자격으로 음악을 지도하는 등 활동을 계속했던 에케르트는 1916년 8월 6일 64세에 위암으로 사망했다. "조선에 묻히고 싶다"는 생전의 희망대로 에케르트는 서울 마포구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장됐다.

일제 강점기 금지곡이었던 대한제국 애국가는 조선인들 사이에 구전으로 이어져 내려왔다. 독립군들이 이 노래를 불렀고 1910년 한·일병탄 이전 미국 하와이로 갔던 조선인들이 멜로디를 기억하고 가사를 바꿔 부른 기록이 남아 있다. 에케르트가 만든 노래는 아마 만주 벌판과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등지에서 힘들게 노동하며 조국의 광복을 염원하던 한국 민중들에 의해 불렸을 것이다.

이 책에는 에케르트의 장녀인 아말리에 마르텔이 한국에서 보낸 51년의 생활을 기록한 '회상록'이 처음으로 공개된다. 그녀의 남편인 에밀 마르텔은 1949년 세상을 떠난 뒤 장인이 잠든 외국인선교사묘원에 묻혔다. 아밀리에의 장녀인 이마쿨라타 수녀는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의 포로가 되어 독일로 송환되는 수난을 겪은 뒤 1955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대구에서 봉사하다가 1988년 사망했다. 에케르트 가문은 이처럼 3대에 걸쳐 한국과 일생을 함께한 것이다. 한스 알렉산더 크나이더 지음/문신원 옮김/연암서가/440쪽/2만 5000원. 박진홍 선임기자 jhp@busan.com

그래픽=류지혜 기자 bir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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