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는男걷는女] 긴 방학은 언제쯤 끝나려나
등굣길 가파르기로 악명 높은 '동의대'
비대면 개강 탓에 불꺼진 대학로 상권
거리두기에 '개강 특수'마저 사라져
35년 버텨온 복사집도 직격탄에 휘청
걸어야 보이고, 걸어야 느껴집니다. 부산을 제대로 보기 위해 운동화 끈을 동여맵니다.
진 땅이든 마른 땅이든, 까꼬막이든 계단이든, 어디든 가겠습니다. 걸어서 부산 속으로. 저는 ‘걷는 여자’입니다.
<등굣길일까, 등산길일까>-체험기
2년 전까지만 해도 '뚜벅이'. 차를 산 뒤론 10분 거리도 잘 걷지 않는다. 하지만 더 넓게, 더 깊게 보기 위해 또다시 걷는다. '본캐'는 기자. 2주에 한 번씩 '부캐' 뚜벅율(이하 ‘율’)이 되기로 했다.
율의 네 번째 도전 장소는 '동의대'다. 가야공원을 가기 위해 차를 타고 스쳐만 지나갔던 곳. 한 번도 걸어가 본 적은 없었지만, 동의대의 급경사에 대한 악명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주변에서도 꽤나 겁을 줬다. 율은 '걷는 여자' 촬영 3회차 만에 체력이 어느 정도 올라왔다고 자부했다.
부산도시철도 2호선 동의대역 5번 출구 앞에서 율의 도전은 시작됐다. 평소 율의 느린 걸음이 불만이었던 건지, 제작진은 처음으로 제한 시간을 내걸었다. 동의대 끝까지 25분 만에 올라가거나, 걷는 동안 '다비줌'이라는 글자를 찾으란다. 도대체 '줌'이란 글자를 어디서 어떻게 찾아야 할지 난감했지만 시간 안에 도착하려면 일단 걸어야 했다.
셔틀버스를 타는 학생들을 뒤로하고 율은 걷기 시작한다. 평소보다 경쾌한 걸음. 필라테스를 시작했다는 율은 자신감을 넘어 자만심을 내비쳤다. 경사라면 율의 모교도 만만치않았다. 율은 대학 새내기이던 시절 학내 경사길을 11cm '킬힐'을 신고도 뛰어올랐다며 허세도 부렸다. 그때가 벌써 10년 전이라는 걸 잊은 모양이다.
숨이 조금씩 가빠졌지만, 동의대 정문까지는 그런대로 오를 만 했다. '훗, 이정도 쯤이야'. 말을 뱉으려는 순간, 동의대 정문 너머로 아찔한 경사가 펼쳐졌다. 도중에 쉬어갈 평지조차 없어 보이는 무자비한 급경사였다. 지금까지 올라온 경사는 그저 준비운동일 뿐이었다. 율의 눈동자가 갈 곳을 잃고 흔들렸다.
남은 시간은 10여 분. 제시간 안에 가려면 지금까지 걸어온 것보다 더 빠른 걸음으로 걸어야 했다. 숨소리는 더 거칠어지고, 말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아직 '줌' 글자도 못 찾았는데…. 율은 두 마리 토끼 다 놓치느니 하나의 미션이라도 성공하자 싶었다. 목표지점인 회차지를 50m 남겨 두자 PD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불길한 예감. 뛰어야 했다. 율은 냅다 뛴다. 굽이 겨우 1cm도 안되는 운동화를 신었지만, 새내기 때의 속도가 안 난다. 경사 탓일까 세월 탓일까. 고민할 새도 없었다.
율이 목표 장소에 도착하자 PD의 눈이 동그래졌다. 1초 남기고 율의 승리. 오랜만에 벌칙을 면한 율은 숨을 고르며 학교를 둘러본다. 새학기인데도, 학교 안에 학생들이 그리 많지는 않다. 코로나19 탓에 60% 정도만 대면 수업을 한다고…. 촬영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 대학로 곳곳에 '임대'를 내놓은 건물들이 눈에 띈다.
<그땐 그랬지>-취재기
■허기를 채우는 따뜻함
"오늘은 애들이 좀 오려나."
장송학 사장님은 해가 서쪽으로 조금씩 기울어가는 오후 3시쯤 느즈막이 셔터를 올린다. 장바구니를 내려놓고 바닥을 쓸고 있을 즈음 가게 앞을 얼쩡거리는 한 여자를 발견했다. 수첩을 들고는 쭈뼛거리는 율을 보며 장 사장님은 반가운 인사를 건넨다. "어서온나."
동의대 대학로를 따라 내려오다 보면 나오는 '멍텅구리' 소주방. 장 사장님은 이 소주방을 처음 열던 날짜도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1997년 4월 17일. 벌써 24년째다.
IMF로 남편이 다니던 회사가 문을 닫으면서, 주부로만 살아왔던 장 사장님은 생업 전선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당장 일을 해야 하는데, 생각나는 건 장사밖에 없었다. 남편의 고향인 가야 근처에 점포를 얻었다. 가게 이름은 이전 사람이 지어준 대로 그대로 뒀다. 왠지 입에 착 감기는 정감가는 이름이었다.
첫해에 문을 열었을 때만 해도 아는 사람들이 알음알음 밥도 먹고 술도 마시는 곳이었다. 그러다 전산과 학생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나면서 전산과 학생들의 아지트가 됐다. 멍텅구리가 대학 앞에서 꽤나 유명한 식당이 된 것도 전산과 학생들 덕분이었다. 야간 수업을 듣던 전산과 한 학생이 식당에서 먹다 남은 소주병을 가방에 넣고 수업에 들어갔더랬다. 어쩌다 수업 도중에 소주병이 떨어졌는데, 교수님께 딱 발각됐다고. 그날 이 학생은 큰 종이에 반성문을 써서 학교에 붙였고, 그 대자보를 본 학생들이 너도나도 멍텅구리로 몰려왔다. 학생들이 줄을 서던 그날을 장 사장님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배고픈 대학생들에게는 큰 위로가 되는 곳이었다. '1인 1메뉴'가 식당의 기본 매너라지만, 장 사장님은 개의치 않는다. 이곳에 오는 학생들은 7000원짜리 메뉴를 하나 시켜놓고 사람 수만큼 밥만 추가한다. 사람 수가 많은데 음식을 적게 시키면, 장 사장님은 오히려 더 넉넉한 양을 준비한다. 계란부침과 바나나도 서비스로 나간다. 옛날엔 떡볶이, 지짐도 서비스로 나갔다. "한창 배고플 나이잖아요. 또 대학생들이 돈이 어디있어. 자식 같은 애들 배부르게 밥이라도 먹여야죠."
그 따뜻함 때문일까. 20년 전 졸업한 학생들은 아직도 식당을 찾는다. 배우자나 자녀의 손을 잡고 와서는 한참 동안 추억을 곱씹다 간다. 장 사장님은 졸업생이 자녀와 함께 올 때면 용돈도 쥐여준다. 대학생이던 애들이 언제 이렇게 자라서 자식까지 낳았는지. 배 아파 낳은 자식은 아니지만, 자식들 볼 때처럼 마음이 흐뭇하다.
몇 년 전에는 김해에서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는 한 졸업생이 찾아와 사장님께 수표를 건넸다. 학교 다니던 시절, 술을 먹고 시끄럽게 떠든다고 장 사장님께 소쿠리로 맞았던 학생이란다. 문득 그 시절이 너무 그립고, 그때 사장님이 지어준 밥이 너무 따뜻해서 가끔 생각이 난다며. 사장님께 오래오래 건강하시라는 인사를 건네고 떠났다고 한다. 졸업생들을 한 명 한 명 다 기억할 수는 없지만, 옛날이야기를 하다 보면 그때의 기억에 젖어 든다.
그 시절의 낭만은 없어진 지 오래다. 배달 음식이 보편화되면서 옛날만큼 식당이 북적거리지도 않는다. 그래도 새학기에는 저녁마다 학생들로 가득 찼는데…. 사회적 거리두기로 학생들이 못 모이니 개강을 한 것 같은 느낌도 없다. 주머니 사정이 점점 어려워지지만, 그래도 맛있게 밥을 먹어주는 학생들을 보며 위안을 얻는다.
5시가 지나자 학생들이 하나둘씩 들어오기 시작한다. 3명의 남학생이 들어와 부대찌개와 두루치기, 밥 3개를 시킨다. 장 사장님은 고슬고슬 갓지은 밥을 밥공기에 살짝 넘치게 퍼담는다. "많이 먹고 필요한 거 있음 얘기해라이." 요리를 하는 장 사장님의 손길이 바빠진다.
■박 사장님의 긴 방학
동의대 정문 어귀. 셔틀버스를 타고 내리는 정류소 앞에는 '영복사'집이 있다. 현대적인 디자인의 간판과는 반대로 복삿집 유리문에는 투박한 글씨로 '복사'라는 글씨가 쓰여 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눈웃음이 매력적인 박 사장님이 기다리고 있다.
율은 행여 민폐가 될까 쭈뼛쭈뼛 복삿집으로 들어선다. 율의 기억 속에 보통 대학가의 복삿집은 새학기인 이맘때가 가장 바빴다. 한 수업에서 교재 제본을 맡기면 의뢰받은 물량만큼 작업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던 사장님들의 모습이 머리를 스친다. 긴장하며 문을 열었지만, 손님은 한 명도 없었다. 복삿집 한편에 가려진 방에서 박 사장님이 슬그머니 등장한다. 바쁘실 줄 알았다는 율의 말에 "일이 있어야 바쁘지"라며 너털웃음을 짓는다.
35년 전, 처음 복삿집을 열었을 때만 해도 새학기나 중간·기말고사 기간이 되면 박 사장님은 저녁을 먹을 틈도 없이 바빴다. 지금처럼 복사기 성능도 좋지 않던 시절. 제본을 하려면 한 장 한 장 직접 넘기며 복사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복사기 레이저가 왕복하는 시간도 지금에 비하면 한참 더뎠더랬다. 아내도 아이를 업고 나와 손을 거들었다. 저녁밥은 셔터를 내린 뒤 자정이 넘어서야 먹을 수 있었다.
단골도 많았다. 이제 머리가 하얗게 센 1·2회 졸업생들도 졸업 후 꾸준히 찾아왔다. 박 사장님의 '깐깐함'을 아는 사람들은 외지에서 일부러 오기도 했다. 박 사장님은 돈보다 '신용'이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래서 복사한 걸 또 복사하거나, 원본이 너무 훼손된 경우엔 의뢰 자체를 받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배짱부린다'고도 하더라고요. 근데 복사 질이 너무 떨어지는 걸 우리 집에서 했다고 하면 그건 더 큰 피해를 입는 거잖아요. 돈이 우선이면 아무거나 받아서 다 복사하지. 근데 돈보단 신용이 더 중요하거든요."
장인 정신으로 일하는 박 사장님에게도 위기는 찾아왔다. 박 사장님이 겪은 가장 첫 번째 위기는 'IMF'였다. 가게를 연 지 11년 만에 찾아온 IMF는 혹독했다. 가계사정이 어려워지자 대학생들은 대부분 휴학계를 냈다. 학생들이 3분의 1은 줄어든 것처럼 느껴졌다. 이 위기는 복삿집에만 닥친 것이 아니었다. 저녁 무렵이면 시끌벅적하던 골목길에도 적막이 찾아왔다.
'황금기'는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경기는 서서히 회복됐지만 그 속도보다 더 빠르게 기술이 발전했다. 2000년대로 접어서자 가정마다 PC가 도입됐고, 가정용 프린터가 보급됐다. 그래도 간간이 복사하러 찾아오는 학생들이 있었지만, 2000년대 후반 대부분의 대학생이 노트북 한 대씩을 갖추게 되면서 학생들의 발길은 서서히 줄었다. 2010년대에는 스마트폰, 태블릿PC마저 등장했다. 노트북 속 화면과 태블릿 자료에 더 익숙해진 학생들은 더는 프린터물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됐다.
치열한 고민 끝에 작년엔 일을 그만두기로 마음먹었다. 부동산에 가게도 내놨다. 중고 복사기 2대도 처분했다. '미련 없이 털어버리자' 생각했다.
박 사장님은 가게를 접기로 마음먹고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90년대에만 해도 가게를 보러 수시로 사람들이 찾아왔다. 가게를 내놓을 생각도 없었는데, '혹시 나가게 되면 연락을 달라'며 명함을 주고 가는 사람들이었다. 그 사람들은 하나같이 다들 '목이 참 좋다'며 치켜세웠더랬다. 그러니 금방 팔리겠지 생각했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나도록 팔리지를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내놓은 매물을 거둬들였다.
어렵게 지켜낸 가게였다. 94년쯤으로 기억된다. 건물주가 부도나면서 건물이 경매에 넘어갔다. 세입자들은 건물 주인이 바뀌면 더 비싼 임대료를 내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떨었다. 세입자들은 빚을 내서 각자의 건물을 사들였다. 세월이 갈수록 장사는 안되지만, 그래도 '이 어려운 시기에 임대료를 안 내도 되는 게 어디냐'며 긍정적으로 생각해왔다.
하지만 코로나19라는 위기가 다시 찾아왔다. 끝이 어디인지도 모른다는 게 박 사장님을 더욱 힘들게 했다. 지난해 코로나19 뉴스를 처음 접했을 때만 해도 이 질병이 자신의 삶에 이렇게까지 영향을 미칠 줄 몰랐다. 그해 2월, 부산에서도 첫 확진자가 나왔다. 급속도로 감염이 퍼져나가더니 3월 개학이 미뤄졌다. '잠시겠지' 생각했지만, 또 2주가 미뤄졌고, 또다시 2주씩 개강이 미뤄지더니 결국 비대면 강의로 전환됐다.
여느 대학로 상권이 마찬가지겠지만, 학생들이 방학하면 상인들에게도 방학이 찾아온다. 주된 고객층이 학생들이라, 학생이 오지 않으면 장사를 이어가기가 어렵다. 게다가 동의대는 경사가 높다 보니, 다른 대학로보다 일반인 손님도 훨씬 적다. 이제까지는 1년에 여름과 겨울 두 번의 방학이 찾아왔다면, 작년엔 1년 내내 긴 방학이 이어진 셈이다.
"이제 나이도 70이 다 돼가서 몇 년이나 더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웃으면서 말했지만, 박 사장님의 말끝에 한숨이 묻어났다. 학생들의 방학은 끝났는데, 박 사장님의 긴 방학은 언제쯤 끝나려나.
서유리 기자 yool@busan.com
촬영·편집=이재화·김보경 PD, 진유민 작가, 정연욱 대학생인턴
그래픽=장은미 기자 mim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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