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환적이거나 시원하거나…남해 금산 보리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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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흘 사이에 경남 남해 금산 보리암을 두 번이나 다녀왔다. 처음에 갔을 때에는 비가 내리고 안개가 진하게 낀 덕분에 생긴 환상적인 풍경이 일품이었다. 두 번째 갔을 때에는 날이 환하게 개어 시원한 바다를 조망할 수 있었다. 같은 장소에서 경험한 두 가지 경치를 소개한다.

궂은 날엔 ‘운무의 바다’에 빠진 암자의 분위기 환상적
맑은 날엔 주세붕도 감탄했다는 남해 절경에 가슴 시원

기도 드리는 발걸음 끊이지 않는 ‘해수관음 성지’
허왕후 삼층석탑·이성계 비각에 담긴 전설 ‘눈길’




■안개 낀 암자

아침부터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오후에는 갠다는 일기예보를 믿고 남해고속도로를 달렸다. 하지만 오후 3~4시까지도 하늘은 맑아지지 않았다. 기상청을 원망하면서 보리암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암자로 올라가는 길에는 짙은 안개가 끼어 10m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국립공원 직원은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주의를 주었다. 남해 바다를 한눈에 담을 수 있도록 설치한 전망대도 이날은 무용지물이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짙은 안개뿐이었다. 보리암 주변은 그나마 사정이 나았다. 안개가 걷히는 것인지, 아니면 서서히 덮이는 것인지 공간적 여유가 아직 남아 있었다. 그런데 이 여유 덕분에 암자 주변은 그야말로 몽환적인 분위기에 싸여 있었다.

보리암의 주법당인 보광전은 ‘운무의 바다’를 항해하는 한 척의 배였다. 삶의 고해를 헤쳐 가는 중생을 보듬는 게 종교의 역할이 아니던가! 지금 이 풍경이야말로 불교의 진정한 의미를 잘 보여주는 한 장면이었다.

짙은 안개가 조금씩 옅어지기 시작했다. 보수 공사를 진행하고 있던 극락전 아래 바위들이 안개를 헤치고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바위들은 마치 보리암을 덮치는 사마와 맞서 싸우는 사대천왕처럼 위용당당하게 안개를 향해 어깨를 쭉 내밀었다.

젊은 목소리의 스님이 낭송하는 천수경이 보리암 경내에 퍼지기 시작했다. 염불 소리도 짙은 안개에 당황한 듯 처음에는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내 상황을 이해하고는 옅은 미소를 뿌리며 안개 속으로 조금씩 퍼져 나갔다. ‘자비하신 관세음께 귀의하오니/ 지혜의 배 어서 속히 올라지이다/ 자비하신 관세음께 귀의하오니/고통 바다 어서어서 건너지이다’



■시원한 바다

보리암은 예로부터 강원도 양양 낙산사, 경기도 강화 보문사, 전남 여수 향일암과 함께 ‘관세음보살을 모신 성스러운 장소’라는 뜻인 해수관음 성지였다. 보리암은 이 중에서도 기도의 효험이 좋다는 소문이 퍼져 기도를 드리려는 사람들의 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이처럼 관세음보살이 1년 365일 지키고 있는 남해 앞바다의 절경을 꼭 봐야겠다는 생각에 나흘 뒤 다시 보리암을 찾았다. 평일 오전 11시였지만 주차장 입구는 몰려든 차들로 정체를 빚고 있었다. 더욱 심해진 코로나19를 피해 숨을 쉬러 온 사람들이 밀린 탓이었다.

나흘 전과 달리 하늘은 맑았다. 아쉽다면 미세먼지가 심해 바다가 완벽히 깨끗하게 보이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산책로 주변에 쌓인 짙은 갈색 나뭇잎은 세월이 가을을 지나 겨울로 깊어가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특이한 모습의 삼불암은 숨을 헐떡이며 올라오는 관람객들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보리암 뒤편 금산봉수대에는 ‘명필 바위’가 있다. 이 바위에는 조선 중종 때 한림학사 주세붕이 금산에 올라 남해 앞바다의 절경을 보고 감탄하면서 새긴 문장이 남아 있다. ‘유홍문 상금산(由虹門 上錦山)’. ‘홍문 덕분에 금산에 올랐다’는 뜻이다. 홍문은 무지개 모양 문을 일컫는 이름인데 금산에는 홍문이 두 곳 있다.

봉수대에 올라 남해 앞바다를 내려다보면 주세붕이 왜 감탄을 금치 못했는지를 금세 알 수 있다. 나흘 전 짙은 안개에 숨었던 남해 앞바다의 섬들은 그야말로 눈을 깜박일 여유도 주지 않는 절경이었다.

보리암은 가야불교와도 깊은 인연을 맺은 사찰로 알려져 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75호인 목조관음보살좌상 불감과 제74호인 삼층석탑에 가야불교와 관련된 설화가 전하기 때문이다. 목조관음보살좌상 불감은 큰 대나무 조각을 배경으로 좌정하고 있는 향나무 관세음보살상이다. 전설에 따르면 가야를 건국한 수로왕의 부인인 허 왕후가 불상을 인도에서 모셔왔다. 해수관세음보살상 앞에 서 있는 삼층석탑은 원효대사가 금산에 처음 절을 세운 것을 기념하기 위해 인도에서 가져온 파사석으로 만든 것이라는 전설이 전한다. 물론 두 전설 모두 역사적으로 입증된 내용은 아니다.

금산의 원래 이름은 보광산이었다. 명칭이 금산으로 바뀐 것은 조선 태조 이성계 때문이었다. 그는 젊은 시절 보광산에 거처하면서 백일기도를 했다. 나중에 조선을 개국한 뒤 ‘비단 금(錦)’을 써서 산 이름을 금산으로 고쳤다.

보광전 옆으로 난 조그마한 오솔길을 따라 내려가면 이성계가 기도를 드린 장소로 갈 수 있다. 이곳에는 ‘하늘의 은덕을 입었다’는 뜻인 선은전이라는 비각이 있다. 이 비각에는 남해금산영웅기적비와 대한중흥송덕축성비가 서 있다. 이성계의 전설을 기념하기 위해 1903년에 만든 비각들이다. 이성계의 전설을 믿든 말든 선은전은 한 번 내려가 볼 만한 가치가 있다. 사람들이 거의 다니지 않기 때문에 조용하게 산책을 즐길 수 있다. 게다가 비각 앞 바위에 앉아 편안하게 바다를 내려다보는 즐거움도 누릴 수 있다.

이성계도 기도를 드리다 해질 무렵이 되면 이곳에 앉아 남해의 석양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는 바다 너머로 떨어지는 해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수평선 아래로 넘어가는 해는 고려 왕조이며, 그는 내일 아침 다시 떠오를 찬란한 해라고 믿었을까. 글·사진=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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