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상징 ‘수치의 기둥’ 철거… 홍콩 민주주의 흔적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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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시민지원애국민주운동연합회(지련회)가 톈안먼 민주화 시위를 기억하기 위해 매년 진행하는 추모 행사 ‘수치의 기둥’ 세정식(왼쪽)과 22일 수치의 기둥이 기습 철거되는 모습. AP로이터연합뉴스

최근 홍콩 입법회를 친중파가 거의 장악한 데 이어, 홍콩 내 민주화 흔적들도 하나둘 강압적인 방식으로 지워지고 있다.

AFP통신은 23일(현지시간) 홍콩대에 설치돼 있던 톈안먼 민주화 시위를 기리는 높이 8m 조각상 ‘수치의 기둥’이 철저한 보안 속에 철거됐다고 보도했다. 중국에서는 언급조차 금기시되는 게 톈안문 민주화 시위지만, 이를 추모하는 거대 조각상은 지난 24년간 홍콩대의 교정에 당당히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조각상이 22일 밤 기습적으로 철거됐다. 대학 직원들은 보안을 위해 바닥부터 상층까지 덮는 시트와 차단막을 이용해 조각상을 가렸으며, 경호 인력들이 언론 취재를 막았다고 AFP통신은 전했다.

1997년 덴마크 작가 제작 기증
톈안먼 민주화 시위 추모 조각상
홍콩대학 직원들 심야 기습 철거
경호 인력, 언론 접근마저 막아
친중파, 의회도 장악 중국화 가속

이와 관련, 홍콩대는 23일 성명을 통해 수치의 기둥을 해체해 다른 곳으로 옮겼다고 발표했다. 홍콩대는 “외부 법률 자문과 대학에 대한 리스크 평가에 근거해 결정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이 때의 리스크란 지난해 6월 시행된 홍콩국가보안법을 말한다. 홍콩국가보안법에 따르면 국가 분열, 국가정권 전복, 테러 활동, 외국 세력과의 결탁 등 4가지 범죄를 최고 무기징역형으로 처벌할 수 있다.

수치의 기둥은 1997년 홍콩대 캠퍼스에 설치된 조형물로, 민주화 시위자들의 번민에 찬 모습과 고문을 받아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홍콩대는 수치의 기둥이 홍콩시민지원애국민주운동연합회(지련회)의 소유라고 보고, 지련회가 올 9월 홍콩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해산하자 그 직후 이 조각상을 철거하라고 지련회에 통보해 왔다. 지련회는 1990년부터 매년 6월 4일 톈안먼 민주화 시위 추모 촛불행사를 진행해온 단체다. 덴마크 작가 옌스 갤치옷이 수치의 기둥을 제작해 1997년 지련회에 기증했고, 지련회는 이를 홍콩대 학생회와 함께 홍콩대에 전시하며 매년 세정식을 진행해 왔다.

하지만 홍콩국가보안법 시행 후 첫 세정식인 올 5월 행사는 삼엄한 감시 속에 개최됐다. 친중 진영은 지련회의 ‘일당 독재 종식’ 강령이 홍콩국가보안법 위반이라고 주장하는 가운데, 올해 세정식에서도 참가자들은 “일당 독재 종식” 등의 구호를 외쳤다. 당시 홍콩 제1야당인 민주당의 전 주석 앨버트 호는 “조각상 세정식 행사는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면서 “홍콩이 여전히 살아 있는지 아니면 이미 죽었는지를 보여 준다”고 말했다. 이날 이후 홍콩 내에서는 홍콩대 수치의 기둥의 존치 여부가 불확실해졌다는 관측이 나왔다. 최근 홍콩 입법회마저 친중파로 꾸려지면서 수치의 기둥의 운명은 더욱 철거 쪽으로 기운 것으로 보인다.

수치의 기둥을 만든 작가 옌스 갤치옷은 이날 철거에 대해 사전 홍콩대로부터 통보를 받지 못했다고 말했으며 “이상하고 충격적인 조치다. 만약 당국이 조각상을 파괴한다면 고소할 것이다”고 밝혔다.

앞서 홍콩 당국은 지련회가 30여 년간 수집해 온 톈안먼 시위 관련 자료들을 모아놓은 인터넷 사이트와 소셜미디어 계정을 폐쇄했다. 또한 지련회의 톈안먼 추모기념관도 당국의 단속 속에서 문을 닫았다. 이로써 홍콩에서는 톈안먼 민주화시위를 기억할 수 있는 장소도, 자료도, 상징물도 모두 사라지게 됐다.

이현정 기자 yourfoot@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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