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상처를 마주보는 용기
서정아 소설가
매일 아침 자전거를 타고 도서관으로 출근한다. 비유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정말 오랜만에 출퇴근이라는 것을 하고 있다. 두 달 전부터 공공도서관의 상주작가로 일을 하게 된 것이다. 한때는 책에 둘러싸인 채 살아가는 사서나 서점 주인이 되고 싶다는 로망을 가진 적도 있었는데, 어쨌거나 도서관에서 잠시나마 일하게 되었으니 일종의 소원 풀이는 하게 된 셈이다.
상주작가로 지내는 동안 지역 주민들을 위한 글쓰기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로 되어 있어서, 그 첫 번째 프로그램으로 ‘치유의 글쓰기’라는 강좌를 기획했다. 그런데 프로그램 명을 그렇게 정하고 수강생을 본격적으로 모집하게 되자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너무 거창한 제목 같았다. 치유라니. 내 상처도 스스로 돌보지 못하는 주제에, 사이비 종교의 포교 문구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현혹하는 단어를 쉽게 써버렸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이미 도서관 게시판에 공고는 올라갔고, 부디 수강 신청을 하는 사람들이 ‘치유’보다 ‘글쓰기’에 관심을 갖고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러나 강의 첫 시간 수강생들에게 수강 신청 동기를 물었을 때, 나는 그들 대부분이 ‘치유’라는 단어에 꽂혀 어떤 기대감을 갖고 왔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죄인이 된 기분으로 수강생들에게 말했다. “신청 동기를 모두 듣고 나니 걱정입니다. 강좌 명을 너무 거창하게 만든 것 같아요. 치유 못 시켜드리면 어쩌죠?” 수강생들은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들었다는 듯이 하하하, 하고 웃었지만, 그건 웃기려고 한 말이 아니라 솔직한 내 심정이었다. 어디 가서 명상이든 요가든 속성으로 배워 와야 하나, 아니면 인센스 스틱이나 싱잉볼이라도 구해 와야 하나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본격적인 수업이 시작되고 나서야 나는 그것이 괜한 걱정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2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수강생들은 이미 스스로 치유할 힘을 내부에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아픔을 글로 꺼내놓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고 개인의 내밀한 이야기를 타인에게 보여주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일과 가정폭력으로 고통 받은 일과 직장에서 당한 괴롭힘 등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글로 썼다. 그들의 마음에는 용기가 있었다. 지레 겁먹은 것은 오직 나뿐이었다.
글쓰기의 방법적 측면에서는 분명 서툰 이들이 많았지만 그런 것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자신만의 상처와 고통을 글로 표현해냈다는 것이고, 그것을 타인과 나누었다는 것이고, 같이 울었다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모두 함께 울었다. 자신의 글을 소리 내어 읽으며 울고, 남의 글을 보며 울고, 그 글에 대해 이야기하며 다시 울었다. 그렇게 모든 걸 털어놓은 진솔한 글의 알맹이 앞에서 나는 표현이 진부하다든지 문장의 주술관계가 맞지 않다든지 하는 기술적인 지적을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이 써낸 글에서 그런 건 정말이지 중요한 게 아니었다.
SNS에 올라오는 사진들을 보면 세상 사람들이 나만 빼고 다들 행복한 것처럼 보이는 착시가 일어난다. 그러나 그 속을 열어보면 깊은 슬픔을 홀로 껴안은 채 외롭게 웅크리고 있는 또 다른 자아들이 있다. 가장 가까운 가족으로부터, 매일 만나는 동료로부터, 냉혹하고 자비 없는 세상으로부터 깊게 입은 상처를 치유하지 못한 채 오래도록 혼자 앓고 있는 것이다.
파울로 코엘료는 에서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상처를 마주보는 용기가 필요합니다’라고 썼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상처받은 마음을 열어 오래 들여다보고 타인과 공유하는 일이다. 그 상처를 정확히 마주볼 때 우리는 함께 울고 서로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마침내 그 힘으로 과거를 뛰어넘을 수 있다. 인센스 스틱이나 싱잉볼은 없어도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