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MA 컬렉션, 미술관 보고(寶庫) 들여다보기](169) 일필휘지 흔적으로 드러나는 만물의 기운, 이강소 ‘섬으로부터 20031’
이강소(1934~)는 만물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소멸하는 과정을 탐구하는 작가이다. 그는 작가의 주관성을 강요하는 예술이 아닌, 관람객이 자유롭게 작품과 교류하고 직관할 수 있는 작업 세계를 추구해오고 있다.
서울대 회화과를 졸업한 후 이강소는 1968년 소규모 미술 그룹인 ‘신체제(New System)’를 결성하고 한국적 미술의 정립을 위한 연구를 시작했다. 추상미술 계열의 작업을 실험하던 그는 ‘실험과 전위의 시기’인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입체, 설치, 퍼포먼스 등 다양한 분야를 실험하며 현대미술운동을 이어나갔다.
이강소는 1971년에 열린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 그룹전에서 설치 작업인 ‘여백’을 발표했다. 이 작품은 실제 낙동강 주변의 갈대를 가져와 전시장에 설치한 것으로, 훗날 이강소의 작품 세계 전반을 관통하는 철학적 사유 체계인 ‘허(虛)’의 출발점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명동화랑에서 1973년 가진 첫 개인전에서는 실제 술집에서 사용하는 테이블과 의자로 선술집을 재현한 ‘소멸’을 선보이기도 했다. 제9회 파리비엔날레(1975년)에 한국 대표로 참가한 이강소는 닭 퍼포먼스와 사슴 뼈를 재조립한 작업을 발표하여 큰 주목을 받았다. 이외에도 ‘페인팅 78-1’ 비디오 작업, ‘누드 퍼포먼스’, ‘낙동강 이벤트’ 퍼포먼스 작업 등 매체와 장르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형식을 실험했다.
전방위로 실험적 작업을 시도했던 이강소는 1970년대 중반부터 평면, 입체, 조각 등 전통적 미술의 형식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작업을 중심으로 작품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중반에는 표현적인 붓질로 화면을 뒤덮는 작품들이 제작됐고, 이후로는 오리, 사슴, 배, 집과 같은 형태가 등장했다.
최근 이강소의 작업은 살아있는 기(氣), 에너지의 교류를 일필휘지의 붓질로 드러내며, 그와 그의 작품을 둘러싼 관계성을 계속해서 탐구해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섬으로부터 20031’(2000)은 옅은 색 바탕 위로 최소한의 빠른 붓질로 ‘흔적’을 담은 작품이다.
이강소는 다양한 형식을 통해 일관되게 ‘흔적으로서의 이미지’를 탐구해왔다. 작품에서 드러나는 추상적인 붓질은 서구 미술의 조형성이 아닌, 동아시아의 정신성을 실현하고자 하는 그의 의지이기도 하다. 절제된 표현 속에서도 이강소의 직관에 따라 흐르는 ‘기운생동’ 붓질은 관람자에게 환영의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조민혜 부산시립미술관 기록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