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란수도 부산, 부상병 치료 ‘국군 병원’ 핵심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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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발발 72년을 맞는 가운데 통도사가 국내 사찰 가운데 처음으로 국가현충시설로 지정돼 지난 18일 현충시설 지정 호국영령 추모 위령재가 열렸다. 한국전쟁 당시 통도사에 ‘제31육군병원 통도사 분원’이 있었다는 것이 확인됨에 따라 국가현충시설로 지정됐다. 한국전쟁 당시 부산에 있었던 육군병원의 실태는 어떠했을까. 서구청이 올 초 발간한 (글 유승훈 나여경)과 울산 이병길 시인의 조사, (국군의무사령부, 2004), 논문 ‘한국전쟁 전후 부산지역 국공립의료기관의 재편과 역사계승문제’(서용태, 2013) 등을 토대로 살펴본다.

한국전쟁 발발 이후 피란수도 부산은 군사 의료의 핵심지역이었다. 부산에는 1949년 창설한 제5육군병원이 이미 있었고, 전쟁 중 제3·제15·제31·제36육군병원이 자리 잡았다.

제3·15·31·36 육군병원 진료
‘제3 병원’ 3000명 수용 대규모
보수동 책방골목 형성에 큰 영향
제31 정양병원은 통도사에 분원

이중 단일 병원으로 가장 큰 군병원이 제3육군병원이었다. 원래 광주에서 창설했다가 한국전쟁 발발 이후 진주 마산 경주로 옮겨 다니다가 1950년 9월 부산 중구 대청동 광일초등학교에 자리를 잡았다. 제3육군병원은 1951년 1950명을 수용했으며 1953년 3000명을 수용할 수 있게끔 규모를 키웠는데 인근 보수동 책방골목 형성에 큰 역할을 했다. 환자뿐 아니라 면회 온 사람들이 심심해서 책방을 이용하면서 책방골목의 명성을 더했다는 거다.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리는 장기려 박사가 월남해서 1951년 7월 영도 영선동에 복음병원을 설립하기 전까지 7개월여 근무한 곳이 제3육군병원이다. 장 박사는 상이병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기 위해 씨알의 사상가 함석헌을 초대해 제3육군병원 천막교회에서 강론하게 하였다고 한다. 1953년 5월 ‘20세기 최고의 여성 알토’라는 미국 성악가 매리언 앤더슨이 1만여 청중이 모인 제3육군병원 광장에서 위문공연을 했다는 기사도 있다.

제5육군병원은 부산에서 창설한 가장 큰 체제의 군병원이었다. 본원과 9개 병동, 동래분원 체제를 갖추고서 1951년 2388명을 수용했으며 1953년 3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다. 본원과 제1병동은 옛 부산시청 별관(일제강점기 미나카이 백화점 건물, 오늘날 롯데백화점 광복점 자리), 제2병동은 경남여중, 제3병동은 부산시립병원(현 부산대병원), 제5병동은 경남중, 제6병동은 토성초등, 제7병동은 동주상업중, 제8병동은 경남지구 계엄사령부, 제9병동은 송도지구 일대, 제10병동은 수정초등, 동래분원은 동래 온천장에 있었다.

‘날이 완전히 새고 건너편 집 점포 문이 열릴 즈음이 되면 토성국민학교로, 제3육군병원으로, 제5육군병원으로 자전거 꽁무니에 산처럼 올려 실은 국수상자가 내달리는 것이었다.’ 이호철의 장편소설 에 나오는 문장으로, 초장동에서 국수를 뽑아 원도심의 군병원들을 다니면서 배달하는 한국전쟁 당시의 장면이다. 토성초등학교를 제3·제5육군병원과 함께 언급한 것을 보면 그곳의 제5육군병원 제6병동도 규모가 있었던 거 같다.

통도사에 분원을 둔 제31육군병원은 1950년 12월 대전에서 창설해 1951년 1월 동래 온천 가까운 들판 한가운데 세운 천막촌 정양병원이었다. 정양병원은 휴양한 뒤 원대 복귀시키는 요양병원이었으나 전사자가 속출했다고 한다. ‘천막 227동을 가설하여 환자를 수용 치료했다’는 기록이 있는 제31육군정양병원은 1951년 3000명 수용능력이었으나 환자 수가 무려 4600여 명에 이르렀다. 그래서 통도사 분원이 만들어졌다. 범어사 분원도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범어사의 자료 확보가 필요할 것 같다. 통도사 분원에는 1952년 4월까지 3000여 명이 수용돼 치료를 받았다. 사찰을 군병원 용도로 완전히 다 내준 것이었다. 통도사가 사찰의 무참한 훼손 속에서 호국불교의 등불을 밝혀야 했던 국난의 시절이었다.

부산 원도심에는 2개의 군병원이 추가로 있었다. 그중 제15육군병원은 1950년 9월 경주에서 창설했으나 그해 12월 후퇴해 오늘날 부산대병원에 자리 잡았다. 장소를 전시 징발한 것이었는데 당시 이곳에 있던 부산시립병원은 보수동의 한 2층 목조건물로 옮겨 진료를 이어갔다. 제15육군병원은 1951년 2776명을 수용했으며, 교착 중이던 전황 속에서 1952년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대신 이곳은 제5육군병원 제3병동으로 전환했다. 군병원들이 계속 있었기 때문에 “한국전쟁 때 현 부산대병원 자리에 육군병원이 있었다”는 기억이 사람들에게 강하게 남아 있다. 다른 하나의 군병원은 1950년 12월 부산에서 창설한 제36육군병원이었다. 서울대 의대 일부 교직원과 의료기자재를 징발해 주로 고위직 진료를 하다가 전황 악화에 따라 군 장병 진료까지 담당했다. 중구 동주여상 교사와 그 맞은편 대각사를 징발해 설치했는데 전세가 호전되던 1951년 6월 서울로 이동했다.

아직 잘 드러나 있지 않은 한국전쟁 당시 부산 군병원들의 실태를 파악하는 것은 피란수도 부산의 속모습을 재구성한다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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