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수의 지금 여기] 위험한 신호탄인가, 해빙의 마중물인가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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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

12일 오후 일본 도쿄 내 사찰 '조조지'에서 아베 신조 전 총리 장례식이 끝난 뒤 운구차가 나가는 모습. 많은 시민이 몰려 나와 아베 전 총리를 추모하고 있다. 연합뉴스 12일 오후 일본 도쿄 내 사찰 '조조지'에서 아베 신조 전 총리 장례식이 끝난 뒤 운구차가 나가는 모습. 많은 시민이 몰려 나와 아베 전 총리를 추모하고 있다. 연합뉴스

일본 보수 우익의 ‘심장’이 총탄에 스러졌다. 8일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의 피격 사망은 일본 열도 안팎에 거대한 충격파를 안긴다. 21세기 하고도 20년이나 흐른 최첨단의 시대다. 쇠락했다고는 하나 미국과 중국 G2에 이은 세계 경제 규모 3위의 엄연한 대국 일본이다. 전 총리가 백주대낮에 총격을 받는 일이라니. 더군다나 일본은 총기 소유에 관용이 없고 총기 폭력 발생률이 가장 낮은 나라 중 하나다.

그러나 일본에서 정치인 피습은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있는 역사의 비극이다. 아베 신조의 죽음 역시 안타깝지만 그 연장선에 있다. 그의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 역시 1960년 당시 총리를 지내다 칼에 찔려 중상을 입은 바 있다. 비극의 씨앗은 일찍이 일본 근현대사에서 자행된 정치인 테러와 암살로 거슬러 오른다. 1921년 하라 타카시 전 총리, 1930년 하마구치 오사키 전 총리가 희생됐고, 1936년 육군 청년 장교들의 쿠데타로 전 총리 다카하시 고레키요와 사이토 마코토 대신이 피살됐다.


일본 보수 우익 상징 아베의 죽음

그가 숭앙한 정신적·사상적 지주는

메이지 유신 설계한 요시다 쇼인

중심의 소멸로 우파 혼란 예상되나

되레 강경파 득세의 빌미 될 수도

가능성의 공간 냉철하게 직시해야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테러가 의회정치를 훼손시키기 위한 체제전복적 의도였다면 전후에는 정치인 개인에 대한 습격이라는 성격이 두드러진다. 그러나 공통점은 대부분 우익에 의해 자행된다는 점. 아무튼 전후에도 끊이지 않던 정치인 습격은 2000년대 이후까지도 이어졌다. 2014년 이시이 히로키 도쿄 세타가야구 하원 의원의 흉기 피살, 2019년 이토 가즈나가 나가사키 시장의 총격 피습 사망은 근년에 일본 사회를 충격에 빠트린 대표적 사례다.

이번 아베 피습은 일단 정치적 목적과 결부돼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베의 때 이른 사망 자체가 ‘핵폭탄급’이라는 데 이견을 달기 힘들다. 아베 신조라는, 일본 우익의 상징성 때문이다. ‘52세 최연소 총리 취임’ ‘총재임 8년 9개월 최장수 총리’ 등의 기록에서 보듯, 일본 정계를 실질적으로 좌지우지한 인물이 아닌가. 퇴임 뒤에도 자민당 내 최고 파벌인 아베파(세이와정책연구회)의 수장으로 현 기시다 후미오 총리의 ‘상왕’ 역할을 해 왔다.

아베의 사상적 발원지를 살펴보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다. 일본의 과거 행적과 현재, 미래의 행로까지 짐작게 하는 핵심 단서이기 때문이다. 아베는 일왕도 발길을 끊은 야스쿠니 신사를 2013년 참배한 이후 해마다 공물 봉납을 빼먹은 적이 없다. A급 전범 14명을 포함해 246만여 명을 합사한 일본 내 가장 규모가 큰 이 신사의 맨 상단에 새겨진 이름이 요시다 쇼인이다. 막부를 타도하고 천황제 국가체제를 꿈꾼 그는 메이지 일본을 설계한 인물이다. 160여 년 전 이미 한반도 정벌론을 주장했던 군국주의 이론의 뿌리이기도 하다. ‘쇼카손주쿠’라는 학당에서 그가 길렀던 제자들이 메이지 신정부의 요직을 차지한 뒤로 그의 사상은 오늘날 일본의 보수 우익 정치 신념의 토대로 이어졌다. 쇼인을 거의 신적 대상으로 숭앙하는 이가 바로 아베인 것이다.

이로부터 사상적 유산을 이어받은 아베가 추진한 각종 정책은 우리가 잘 알고 있듯 대부분 급격한 우경화 색채를 띤다. 2002년 북·일 관계를 파탄 낸 장본인이 바로 당시 관방 부장관 아베였으며, 2019년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 보복 조처를 취한 것도 아베 내각이었다. 아베 필생의 과업은 바로 평화헌법을 개정해 종국적으로 ‘전쟁 가능 국가’가 되는 것이다.

우익의 상징 아베의 죽음이 일본 역사의 물줄기를 어떤 식으로 바꿀지는 단언하기 힘들다. 중심의 소멸로 인한 우파의 혼란은 일단 불가피할 것이다. 강경 보수 성향의 산케이신문은 “아베의 부재로 개헌과 방위력 강화를 위한 추진력을 잃게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마땅한 후계자가 없다 보니 자민당 내 최대 파벌인 아베파의 세력 약화와 분열까지 점치는 언론도 있다. 힘의 진공상태 속에서 기시다 총리가 강경파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다소 유연한 행보를 걸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그렇다면 우리의 기대는 보편적 인권을 무시한 채 민족주의에 매몰된 행태를 보인 아베의 길이 조금이라도 바뀌는 쪽으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그렇듯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아베의 죽음과 맞물린 이번 참의원 선거 결과 그에 대한 추모와 동정 여론이 주류를 이루면서 집권 자민당이 압승했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아베는 죽었지만 그 유산은 굳건하다. 동정 열기를 타고 강경파 입지가 더 넓어져 개헌 논의가 급물살을 탈지도 모를 일이다. 우파의 목소리에 더 큰 힘이 실린다면 해빙을 기대했던 한·일 관계의 앞날이 순탄할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명백한 가능성의 공간이다. 우리로서는 눈을 크게 뜨고 새롭게 전개되는 사태의 추이를 면밀히 살피면서 냉철한 판단을 해야 할 때다.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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