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희와 함께 읽는 우리 시대 문화풍경] ‘봄의 제전’과 부산음악의 미래
부산대 대학원 예술·문화와 영상매체협동과정 강사
‘봄의 제전’은 문제작이다. 처녀를 산 제물로 바치는 제전을 그렸다. 천재 안무가 니진스키와 ‘불새’의 작곡가 스트라빈스키가 결합했다. 음악과 안무, 주제와 내용, 형식과 기법 어느 길이든 파격이고 전위다. 1913년 파리 샹젤리제 극장에서 초연한 이 작품은 비난만큼이나 상찬이 뒤따랐다. 전통과의 단절을 시도한 도발적 실험이자 새로운 예술의 탐색이었기 때문이다. 역사학자 모드리스 엑스타인스는 이 작품을 빌어 문화사적 시각에서 모더니즘의 탄생을 풀어내었다. ‘봄의 제전’은 예술의 전통적 개념에 대한 전복, 해방과 쇄신의 열망, 죽음이 삶을 찬미하는 아이러니로 출렁이는 죽음의 춤이다. 세기말 시대정신의 표출은 국제질서의 재편을 추동한 제1차 세계대전의 신호탄이었는지도 모른다.
지난주 서울에서 ‘봄의 제전’을 만났다. 해외 교향악단의 젊은 음악가들이 집으로 돌아온다는 컨셉의 고잉홈 위크 페스티벌 개막공연이었다. ‘지휘자 없이’ 연주한다는 소식은 세간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수준급 지휘자도 쉽게 시도하지 않는 난곡으로, 끊임없는 박자의 변전, 변화무쌍한 리듬, 불협화음의 연속 등 현대음악의 급진적 어법을 구사한다. 기대와 우려로 출발한 연주가 끝났을 때 쉽게 환호하지 못했다. 경이로웠다. 파격적인 시도의 성공비결은 단지 국내외 14개국 50개 교향악단 소속 연주자들의 역량에만 있지 않다. 단연 한순간도 흐트러지지 않았던 밀도 높은 호흡에 있다. 지휘자의 통제가 아니라 서로의 소리를 듣고 교감하면서 씨줄과 날줄이 치밀한 하모니를 그려내었다. 연주가 끝나자 연주자 전원이 객석을 향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모두가 지휘자라는 의미다.
두루 알다시피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는 어벤저스급이다. 축제 시즌에만 운영하는 까닭에 연주자의 실력은 기본이다. 저명한 연주단체에서 활동하는 빼어난 연주자들을 초청해 오케스트라를 구성한다. 부산의 랜드마크로 기능할 오페라하우스를 상주단체가 아니라 시즌제로 운영한다는 소식에 상심이 깊다. 시즌제 연주단체의 본질과는 거리가 먼 구상이다. 자칫 단기 일자리만 창출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상주단체는 제작극장의 근간이다. 더구나 청년실업시대에 상주단체 구성과 관련한 논의가 공론화되지 못하는 현실에서 과연 누구를 탓해야 할까? 문화예술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집단 이기주의, 사리사욕을 좇는 지역 문화토호의 행태, 어정쩡한 강단 논리와 소통의 부재, 기득권의 논리에 맞서는 결기와 생산적인 토론문화의 부재들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부산시와 문화기관, 음악사회, 대학은 자유로운가. 삶의 어느 자리에서든 ‘봄의 제전’에 견줄 수 없는 불협화음과 변칙적 리듬이 존재한다. 상호신뢰와 협력으로 조화로운 ‘예술의 제전’을 꿈꾸는 것은 지나친 바람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