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소설집 펴낸 정형남 “우리의 고향은 자연이다”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단편 8편 묶은 ‘심향’ 출간
트라우마·과오·인과응보 등
작가의 직간접적 체험 담아
한때 속세 떠나 산중 생활
“무상함 속 자연의 질서 절감”

소설집 <심향>을 선보인 정형남 소설가. 부산일보 DB 소설집 <심향>을 선보인 정형남 소설가. 부산일보 DB

정형남(75) 소설가가 소설집 〈심향(深鄕)〉(산지니)을 출간했다. 그는 “앞으로 장편 두어 편 정도를 더 쓸 작정이지만 소설집은 이것이 마지막이 될 것”이라며 “이제 편히 지낼 나이가 된 거 같다”고 했다. 장편 13편, 소설집 6권을 낸 그다.

자칭 ‘마지막 소설집’에는 단편 8편이 실렸다. 소설이 인간에 대한 탐구라면 각 단편들은 인간을 사로잡는, 헤어나지 못하게 하는 ‘하나의 무엇’에 집중하고 있다. 인간에게 꽂히는 하나의 사건, 이미지, 기억 등이 그것인데 작가의 직간접적 체험이 녹아 있을 것 같다.



단편 ‘점(點)’은 어릴 적 외가에 갔다가 목격한 소의 목을 치는 잔인한 장면의 트라우마를, ‘금빛백금거미’는 아름답고 긴 손가락을 지녔던 피아니스트의 비운에 대한 회한과 안타까움을 소재로 하고 있다. 죄책감을 다룬 작품도 있는데 ‘겨울 문신’은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고 산속에서 여자인 줄 알고 할머니를 덮쳤던 ‘떨칠 수 없는 병통의 과오’를, ‘이발사’는 베트남 전쟁 때 죄 없는 민간인들을 죽게 한 뒤 치르는 인과응보의 운명을 주조로 삼고 있다. ‘낙화’는 누천년 세월을 되풀이해서 남녀 사이에서 일어나곤 하는, 자신의 생명을 던져야 하는 ‘낙화암의 아픈 운명적 사연’들, ‘갈목 빗자루’는 가난에 대한 열등감과 한을 벗어나지 못하고 인색하게 살다가 볼품없이 가버리는 딱하고 답답한 인생을 다루고 있다.

트라우마, 죄책감, 헤어날 수 없는 과오, 그리고 콤플렉스 등은 인간을 구속하지만 인간을 형성하는 그 무엇이다. 그런 것 하나 없는 인간은 없다. 삶 자체가 그것들에 붙들리고, 속박받을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한계 속에서 한계 지워져 살아가는 아픈 존재가 인간이다. 그 아픔이 인간을 형성하는 거다. 표제작 ‘심향’은 ‘깊은 고향’이란 뜻으로 신해철의 노래 ‘민물장어의 꿈’이 연상되는 작품이다. 사람한테 잡혀 먹히기 직전 ‘태어난 그곳 바다’로 탈출하는 장어를 그렸다.

마지막에 실린 ‘바람의 눈빛’은 속세를 떠나 승복의 산중 생활을 했던 작가의 경험이 묻어나는 작품이다. 폐허의 암자에서 홀로 수행 생활을 하던 중 그를 지켜보는 듯한 적의의 살기 어린 눈빛을 느끼는데 결국 그것은 보이지 않는 바람의 눈빛이었을 따름이었다는 거다. 작가는 “세월의 무상함을 깨물며 무한대의 시공과 자연의 질서를 절감한다”고 했다. 허무 아픔 희열…, 그 모든 것이 자연의 일부이며 자연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거다. 자연이 심향(深鄕)이다.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