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신춘문예-평론] 농담하는 미친 광대의 춤과 노래 - ‘조커’에 나타나는 광기의 에피스테메/조현준
‘광인-광대’의 데페이즈망과 몸
고담이라는 도시에 거주하는 남성 아서 플렉(호아킨 피닉스 분)은 광대 인력을 제공하는 한 업체에서 일하는 코미디언이다. 문제는 그가 감정의 격렬한 움직임이 발생하면 웃음을 참지 못하는 광증을 앓고 있다는 점이다. 기쁠 때 그는 웃는다. 그러나 그는 슬플 때도 웃는다. 긴장하거나 분노하거나, 심지어 극도의 공포를 느낄 때도 그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숨이 넘어갈 듯 웃기만 한다. 의사들은 아서의 그런 증상에 대해 ‘감정실금(Pseudobulbar affect, PBA)’이라는 진단을 내린다.
확실히 아서 플렉의 웃음은 정말 이상하다. 그는 사나운 불량배들이 자신을 위협하자 난데없이 크게 웃기 시작한다. 그래서 아서의 광기는 기분 나쁘다. 마치 조롱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는 가끔 너무나 우울할 때도 쉬지 않고 웃기 시작한다. 그래서 아서의 광기는 무섭기도 하다. 울어야 할 때 ‘미친 듯이’ 웃어서 낯설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서를 싫어하고 기피하며 혐오하기까지 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평소 조용할 때의 아서는 괜찮지만, 뭐 사실은 별다른 관심도 없지만, 마치 바퀴벌레나 거미의 신체를 목격했을 때처럼 아서의 신체에서 발원하는 커다란 웃음소리를 통해 광기에 잠식된 존재가 드러날 때 사람들은 그와 그의 신체를 혐오하기 시작한다.
아서라는 현상은 그의 신체와 행위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혐오나 공포나 두려움이나 걱정 등 특정한 정동(情動, Affect)의 작동으로 나타난다. 이로 인해 그의 신체는 일차적으로 돌봄의 대상으로 객체화된다. 아서 플렉이라는 인간 자체와 동일시되는 그 ‘광기의 신체’는 낯설고 이상한 사물이며 따라서 그 신체들은 교정할 대상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만약 그 교정이 실패할 경우 그 신체-사물은 추방되거나 폐기되어야만 하므로, 그런 처지에 몰리지 않으려면 ‘보통이나 정상의 경계’ 안쪽으로 진입할 때까지 환자 스스로도 교정을 반복하는 동시에 순응하는 태도를 유지해야만 한다. 영화가 아서 플렉을 사회복지사를 통해 의사의 처방을 받아 끊임없이 약을 복용해야만 하는 상태로 보여주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논의에 기대어 조금만 더 생각해보자. 푸코는 처벌의 형식, 감금과 징벌의 규율이 형벌에 관한 법의 체계 안에서 발견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며, 마찬가지로 광기와 정신병에 관한 진단과 실천이 정신의학의 체계에 의해 결정되고 수행되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광기와 범죄에 대한 각각의 담론체계, 즉 에피스테메(Episteme)는 통치와 규율이라는 사회적 제재와의 관계를 통해 제도와 실천의 형태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제도는 법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나 통치성의 언어를 담당했고, 실천은 감금의 형태로 나타나 정신병원과 교도소라는 건축물을 발명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도 있다. 혹시 '조커'는 일상성의 담론이 마련한 자리가 아닌 다른 지점에서 그의 신체를 관찰하기를 시도하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이 영화는 우리에게 이 ‘미친 사람’의 출현이, 알랭 바디우(Alain Badiou)가 ‘사건(Evenement/Event)’이라고도 부르는, 기존의 시공간과 그 이후의 시공간을 가르는 일종의 결절일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확실히 '조커'가 보여주는 것은 ‘에일리언’이나 ‘E.T.’처럼 낯설고 이질적인 것들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기존의 무언가가 새롭게 변화된 것에 더 가깝다. 아서 플렉이라는 광기의 신체를 통해 ‘조커’라는 새로운 개체가 나타났고, 그 개체는 광기와 범죄에 대해 스스로 정의하는 주체가 되었다. 이를테면 에피스테메가 정의내리는 광기가 아닌 ‘진짜 광기적인 주체의 탄생’이라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며, 이제 조커의 신체는 다른 주체들의 내적 현실을 수정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사건이 발생한 장소 그 자체이다.
서양에서 ‘광대(Clown)’는 아이들이 초면에도 아무런 경계심 없이 다가가 장난을 칠 정도로 익숙한 대상이다. 광대는 기원전 2400년경인 이집트 5왕조의 기록을 통해 나타난다. 지금 형태의 광대 의상은 16세기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18세기 사이 유럽에서 크게 유행했던 ‘콤메디아 델라르테(Commedia dell‘arte)’에 등장하는 전형적인 캐릭터 중 하나인 하인이자 사기꾼 캐릭터인 ‘잔니(Zanni)’의 분장으로부터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얼굴을 알록달록하게 물들이는 특유의 분장은 19세기 말 근대적 서커스에 광대 캐릭터가 등장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유럽을 비롯한 서양에서 광대는 오랜 역사를 통해 변형을 거치며 이어져 내려온 문화적 산물인 것이다.
그런데 그 익숙한 ‘광대’가 범죄와 파괴의 장소에서 범죄자나 악당, 빌런으로 출현하기 시작했다. 영화 전반을 지배하는 이러한 형식은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 낯선 방식으로 출현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데페이즈망(Depaysement)으로 볼 수 있다. 프랑스어 데페이즈망은 사전적으로는 ‘고향으로부터의 추방이나 유배, 낯선 느낌, 환경의 변화’ 등을 뜻하는 단어이다. 겨울비가 내리는 거리 풍경에 빗방울 대신 검은색 중절모와 코트를 착용하고 우산을 든 수많은 남성의 이미지들을 배치한 르네 마그리트(Rene Magritte)의 '골콩드(Golconde)'나 소변기를 미술관이라는 낯선 공간에 전시하는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의 '샘(Fontaine)'처럼, 데페이즈망은 사실적으로 표현한 일상적인 사물을 그 사물에 내재하는 맥락과 전혀 다른 낯선 장소에 배치하는 초현실주의적 기법을 의미한다. 요컨대 이 영화는 광대 범죄자와 피 흘리는 시체를 텔레비전 토크쇼 무대 위에 배치하는 비(非)현실적(Anti-realistic) 또는 초(超)현실적(Surrealistic) 이미지를 스크린에 전시하는 것이다.
이를 수행하기 위해 영화는 카메라에 포착된 이미지를 다시 한 번 카메라로 포착하는 방식을 사용한다. 방송국의 카메라가 텔레비전 쇼의 무대를 포착해서 익숙한 이미지로 구성한다. 그런데 갑자기 손에 총을 든 광대 ‘조커’가 방송국 카메라의 프레임 안에 나타나, 실시간으로 수행되는 살인 퍼포먼스를 선보이고는 피투성이 시체를 날것 그대로 전시한다. 그리고 그 데페이즈망 이미지가 이번에는 대중들의 일상성으로 작동 중인 텔레비전과 결합하면서 다시 한 번 데페이즈망이 발생한다. 데페이즈망을 통해 재배치된 사물들의 이미지가 텔레비전에 전시되고, 그 낯설고 기괴해진 텔레비전이 이번에는 영화 속 일상성에 배치되면서 한 번 더 데페이즈망이 구성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중복적 데페이즈망에 점령 당한 영화 속 일상적 공간을 이번에는 다시 영화 '조커'의 카메라가 포착되어 극장 스크린에 전시되면서, 이번에는 우리의 일상성 안으로의 침공이 시작된다. 관객과 이미지 사이에서 치열한 투쟁이 벌어지는 동안, 영화는 아서 플렉의 신체를 통해 광기의 이미지를 구체화하는 작업을 수행한다. 영화가 아서 플렉의 신체 표면을 캔버스 삼아 우울증과 그로 인한 망상, 감정실금 등의 이미지를 스케치하고 채색까지 마치고 나면, 비로소 ‘광대 조커’가 완성되는 것이다.
한편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기록되지 않은 일종의 징후적 이미지도 나타난다. 아서의 신체가 의식 표면의 ‘아서 플렉’과 무의식의 ‘조커’ 사이를 횡단하는 흔적 같은 것이 도처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횡단의 징후는 대체로 오른손과 왼손의 ‘뒤바꾸기’ 이미지로 스크린에 짧은 순간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조커'의 첫 시퀀스는 사회복지사(Social worker)가 아서플렉을 상담하는 장면들로 구성된다. 사회복지사가 아서에게 저널, 즉 그가 기록하는 일기장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는데, 카메라는 여기에서 메모의 내용을 익스트림 클로즈업 샷으로 보여주면서, 프레임 안에 메모와 아서의 손이 함께 배치된다. 아서는 먼저 “정신질환에서 가장 힘든 것은……”이라는 메모를 오른손으로 필기하지만, 다음으로 “사람들 모르게”라는 메모를 쓸 때는 왼손을 사용한다. 이러한 뒤바꾸기의 징후는 이후에도 계속 출현한다. 마찬가지로 지하철에서 아서가 처음 살인할 때 오른손잡이인 그는 왼손으로 총을 쏘게 되며, TV쇼 '머레이쇼'에 출연을 제안 받아 무대로 나갈 때에도 아서는 오른손에 쥐고 있던 담배를, 조커로서 무대로 나가면서 왼손으로 바꿔 드는 장면이 나타난다. 이러한 횡단의 징후적 이미지들이 보여주는 것은 아마도 거울의 이쪽과 저쪽에 존재하는 아서 플렉과 조커라는 두 개의 정체성 사이에서 발생하는 교환, 또는 언어적 의식과 비언어적 무의식 사이의 도치(倒置)일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에서도 첫 시퀀스와 마찬가지로 다시 아서가 상담 받는 장면들이 나타나는데, 사회복지사가 저널을 건네받아 그것을 펼치자 이번에는 빈 페이지들이 나타난다. 그것은 처음 아서 플렉의 저널이 광기에 대하여 담론이 규정하는 언어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던 반면에, 이제 조커의 저널은 언어의 빈 공백들로 채워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렇게 직조된 광기의 이미지에 포착된 ‘소외된 주체’의 내면은 필연적으로 메마르고 삭막한 풍경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데, '조커'는 이것을 바짝 마른 피부, 앙상한 갈비뼈 아래로 등에 달라붙을 듯 움푹 들어간 뱃가죽, 주눅 든 표정과 어눌한 말투, 제대로 초점을 맞추지 못하는 눈동자 등 배우의 신체 이미지와 함께 어두운 조명으로 채워진 공간의 부족한 빛을 통해 표현한다. 영화가 보여주는 이러한 이미지들은 그것들이 영화의 욕망이 투영된 이미지라는 점을 보여주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캐릭터를 표현하는 미디어로서 배우의 신체가 작동하고 있음을 함께 확인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기도 하다.
온건한 ‘정상(Normal)’과 불결한 광기
“모든 사물은 사회다.”라고 주장한 프랑스의 사회학자 가브리엘 타르드(Gabriel Tarde)는 “사회 상태란 최면 상태와 마찬가지로 꿈의 한 형식”이며, 그 꿈은 “조종 받은 꿈이며 활동하고 있는 꿈”이라고 주장했다. 타르드는 각각의 사람들이 타자에 관한 다양한 형식의 모방을 중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개체성이 확정된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이를 좀 더 명확히 설명하기 위해 라이프니츠(G. W. Leibniz)의 모나드(單子, Monad) 개념을 수용했다. 타르드는 모나드가 단수인 동시에 일종의 집합체라고 보았다. 한 모나드의 형식은 다른 다수의 모나드들에 대한 모방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타르드가 사회체 구성에 대해 ‘모나드’를 강조한 것은 국가나 민족, 성별, 세대, 지역 등으로 묶이는 과정에서 실종된 실제 주체들을 되찾음으로써, 개별 주체들에게 잠재되어 있는 창조적 역량을 회복시키기 위한 의도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인간에게서 나타나는 광기는, 즉 정신질환의 여러 증상들이란 그 개체가 소유하고 있거나 개체 안에 잠재되어 있는 ‘차이’들이 불현듯 신체의 표면 위로 출현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광기의 역사〉를 통해 권력/지식과 주체성의 문제의식 안에서 이성과 광기에 대해 고고학적이며 계보학적인 탐색을 했던 푸코는, 적어도 정신의학이라는 지식의 체계, 즉 정신의학의 담론체계가 등장하는 19세기 이전까지 그러한 증상들은 대체로 예술가들이나 천재들의 비범한 영혼이 내뱉는 진실한 표현이나, 혹은 귀신이나 하늘과 같은 신성(神性)과의 소통 등으로 여겨지는 것이었다고 지적한다. 우리는 이에 대한 예시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자기 귀를 자른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유레카'를 집필할 때의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 디오니소스를 숭배하는 여신도들이나 수많은 문화들에서 나타나는 신(神)과 소통한 흔적들, 이들 다수의 사례들은 우리가 광기라고 부르는 현상들이 실제로는 극히 최근을 제외한 인류 역사의 대부분에 걸쳐 한 개인의 천재성, 또는 신비의 영역에 속한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는 점을 말해준다.
푸코의 지적이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는 역사 속에서 ‘권력/지식체계’에 의해 갑작스럽게 ‘광기’로 내몰린 주체들을 수없이 목격해 왔다. 19세기의 통치성에 합리성이라는 기반을 제공한 정신의학이라는 지식체계가 마련되기 이전에도 오랜 기간 동안 종교를 비롯한 당대의 지식체계가 마찬가지의 역할을 수행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 ‘광기의 주체’들에게 붙는 명칭도 다양하다. 마녀, 흡혈귀, 악마숭배자, 이교도, 나병 환자, 그리고 프란츠 파농(Frantz Fanon)의 지적대로라면 ‘흑인의 영혼’까지도.
이 ‘광기의 주체’들은 지식체계의 합리성을 근거로 하여 권력에 의해 각각의 개체성을 박탈당했다. 기존의 개체성을 상실한 그들은 이어서 질병, 오물, 희생제물 등으로 일제히 환원되었다. 이러한 환원을 통해 권력은 ‘광기의 주체’들을 일괄적으로 처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처리 방식은 다양했지만 결과는 항상 같았다. 사회 체계의 통치성이 작동하는 공간 바깥으로 추방 격리되거나, 아니면 화형 살해 당하거나 등의 방식으로 보이지 않게 은폐 삭제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은폐-삭제 처리 방식은 권력/지식체계가 ‘정상성의 범주’를 규정하기 위한 목적으로 ‘광기의 주체’들을 ‘의미상관항’이라는 사물로서 배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요컨대 ‘마녀가 아닌’, ‘이교도가 아닌’, ‘나병 환자가 아닌’, ‘흑인이 아닌’ 등의 방식으로 정상성의 범주가 설정되었던 것이다.
독일이나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을 중심으로 분포된 서유럽의 ‘예니셰(Yeniche)’라는 유랑민족이 있다. 이들은 각각의 국가로부터 추방, 억류, 처형의 대상으로 간주되었다. 192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스위스 연방정부는 유랑민족 ‘예니셰’인들을 정신이상자 집단으로 분류하는 정책을 시행했는데, 이로 인하여 그들의 자녀은 부모로부터 격리되어 고아원, 정신요양시설, 교도소 등의 시설을 통해 ‘정상 시민’으로서 훈육되었다.
한편 ‘집시’로도 알려진 동유럽의 방랑민족인 ‘롬(Rom)’인들 역시도 일종의 비(非)인간으로 간주되어 왔다. 더럽고 위험한 오물 또는 질병체, 부랑자로 여겨지는 이들은, ‘올바른 신앙의 범주’ 바깥에 있는 신비한 점성술을 사용하는 마녀 집단이었으며 여자와 아이를 납치해 잡아먹거나 납치한 사람을 마녀와 흡혈귀에게 팔아치우는 사악한 존재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홀로코스트 당시 유럽 전역에서 학살당한 ‘롬’인들의 숫자는 추산의 대상조차 되지 못했던 것에서 이러한 인식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의 가까운 역사에도 ‘불결한 광기의 주체’에 대한 권력/지식체계의 작동이 기록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설치한 ‘소록도 자혜의원’은 한센병 환자들을 국가의 경계 바깥으로 추방하고 격리하는 시설이었다. ‘형제복지원’이나 ‘삼청교육대’는 이른바 폐인, 문제아, 사회부적응자, 반정부인사, 지적장애인 등으로 분류된 사람을 ‘불결한 광기의 주체’로 간주하고 그들을 격리 학대 살해하는 시설이었다. 푸코는 “어떤 것도 광기를 진실이나 이성으로 되돌리지 못한다. 광기는 오로지 파멸과 더 나아가 죽음으로만 통해 있다”고 말했다. 푸코의 지적과 ‘광기의 주체’에 관한 역사적 기록들로부터, 우리는 지식체계의 합리성을 기반으로 권력이 어떤 금기를 생산했는가를 알 수 있다. 불결한 광기의 주체들에게는 이런 표식이 붙여지는 것이다. ‘접촉 금지, 섞이면 죽음.’
이러한 금기는 서사를 작동시키고 이미지를 몽타주하는 장치로서 수많은 영화들과 관계를 맺고 있기도 하다. 프랜시스 코폴라 감독의 '드라큘라'(1992)는 접촉하고 물리면 죽거나 흡혈귀가 되어버리는 악마적인 존재에 관한 영화이다.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에 등장하는 마녀 주술사 ‘티아 달마(나오미 해리스 분)’는 이빨이 모두 까맣게 썩어 있고 온몸에 기괴한 문신을 새겼으며 머리카락은 더럽고 엉켜 있다. 티아 달마의 캐릭터는 사실 ‘롬’인(집시)들에 대해 유럽인들이 가지는 전형적 이미지로부터 온 것이기도 하다. '말레피센트'(2014)의 마녀 ‘말레피센트(안젤리나 졸리 분)’는 박쥐의 날개에 염소의 뿔이 달려 있는 여성으로, 성벽이라는 경계 바깥 미지의 깊은 숲에 거주하는 괴물과 정령들을 다스린다. 제프 니콜스 감독의 영화 '러빙'(2016)은 타 인종 간의 결혼이 ‘불법’이었던 시절 미국에서 서로 결혼한 흑인과 백인 부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며, 피터 패럴리 감독의 영화 '그린 북'(2018)은 백인과 섞이지 않도록 흑인이 이용할 수 있는 미국 내 시설의 정보를 담은 안내책자의 이름이기도 하다.
광기의 에피스테메(Episteme)가 은폐하는 알레테이아(Aletheia)
이성(理性, Reason)이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모든 현상에는 절대적 인과율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굳건한 신앙에 기반을 두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이성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말은, 바꿔 말하면 우리는 지식-권력 담론이 그 원인을 설명할 수 없는 행위와 현상들에 대해서는 그 중심에서 발견되는 주체나 신체에 대해 ‘광기’와 ‘정신의학적 질병’이라는 신화적 이미지를 뒤집어씌우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아서 플렉을 상담하는 사회복지사와 진찰하는 의사에 의해 기록된 처방전에 따라 아서에게는 약이 제공된다. ‘처방전’이라는 기록과 ‘약’이라는 해석의 결과물을 통해 나타나는 것은 아서라는 주체에게 작동하고 있는 신체권력이다. 아서의 신체가 항상 어떤 상태에 놓여야만 하는가에 대한 결정이 주체 외부로부터 유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담가가 아서에게 주체의 내밀한 부분에 대한 고백을 강요한다는 점은, 그것이 고해성사와 형식적인 측면에서 동일하다는 점에서 본다면 그리스도교적 사목권력의 작동도 함께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에는 경찰이 존재하고 사법체계를 통해 탄생한 법정과 감옥이라는 표상의 지시를 통해 고담시에 규율권력의 존재도 나타나게 된다. 이를 통해 아서라는 주체는 의학, 법률, 종교, 그리고 광기에 대한 현대의 지식 체계의 면밀한 협력에 의해 ‘미친’ 상태로 정의 내려진다. 아마도 영화 '조커'가 영화를 읽는 독자 또는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말하고 보여주고자 욕망하는 두 가지 중 첫 번째가 바로 이것일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바로 ‘광기’에 관한 진실, 혹은 진실 말하기의 문제이다. 지식-권력의 담론이 규정하는 ‘광기’가 아닌, 그것의 핵심과 직접 만나는 경험 혹은 그것을 보여주기. 아서의 신체는 그 자체로 고담시에 대한 환유로도 작동한다. 가난과 범죄, 우울, 공포, 분노 등 고담시에서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겪고 있는 삶의 조건들과 정동들이 아서의 신체를 통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에 아서는 토마스 웨인의 숨겨진 아들이다. 이를 정리하면 아서의 신체는 자본권력과 결합한 에피스테메에 의해 생산되는 ‘소외 상태의 주체들’에 대한 환유적 표현이며, 자본권력-에피스테메가 은폐하는 진실(Aletheia)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 된다.
자, 지금부터 아서 플렉의 ‘정신질환’에 관한 단서를 좀 더 본격적으로 함께 추적해 보기로 하자. 처음 상담 장면에서 아서가 자신의 수첩에 적은 메모, “난 그저 내 죽음이 내 인생보다 더 의미 있기를 바란다(I just hope my death makes more cents(sense) than my life.)” 여기에서 영화는 ‘의미(sense)’라는 단어를 ‘동전들(cents)’이라는 단어로 치환했다. 그리고 아서의 어머니의 이름 역시 동전 단위 ‘페니(Penny)’이다. 영화는 첫 시퀀스에서 이미 우리들에게 풍부한 단서들을 제공했던 셈이다. 그것은 거대 자본과 권력의 표상인 토마스 웨인이 지배하는 고담시에서는 삶도 죽음도 그리고 사람도 모두 동전 몇 푼에 불과하다는 끔찍하고 우울한 결론으로 우리를 이끄는 단서들이다. 그리고 그 단서가 이끄는 장소에 도달하면 알 수 있는 진실. 아서의 어머니 페니(Penny)에 관한 감춰진 진실은 “T.W”라는 이니셜의 사랑고백이 담긴 젊은 페니의 사진을 통해 잠시 드러난다. 그런데 앞서 우리는 토마스 웨인과의 관계를 페니가 증언하자, 의사들이 그녀에게 ‘망상장애(Delusional disorder)’라는 진단을 내리는 것도 목격했다. 이제 영화는 우리에게 정신의학이라는 에피스테메가 일종의 신화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전복적 주체의 탄생을 기념하는 광대의 춤
다시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조커'의 서사를 전체적으로 조망해보면, 그것은 어둡고 더러운 시궁창에 버려진 아들, 훼손되고 망각된 남성성이 광기로 표출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영화의 서사는 종국에는 고대 그리스의 비극적 결말에 이르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한 바에 의하면, 비극은 어떤 ‘결함이나 과실(Hamartia)’ 때문에 평범하거나 뛰어난 사람이 불행한 운명을 맞이하는 이야기를 의미하는데, 배트맨과 조커 모두 그 고귀한 혈통과 성품에도 불구하고 운명의 장난에 휩쓸려버린 가련한 형제라는 점에서 본다면, 그들은 모두 오디세우스 같은 비극의 영웅적 주인공들인 것이다.
이제 다시 영화에 한 걸음 가깝게 다가서보자. 이제 우리는 브루스 웨인이라는 대립쌍과 관계를 맺는 아서 플렉의 신체를 통해 나타나는 광기의 시각적 이미지를 볼 수 있게 된다. 우리는 그러한 광기의 이미지를 통해 인종이나 계급 내지는 계층적 차이에 의한 차별과 억압의 흔적을 유추해낼 수 있다. 그리고 다시 이것은 차별과 억압에 저항하는 적극적인 투쟁과 실천의 문제로 우리의 의식을 나아가게 만든다.
여기서 잠깐 조커가 경쾌하게 춤을 추던 그 계단 시퀀스를 다시 떠올려 보자. 조커는 계단을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내려오며 춤을 춘다. 영화에서 계단은 한 개인의 성장이나 다음 단계로 나아감, 혹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감에 대한 장치로 자주 사용되는데, 이 경우 영화는 캐릭터가 그 계단을 걷거나 뛰어 올라가는 모티브로 표현하게 된다. 대표적인 예로 영화 '록키(Rocky)' 시리즈에는 주인공 ‘록키 발보아(실베스터 스탤론 분)’가 특유의 음악에 맞춰 계단을 올라가는 장면들이 나온다. 혹독한 훈련과 시련을 통해 챔피언으로 성장하는 록키의 서사를 뒷받침하는 이 계단 모티브 덕분에, 지금도 사람들은 록키가 뛰어올라갔던 필라델피아 미술관 정문 계단을 ‘록키 계단(Rocky Steps)’이라고 부르며 미술관 앞에는 록키의 동상까지 세워지게 되었다. 그런데 '조커'는 아서 플렉이 계단을 올라갈 때는 두 어깨를 늘어트린 지친 이미지로 표현하는 반면, 조커가 되어 같은 계단을 내려올 때는 한없이 경쾌하고 행복하게 춤을 추는 이미지로 나타내고 있다. 이 시퀀스를 통해 담론의 가리키는 방향이 아닌 그 반대방향으로 향할 때 비로소 행복할 수 있는 주체성이 탄생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중대한 사건이 발생하는 장소, 양쪽의 낡은 건물들이 있고 철제 난간이 있는 그 계단은 그곳에 거주하는 수많은 주체들의 일상적 공간 그 자체이다. 사람들은 그 계단을 통해 출근을 하고 학교에 갔을 것이며 장을 보러 다니거나 일과를 마친 후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때로는 누군가와 계단 중간에 서서 담화를 나누거나 혹은 다투기도 했을 것이며, 어떤 연인은 그 계단에서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헤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노란 셔츠에 붉은 재킷과 바지를 입은 한 사내가, 얼굴을 광대처럼 화장한 어떤 미친놈이 나타나 그곳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 순간 그 계단은 분명 일상성과 연결되어 있지만 동시에 낯선 장소로 변모한다.
푸코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유토피아와 대비되는 개념으로서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라는 용어를 제안한 바 있다. 이질(異質)이나 이형(異形)을 의미하는 ‘헤테로(Hetero)’에 장소를 의미하는 ‘토포스(Topos)’를 결합한 이 용어는 일상성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동시에 일상성과 나란해 배치되어 있는 공간들을 지시한다. 푸코가 헤테로토피아의 대표적인 예시로 제시한 것에는 부모님이 외출한 빈 집의 부모님 침대, 공동묘지, 유럽의 정원, 미국의 모텔, 매음굴, 제국의 입장에서 보는 식민지, 그리고 항해하는 배 등과 함께 영화와 연극이 상연되는 극장이 있다.
그렇다면 '조커'를 본 관객들은 광기로 규정된 신체들이 그 광기의 끝에서 보여주는 진실들을 보고 듣는 헤테로토피아를 경험하는 것이 된다. 영화 속 영화. 광기의 끝에 매달린 진실들. 이 영화들이 보여주는 것은 그 광기의 끝에 진실이 매달려 있는 이미지들의 몽타주이다. 동시에 영화 속 영화뿐만 아니라 모든 영화의 디제시스 또한 헤테로토피아이다. 영화의 공간 이미지는 언제나 현실 세계를 재현하고 대조하며 은유하고 상징하기 때문이다.
그와 나 사이에 관한 사적인 농담
마지막으로 덧붙일 것이 한 가지 더 있다. 영화 '조커'는 표면적으로는 아서 플렉의 다양한 웃음소리들이 한결같은 것처럼 보여주지만, 사실 아서가 웃는 소리들은 정동에 따라 다르며 이 차이를 구별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만약 귀를 기울여 자세히 들어보기만 한다면 그것이 결코 ‘그냥 웃음소리’가 아니라는 점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아서가 슬프거나 분노하거나 두려울 때 내는 웃음소리는 끊어질 것처럼 가쁘게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에 섞여 나온다. 그리고 그 고통스러운 웃음소리를 들려줄 때마다 영화는 동시에 아서의 고통스러운 눈빛과 표정도 함께 보여준다. 하지만 스크린의 안쪽과 바깥쪽의 누가 되었든,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이상 아서 플렉은 그저 난데없이 웃어대는 ‘미친’ 사람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아서는 끊임없이 요청하고 또 요청했다. 자신의 이야기를, 자기의 소리를 들어달라고. 그러나 사람들은, 심지어는 그를 상담하는 사회복지사마저도, 그의 이야기와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요컨대 아서의 진실은 언제나 그 광기의 끝에 매달려 있었다. 그저 사람들이 보지도 듣지도 못했을 뿐, 아니 보거나 듣지 않았을 뿐.
반면 아서 플렉이 아닌 조커라는 새롭고 낯선 주체성은 일상성을 구성하는 담론이 오랜 시간 직조해오고 수선해왔던 장막의 한가운데로 파고 들어가 그것을 마구 헤집고 찢어버린다. 광인(狂人)이라는 주체성의 부여, 그래서 격리되고 소외되어야 마땅하다는 ‘당연한 상식’의 가면을 찢고, 결코 당연하지 않은 감춰왔던 맨얼굴을 들여다 볼 수 있게 만들어버린다. 조커의 주체성은 이런 의미에서도 다시 한 번 일종의 뒤바꾸기, 즉 데페이즈망의 실험적 성격을 가진다. 세 가지 이유에서 그러한데, 첫째로 에피스테메의 가면을 찢고 진실을 드러내는 조커의 캐릭터는 정작 맨얼굴을 분장이라는 가면 뒤로 숨김으로써 완성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맨얼굴이라는 기표는 ‘거짓’이라는 기의에 연결되고, 분장한 얼굴이라는 기표는 ‘진실’이라는 기의에 연결되는 효과가 나타나게 된다.
두 번째 이유는 지식 체계가 정의하는 광기를 대신하여, 광기를 직접 정의하기를 시도하면서 주체와 객체의 자리를 적극적으로 뒤바꾸고 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아서 플렉이라는 주체성이, 담론이 생산하는 의미에 포획되어 있다면 조커라는 주체성은 담론 그 자체를 생산하는 위치로 도약하는 것이다.
그리고 조커의 주체성이 내적으로 데페이즈망의 구조를 가진다고 보는 세 번째 이유는 ‘브루스 웨인-배트맨’이 자본권력을 표상하는 토마스 웨인이 세상에 남긴 ‘빛나는 이미지’라면, 수치스러운 과거와 어둠에서 탄생한 ‘아서 플렉-조커’는 토마스 웨인이 남긴 ‘그림자나 얼룩’이라는 점 때문이다. 아서 플렉과 토마스 웨인의 각각 자리는 단단히 고정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얼마든지 그리고 언제든지 서로 뒤바뀔 수 있는 매우 위태로운 위상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배트맨은 온통 무채색의 검은 갑옷과 망토 뒤에 자신을 숨기고 어두운 밤에만 출몰하는 반면, 조커는 수많은 색채를 통해 자신의 표면을 드러내고 백주 대낮에도 얼마든지 출현할 수 있는 캐릭터이지 않은가.
따라서 조커가 마지막 시퀀스에서 언급하는 “그와 나 사이에 관한 사적인 농담”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알 수 없는 진실에 관한 것이 된다. 자신이 토마스 웨인의 숨겨진 아들이고, 고담시에 존재하는 악(惡)과 폭력은 토마스 웨인과 웨인 컴퍼니로부터 비롯되었으며, 그리고 웨인 컴퍼니의 소유자 브루스 웨인이 정의를 수호한답시고 밤만 되면 기괴한 분장을 하고는 밤거리를 싸돌아다니며 온갖 폭력과 범법을 저지르는 ‘광인’이라는 그 진실이야말로 정말 재미있는 ‘농담(Joke)’이라고 말하는 것(Joker)이다. 결국 이 영화는 자신의 이야기와 이미지가 농담과 허구라고 말하지만, 그 농담과 허구의 영화적 이미지들은 항상 진실과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조커'는 버려진 아들이라는 섬세한 주체들, 아서 플렉과 브루스 웨인이 어떻게 ‘광인’으로 내몰리고 또 왜 광인이 되었는가를 보여주는 동시에, 우리 모두 실질적이거나 잠재적 차별의 대상이라는 점에서 언제나 잠재적 ‘광인’이기도 하다는 진실과도 관계를 맺고 있는 셈이다. 아서 플렉의 움츠러든 몸짓은 전복되어, 이제 조커의 춤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리고 아서의 웃음소리가 ‘감정실금’이라는 광기의 병명으로 나타났던 반면, 이제 조커의 웃음은 빌런이라는 전복적 주체의 출현을 알리는 노래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