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가지안테프의 눈물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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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키예 대지진의 진앙인 ‘가지안테프’(Gaziantep). 옛 이름은 ‘안테프’(Antep)였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오스만 제국이 서구 열강에 의해 갈가리 찢겨 사라질 상황에서 안테프에서 독립 전쟁이 벌어졌다. 프랑스 점령군이 여자 행인 히잡을 벗기며 희롱하고, 이에 항의하던 그 아들을 총검으로 살해한 사건이 기폭제였다. 1920년 3월 칼과 녹슨 엽총을 든 민병대 300여 명이 10배 이상인 프랑스군과 아르메니아계 민병대를 농성전 끝에 격퇴했다. ‘안테프 전쟁’ 승리 이후 프랑스가 전격적으로 철수하고, 튀르키예 건국의 아버지인 무스타파 케말이 안테프 도시 이름에 ‘가지’(Gazi·수호자)라는 영웅 호칭을 붙여 줘 오늘날 가지안테프로 불리게 됐다고 한다.

아나톨리아 반도 남동부 요충지 가지안테프는 BC 4000년부터 인간이 거주해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다. 남부 하타이로부터 이어진 실크로드의 거점 도시였다. 히타이트·아시리아·페르시아·로마·비잔틴 등 여러 제국·왕조의 지배를 받아, 대리석으로 된 석조 건물과 모스크 등 독특한 양식의 건축물과 실크로드 대상의 숙소 등 과거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 지방 토속 요리가 튀르키예를 대표하는 음식일 정도로 미식 도시로도 유명하다. 극한의 단맛을 뽐내는 페이스트리 디저트 바클라바, 가지 케밥, 야생 피스타치오로 만든 메넹키치 커피 등이 대표적이다. 2015년에는 한국 전주(2012년)에 이어 유네스코 세계 무형문화유산에 등록됐다.

지난 6일 가지안테프를 직격한 모멘트 규모 7.8의 대지진으로 도시 전체가 괴멸했다. 오래된 도시인 탓에 고층 건물 대부분이 지진 설계가 이뤄지지 않아 건물 각 층이 땅과 수평으로 떨어지는 ‘팬케이크 붕괴’가 일어나 피해를 키웠다는 안타까운 소식이다. 현재 튀르키예와 시리아 양국에서만 사망자가 2만 5880명에 이른다고 한다. 안테프 전쟁의 격전지인 ‘안테프 성’도 허물어졌다. 고대 히타이트(BC 1600~ BC 1178년) 제국이 정찰을 위해 설립한 뒤 로마 제국이 대거 확장하는 등 3000년 이상을 지켜 온 역사의 현장이었다.

마침 대한민국 등 세계 각국의 구호대와 구호 물품, 구조 장비 등이 가지안테프 국제공항에 속속 도착해 수색과 구조, 피해자 지원을 시작했다고 한다. 수많은 역경을 겪은 국가의 ‘수호자 도시’ 가지안테프가 지진의 아픔을 빨리 극복하고, 가족 모두가 무사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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