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로365] 추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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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혁 유라시아교육원 이사장 부산외국어대 명예교수

별스레 추웠던 겨울이 가고, 온 세상이 봄이다. 시인은 찬란한 봄을 이렇게 읊는다. ‘봄이 왔네, 봄빛이 왔네. 봄빛이 왔네, 봄날이 왔네.’(김소월 시 ‘금잔디’) 이내 한라에서 백두까지 꽃잔치가 벌어질 것이다.

이 봄에 우리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가, 잠시 생각해 본다. 104년 전인 기미년 봄엔 “대한독립 만세!”의 외침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터졌고, 그 16일 뒤인 3월 17일에는 러시아 원동의 우수리스크에서 ‘대한국민의회’가 열렸다. 대한민국 최초의 임시정부로, 같은 해 4월 11일에 중국 상해에 세워진 상해임정보다 25일 정도 빨랐다. 그리고 우리는 이 봄에 4·3항쟁, 4·19혁명, 5·18항쟁을 겪지 않았던가.

유엔개발회의 “한국은 선진국”

경제 걸맞은 문화 품격 갖춰야

민족 시인 김소월 홀대 아쉬워

가장 개방적인 도시 부산에서

지난해 말 국제소월협회 출범

세계 향한 문화수도 거듭나야

이런 희생과 노력이 쌓여서 지난해 7월 스위스에서 개도국을 완전히 졸업하고 선진국이 되었다.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가 1964년 설립 이래 대한민국을 최초로 그렇게 분류한 건데, 어떤 데이터는 우리의 국력이 이제 세계 6위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같은 외형적인 ‘폭풍’ 성장에도 불구하고 무엇인가 대단히 아쉬운 대목이 있다. 바로 우리의 정신에 대한 이야기다. 예를 들어,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대표하는 민족시인 김소월(1902~1934)을 어떻게 대우하고 있는가. 문학관 이야기부터 해 보자. 한류 대중문화와 한국어가 전 세계를 휩쓸고, 전국에 123개의 크고 작은 공·사립 문학관이 있다. 그런데도 김소월 전용 문학관은 전국 어디에도 없다. 필자가 이 이야기를 주변에 하면 반문하지 않는 사람이 드물다. “아니, 다른 시인도 아니고, 김소월 시인을 우리가 그렇게 홀대해 왔다고요?” 유감스럽지만 그랬다.

탁 트인 태평양이 있고 한국전쟁 때 피란수도였던 부산은 한국의 도시 가운데 가장 진취적이고 개방적이다. 우리 도시는 2030월드엑스포 유치를 계기로 명실상부한 국제도시로 발돋움하려고 한다. 그런데 도시의 품격은 경제와 물류, 컨벤션만으론 안 된다. 문화를 키우고 문화를 확대 재생산할 때 도시는 내적인 위엄에 빛날 것이다. 식민지를 경험한 개도국에서 문학은 문학의 영역에만 머물 수 없었다. 근대 100년의 한국 문학사는 그 자체가 우리의 정신이고 근대사이며, 그 출발점과 정점에 소월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진달래꽃’ ‘초혼’ ‘엄마야 누나야’ 등 소월시를 애송하지 않는가. 소월의 시는 1946년 미군정 시기부터 교과서에 실렸고, 그동안 800여 종의 시집이 나와 있다. 320여 가수가 66편의 소월시를 노래로 불렀으며, ‘산유화’ 등 소월시를 소재로 한 인기 영화는 또 얼마나 많았던가. 귀화시험에서조차 소월의 시가 단골로 출제되고 있다. 그런데도 민족시인을 기리는 문학관, 동상, 동판, 거리명 등 문화 기억장치는 이 나라에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는 문화 최빈국들이나 보이는 초라한 모습이다.

소월은 1923년 일본 유학길에 오르면서 부산항에서 관부연락선에 오르고 내렸다. 그리고 누구보다 바다를 동경하여 10여 편의 바다시를 남겼다. ‘지역 연고성’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지역이기주의라는 좁은 울타리에 민족의 대시인을 가둘 순 없다. ‘산유화’ ‘개아미’ ‘첫 치마’ ‘비단안개’ 등 주옥같은 그의 시들을 낭송해 보시라. 모든 존재에 대한 연민과 사랑, 소월의 세계동포주의가 절절히 느껴지지 않는가. 오죽했으면 북한에서도 소월 시인을 ‘한반도 민중의 정서를 대변한 애국 서정시인’으로 재평가하며 이상화 시인과 함께 교과서에 그의 시를 다시 싣고 있을까.

다행히 지난해 12월 26일 부산에서 ‘국제소월협회’가 출발하였다. 1925년 12월 26일 매문사에서 시집 〈진달래꽃〉이 나온 바로 그날인데, 국민시인 소월의 위상을 되찾고 그의 맑고 높은 시 세계를 널리 알리기 위해서다. 부산시의회 정태숙 의원(교육위원회)의 노력으로 황령산에 ‘김소월 진달래길’ ‘생태문학 탐방로’를 조성하는 방안이 시의회 발언대에서 제안되었고, 부산시와 일부 기업이 이 제안을 긍정적으로 검토 중이라고 한다. 이는 시민의 입장에서 매우 반가운 소식이며, 소프트 파워 시대에 부산의 브랜드 가치를 문화적으로 높이는 길이기도 하다.

러시아의 수도는 모스크바이지만 ‘문화수도’는 발틱해의 항구 도시 페테르부르크이다. 우리 부산도 국제화와 함께 문학과 문화의 꽃향기로 대한민국의 문화수도가 될 수 있다. 다른 나라와 민족에 그들을 대표하는 괴테(독일), 푸쉬킨(러시아), 셰프첸코(우크라이나), 네루다(칠레), 리잘(필리핀) 등이 있다면 우리에겐 자랑스러운 김소월 시인이 있다. 부산역 광장의 ‘유라시아 플랫폼’에서 소월의 아름답고 고운 시들이 소월의 고향인 북한 땅 정주를 지나 저 넓은 유라시아 대륙으로, 아프리카와 중남미 등지로 힘차게 달릴 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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