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대상과 두 개의 시선, 카메라 너머의 이야기들

오금아 기자 chri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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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진 작가 ‘언네임드 로드’
혼란과 슬픔 품은 땅의 기록
랄프 깁슨 ‘세이크리드 랜드’
이스라엘의 다양한 모습 포착

이정진 'Unnamed Road' ⓒ Jungjin Lee 이정진 'Unnamed Road' ⓒ Jungjin Lee

이정진의 ‘언네임드 로드(Unnamed Road)’와 랄프 깁슨의 ‘세이크리드 랜드(Sacred Land)’. 부산 해운대구 고은사진미술관과 랄프 깁슨 사진미술관에서 각각 열리는 전시에서는 같은 대상을 바라보는 두 개의 시선을 마주할 수 있다. 사진계에 굵직한 흔적을 남기고 있는 두 작가의 사진이 오랫동안 잔상을 남긴다.

이정진 작가의 '언네임드 로드' 전시 전경. 오금아 기자 이정진 작가의 '언네임드 로드' 전시 전경. 오금아 기자

■가슬가슬한 땅의 기록

황량한 하늘과 땅. 첫 인상은 거칠지만 깊이가 있다. 흑백사진 속 무성한 풀이 앞으로 쑥 다가오기도 하고, 땅인지 호수인지 모를 풍경은 수묵화를 보는 것 같다. 이정진 작가의 사진은 그렇게 남다르다. 홍익대에서 공예를 전공한 이정진은 독학으로 사진을 배웠다. <뿌리깊은 나무> 사진기자를 거쳐, 1988년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대 대학원 사진학과를 졸업했다. 이 작가는 한지에 붓으로 감광유제를 바르고 그 위에 인화하는 독특한 프린트로 명상적인 작품을 선보여 왔다.

전시 ‘언네임드 로드’는 사진가 프레데릭 브레너가 기획한 ‘디스 플레이스(This Place)’ 프로젝트에서 촬영한 사진을 소개한다. 2009년부터 2012년까지 진행된 프로젝트에는 스테판 쇼어, 제프 월 등 저명 사진가 12인이 참여했다. 이 작가는 이스라엘과 요르단 강 서안지구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서안지구에 들어갔을 때 GPS가 꺼지며 ‘당신은 이름 없는 땅에 있다’는 영어 메시지가 떴고, 작가는 여기서 영감을 얻어 작업 제목을 정했다.

이정진 'Unnamed Road' ⓒ Jungjin Lee 이정진 'Unnamed Road' ⓒ Jungjin Lee
이정진 'Unnamed Road' ⓒ Jungjin Lee 이정진 'Unnamed Road' ⓒ Jungjin Lee

이 작가는 ‘언네임드 로드’ 시리즈 사진들이 평화롭지는 않다고 했다. 오래된 벽에 꽃처럼 피어난 탄흔, 절벽 같은 풍경에서 흑과 백으로 갈라져 보이는 땅의 색, 넓은 땅 위에 거대한 괴물처럼 서 있는 코일 덩어리. 작가는 “둘이 만나지지 않은 단절된 기분이 사진에 깔려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저는 사진을 찍을 때 대상을 찍는다기 보다는 대상을 통해서 나를 찍는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보는 사람들도 ‘이정진의 플레이스’를 보는 것이 아니라 제 사진에 투영해서 각자의 마음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거친 현실을 담았지만 이정진의 사진에는 묘하게 아름다운 지점이 있다. 이 작가는 “절제된 구도를 좋아하기 때문에 프레임을 잡을 때 굉장히 단순화시키고 빼기 작업을 많이 한다”고 밝혔다. 작가의 표현을 빌리면 ‘오랜 역사와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갈등으로 인해 인간이 만든 아주 혼란스러운 땅’을 찍은 사진 앞에서 관람객은 여러 생각을 하게 된다. “사진 속의 ‘디스 플레이스’가 이스라엘이기도 하지만 나의 플레이스이기도 하고, 우리 각자 마음 속의 장소이기도 했으면 좋겠습니다.” ▶‘언네임드 로드’=7월 9일까지 고은사진미술관.

랄프 깁슨 작가의 '세이크리드 랜드' 전시 전경. 오금아 기자 랄프 깁슨 작가의 '세이크리드 랜드' 전시 전경. 오금아 기자

■다름에서 오는 새로움

랄프 깁슨의 ‘세이크리드 랜드(성스러운 땅)’전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그러면서도 가장 젊은 국가인 이스라엘을 기록한 사진들을 소개한다. 랄프 깁슨이 2018년 파리 국제사진전에서 마틴 코헨을 우연히 만난 것이 계기가 됐다. ‘당신의 시선으로 본 이스라엘이 궁금하다’는 마틴 코헨의 제안에 응한 랄프 깁슨은 2019년 세 번에 걸쳐 이스라엘을 방문해 사진을 찍었다. 고대 이스라엘 왕국과 현대 국가 이스라엘이라는 두 이미지를 통해 자신만의 이스라엘을 표현했다.

텔아비브에 도착하는 비행기 안에서 찍은 이스라엘은 회색 도시처럼 보인다. 이스라엘에 발을 딛기 전 작가가 느끼는 모호함이 담긴 것 같다. 랄프 깁슨의 사진 속에는 이스라엘의 유규한 역사, 유대인 디아스포라, 독특한 지형과 건축물이 등장한다.

랄프 깁슨 'Sacred Land(텔아비브 도착)' ⓒ랄프 깁슨 랄프 깁슨 'Sacred Land(텔아비브 도착)' ⓒ랄프 깁슨
랄프 깁슨 'Sacred Land(올리브산, 예루살렘)' ⓒ랄프 깁슨 랄프 깁슨 'Sacred Land(올리브산, 예루살렘)' ⓒ랄프 깁슨
랄프 깁슨 'Sacred Land(베두인족 마을, 베레시트)' ⓒ랄프 깁슨 랄프 깁슨 'Sacred Land(베두인족 마을, 베레시트)' ⓒ랄프 깁슨

하나의 액자 안에 두 장의 사진을 같이 배치한 딥틱으로 작가는 이스라엘이 가진 다양성을 더 풍성하게 드러낸다. 쌍봉낙타와 ‘위험물’ 표식이 새겨진 운송수단, 오래된 성벽과 수면의 물결, 야자수 줄기와 생선 비늘, 트렌디한 디저트와 전쟁 무기 등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는 두 사진이 만나 새로운 해석을 불러낸다.

랄프 깁슨은 현장을 중시하는 작가이다. 그런 그가 이스라엘 촬영 전에 딱 하나 ‘꼭 찍고 싶다’고 생각한 사진이 있는데, 바로 아이가 히브리어를 배우는 장면이다. 히브리어 알파벳을 따라 쓰는 아이의 흑백 사진 옆에는 가르치는 자에 해당하는 영적 지도자의 컬러 사진이 배치되어 있다. 과거와 현재는 어떻게 교차하고 이어지는가. 거장의 카메라를 통해 다양성과 그 너머의 의미를 찾는 시간을 가질수 있을 것이다. ▶‘세이크리드 랜드’=10월 15일까지 랄프 깁슨 사진미술관.


오금아 기자 chri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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