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재파의 생각+] '부산 돌려차기' 사건과 지명 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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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대 기초교양대학 교수·공모 칼럼니스트

사건 본질과 무관한 ‘부산’ 명칭 병기
부정적 인식으로 지역 낙인 효과만
가해자나 범죄 혐의 맞춰 결정해야

작년 5월 22일 새벽 5시께, 부산 부산진구의 한 오피스텔 공동 현관에서 30대 남성이 귀가하던 20대 여성을 무차별 폭행해 의식을 잃게 만든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은 폭행의 잔혹성만으로도 사회적 공분을 샀지만 이후 추가 성폭행, 보복 범죄 예고, 신상 공개와 사적 제재, 적반하장 반성문 논란 등이 이어지며 아직 관련 보도가 많이 쏟아지고 있다.

이를 살펴보면, 이 사건은 이른바 ‘부산 돌려차기 사건’으로 명명되고 있다. 그런데 이 사건 이름에 굳이 ‘부산’이 들어가야 하는지 의문이다. 단지 사건이 발생한 장소라는 이유만으로 범죄 사건의 명칭에 지역명이 사용된다면 그 지역 이미지에 큰 피해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엑스포 유치를 위해 도시 브랜드 가치를 높여야 할 중요한 시기에 부산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편견을 심어 줄 수 있어 더욱 우려된다.


예를 들어 경기도 화성시를 보자. 1986년부터 8년에 걸친 연쇄살인 사건의 이름이 ‘화성 연쇄살인 사건’으로 명명돼 지금도 화성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살인의 추억 도시’를 떠올린다. 진범이 잡힌 뒤 화성시의회는 이 사건 명칭을 ‘이춘재 살인 사건’으로 바꿔 달라는 명칭 변경 촉구 결의안까지 채택했다. 경찰이 사건 명칭을 변경했지만, 한 번 형성된 부정적 인식은 낙인 효과로 인해 쉽게 바뀌지 않고 지속되고 있다.

부정적 인식이 고정관념처럼 굳어지기 전에, 해당 지역민들에게 고통과 피해를 주기 전에, 지역명이 들어간 재난, 사건, 사고의 명칭을 변경할 필요가 있다. 한 번 명명된 이름을 바꾸기가 쉽지는 않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우리가 현재 사용 중인 ‘세월호 참사’가 그 예이다. 세월호 참사는 처음에는 ‘진도 여객선 침몰 사건’으로 불렸다. 그러다 참사 책임의 주체를 명확히 하고 지역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세월호 참사로 다시 명칭을 변경하여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다.

사실 명칭을 변경할 필요 없이 처음부터 올바른 명칭을 사용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그렇다면 재해와 재난, 사건과 사고의 명명은 어떻게 결정하는 것이 좋을까.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점은 피해자와 지역명 대신 가해자를 전면에 드러내는 작명이 되어야 한다. 2008년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에서 조두순이 8세 여자아이를 납치해 성폭행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은 피해자를 중심으로 사건을 명명하면 ‘나영이 사건’이 되고, 가해자를 중심으로 사건을 이름하면 ‘조두순 사건’이 된다. 우리는 이 사건을 어떻게 명명해야 할까.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가해자 중심의 사건 명명이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그러나 현 제도 내에서 사건 초기 가해자의 신상을 공개하는 일은 쉽지 않다. 가해자를 사건명에 드러내기 힘들 경우, 지명이라는 공간성 대신 시간성을 드러내는 방법도 고려해 볼 수 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사건과 사고 등에 지역명을 사용할 경우 해당 지역에 유·무형의 피해를 줄 수 있으므로 지역명을 빼고 ‘6·25 전쟁’과 같이 날짜라는 시간성을 사건 이름에 드러내는 것이다.

2001년 9월 11일, 빈 라덴이 이끄는 알카에다가 항공기를 납치해 미국 뉴욕 맨해튼의 세계무역센터로 돌진한 테러 사건도 초기에는 ‘뉴욕 쌍둥이 빌딩 붕괴 사건’으로 명명됐다. 그러나 이후 ‘9·11 테러’로 바뀐 전례가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지난해 10월 29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에서 압사 사고가 발생하자, 한국심리학회는 성명을 내고 지역 혐오를 방지하기 위해 ‘10·29 참사’로 부르자고 주장한 바 있다. 이처럼 공간성 대신 시간성을 드러냄으로써 해당 공간에 거주하는 지역민에 대한 피해를 예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이마저도 어렵다면 범죄 혐의로 사건 이름을 명명하는 방법도 고려해 볼 수 있다. 즉, 사건 발생 장소를 부각하여 부산 돌려차기 사건이라고 부르는 대신 범죄 혐의를 중심으로 ‘돌려차기 강간 살인미수 사건’으로 명명하는 식이다.

물론 사건, 사고가 발생한 지역의 이름을 전혀 거론하지 말자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사건, 사고가 발생한 지역명은 해당 사건을 객관적으로 얘기할 때 반드시 포함해야 하는 중요한 정보다. 다만 해당 사건에서 지역이라는 공간이 사건의 본질과 큰 연관성이 없다면 사건 이름이나 언론 보도에서 굳이 지역명을 게재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다.

단순히 특정 사건, 사고가 일어난 지역이라는 이유만으로 ‘위험 지역’이라는 낙인을 찍어 해당 지역의 브랜드 가치를 떨어뜨리고 지역민들에게 고통과 상처를 주는 관행은 이제 지양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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