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위 ‘온플법’에 대만 TFTC 부위원장 “우린 법 규제 안 해, 혁신과 경쟁 균형 필요”
한기정 공정거래위원장. 연합뉴스
공정거래위원회가 네이버·카카오 등 온라인 플랫폼을 사전 규제하는 온라인 플랫폼 공정화법(온플법) 입법안을 추진하는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 대만 경쟁당국인 공평교역위원회(TFTC) 부위원장이 한기정 공정거래위원장과 동석한 세미나에서 “법을 만들어 사전 규제하는 것은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취지의 입장을 밝힌 것으로 전해져 관심을 모은다.
26일 업계에 따르면 TFTC 앤디 첸 부위원장은 이달 23일 한국경쟁법학회·아시아경쟁연합 주관으로 열린 디지털 경쟁법 세미나에서 “대만은 현재까지 디지털 플랫폼 경쟁에 관한 그 어떤 입법이나 행정 가이드라인도 없으며, EU의 규제법과 유사한 규제 입법 시도도 실패로 돌아갔다”고 말했다.
그는 “대만 경쟁당국은 기업의 시장 경쟁력을 높이는데 초점을 두고 있으며, 사전 규제에 대해선 신중한 접근법을 유지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공정위는 최근 유럽연합(EU)이 도입한 온라인 플랫폼 규제법인 디지털시장법(DMA)을 본떠 대형 플랫폼 대상의 독과점 규제를 법으로 규율할 방침을 준비 중인 것으로 전해지는데, 대만 경쟁당국 관료가 한국 정부의 움직임에 대해 “무분별한 해외 규제 도입으로 경제에 미치는 비용을 감안해야 한다”고 우려를 표명한 셈이다.
첸 부위원장은 대만 TFTC의 공식 입장이 아니며 관련법에 대한 학자로서 소신을 말한 것이라고 했지만, 그의 이력이나 이날 세미나 취지를 고려할 때 의미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는 게 업계의 입장으로 보인다.
첸 부위원장은 대만의 대표 경쟁법 전문가로 평가된다. 2007년 TFTC 위원을 거쳐 대학 교수로 재직하다 지난 2020년 말 공평교역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임명된 인물이다. 이날 세미나에선 대만 경쟁당국의 규제 방향성을 보여주는 ‘디지털 경제 경쟁정책 백서’도 소개됐는데 백서에도 관련 규제에 대한 우려가 담긴 것으로 나타났다.
백서는 “유럽연합 등 해외 빅테크 규제에는 무역협상과 자국 기업 보호, 정치적 고려 등 다양한 의도와 목적이 있는 만큼 무분별한 해외 규제를 국내 도입할 경우 혁신을 저해할 수 있어 플랫폼 기업 규제보다는 ‘경쟁촉진’을 원칙으로 삼는다”고 명시했다. 대만 경쟁당국의 공식 백서가 첸 부위원장의 의견과 일치하는 것이다.
첸 부위원장은 “규제의 현지화(local nexus)는 다른 나라의 경험을 모방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며 “기업의 상품·서비스에 대한 사용자 경험을 높이는 혁신과 기업간 경쟁을 촉진하는 행위에 대한 균형이 필요하다”고 거듭 밝혔다.
대만 경쟁당국이 온라인 플랫폼을 법으로 규율하는 사전 규제를 반대하는 것은 유럽연합 등의 플랫폼 규제법이 대만 현지 실정과 맞지 않기 때문이라는 의미로 읽힌다. 공정위가 유럽연합의 미국 온라인 플랫폼(구글, 페이스북 등) 기업 독과점 견제 장치를 국내에 그대로 이식할 경우 혁신을 가로막을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첸 부위원장은 “반독점 해외 사례는 각국의 국내 상황에 맞게 접목해야 하는데, 디지털 경제는 매우 역동적”이라며 “지금 결정이 추후 비용 부담으로 이어질 수 있고, 경제 전반에 미치는 비용을 감안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최근 업계 일부에선 네이버·카카오 등 국내 온라인 플랫폼의 경우 규모와 매출, 시장지배력이 미국 기업과 차이가 크다는 점을 들어 해당 입법에 대한 우려가 적지 않은 상황이다. 업계 관계자는 “한국이 대만에 플랫폼 산업으로 뒤처지는 것 아니냐”며 “우리나라는 대만 같은 플랫폼 기업 혁신과 육성 방침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날 세미나에 참여한 한국외대 최요섭 교수 역시 “한국의 디지털 환경은 유럽과 다르고, 네이버 쇼핑 사건, 카카오 모빌리티 사건처럼 기존 경쟁법으로도 플랫폼 기업을 충분히 제재하고 있으므로 새로운 규제를 도입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말했다. 법무법인 태평양 이수진 변호사도 “한국의 토종 플랫폼들이 글로벌 사업자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규제를 하다 이들 사업자들이 그 지위를 잃을 수 있다. 국가별 특성을 고려한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날 한기정 공정위원장은 “플랫폼은 소비자 후생을 높이는데 많은 기여를 해왔지만,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않을 때 높아진 위상만큼 부작용이 크다”며 입법 가능성을 시사하면서도 “플랫폼을 둘러싼 부작용을 해소하면서도 혁신 유인을 제고할 수 있도록 국내시장에 적합한 정책을 균형감 있게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민지형 기자 oasis@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