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남의 영화세상] 애니메이션 예산 삭감이란 패착
영화평론가
얼마 전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올해 7월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 애니메이션 종합 지원사업이 2024년 예산 심의 과정에서 전액 삭감되면서 해당 지원사업이 폐지될 위기에 처했다는 것이다. 소리 소문도 없이 말이다. 그로 인해 애니메이션 협회 단체가 모인 ‘애니메이션 발전연대’는 지원사업 폐지를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하며 개인 연명 참여를 제안했다. 이후 연상호 감독 등 한국을 대표하는 장편 애니메이션 감독 27인이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고 들었다.
애니메이션은 기술과 비용, 시간이 동원되는 예술이다. 현 상황에서 지원금 없이 민간업체의 힘만으로 좋은 애니메이션을 발굴하고 인재를 양성하는 게 가능할지 되묻고 싶다. 민간업체는 창작자 활동을 지원하는 데 자본을 쓰기보다는 콘텐츠 창출에 우선한다. 소위 말하는 돈이 되지 않는 콘텐츠는 소멸할 수 있다. 웹툰의 인기가 높아져 애니메이션이 되는 작품도 많지만, 이 또한 ‘잘 팔리는’ 웹툰에 한정돼 있다. 애니메이션 기획개발 및 제작지원 사업은 창작자를 발굴하고 좋은 기획을 찾아 나서는 데 의미가 있다. 미국이나 일본처럼 애니메이션 활성화를 위해서는 먼저 지원의 지속성과 안정성이 필요하다. 지속적이지 않은, 불안정한 정책 앞에서 문화예술의 미래는 불투명할 수밖에 없다.
최은영 소설 원작으로 한 ‘그 여름’
점묘화 기법의 매력적 성장 로맨스
어렵게 명맥 이어온 한국 애니메이션
지원 예산 삭감에 콘텐츠 소멸 위기
미래 고려하면 지원 사업 유지 필요
‘엄마의 땅: 그리샤와 숲의 주인’은 영진위가 제작을 지원한 작품이다. 모든 장면을 수작업으로 해내면서 작업 시간이 자그마치 3년 3개월이나 걸렸다고 한다. 인력이 모자라 감독이 몇 개 역할을 하는 게 기본이었다고 하지만, 결국 퀄리티 높은 애니메이션을 제작해 한국에선 좀처럼 시도되지 않는 장편 스톱모션을 완성할 수 있었다. 영진위와 한국영화아카데미 지원으로 이룩한 성과가 분명하다.
사실 열악한 상황에도 한국 애니메이션이 명맥이 이어온 것이야말로 신기할 노릇이다. 1960년대 만들어진 ‘홍길동’을 시작으로 ‘아기공룡 둘리’ ‘달려라 하니’ 등 1980~1990년대 TV 만화 시대가 있었다. 열악한 한국 애니메이션 장에서 ‘마당을 나온 암탉’ ‘돼지왕’이나 ‘서울행’을 지나 최근 개봉한 ‘태일이’와 ‘그 여름’까지 영진위 지원사업만으로도 간간이 좋은 작품들을 만들어 왔다. 한국 애니메이션의 역사를 만들어 왔다는 것만으로도 또 하나의 ‘기적’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아직도 ‘만화 따위는 아이들이나 보는 것’이라는 하찮은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 픽사에서 제작한 ‘엘리멘탈’ 인기는 여전히 식지 않고 있고, 어린이였던 관객이 어른이 돼서도 관람하는 ‘코난’ 시리즈는 방학만 되면 어김없이 극장에 개봉해 눈길을 끈다. 올해 초 개봉한 ‘슬램덩크’나 ‘스즈메의 문단속’의 광기 어린 인기는 또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지점에서 최근 개봉한 한지원 감독 ‘그 여름’을 언급하고 싶다. 최은영 작가 소설인 ‘내게 무해한 사람’을 원작으로 한 ‘그 여름’은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성장 로맨스 장르 애니메이션이다. 열여덟 여름, 갈색 눈의 평범한 학생 ‘이경’이 고교 축구선수 ‘수이’를 만나 새로운 감정에 눈뜨게 되는 과정을 풋풋하게 따라간다. ‘수이’와 ‘이경’의 모습이 점묘화 기법으로 담겨 독특하면서도 학창 시절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매력을 느낄 수 있다. 봄과 여름 사이라는 계절적 감각, 두 사람의 애틋한 감정이 더해진 섬세한 연출은 이제 한국에서도 다양한 애니메이션을 만날 수 있다는 설렘을 자극한다. 웹툰의 인기나 OTT 성장세는 놀라울 정도다. 영진위 애니메이션 예산 삭감이라는 선택은 ‘애니메이션 미래’를 고려하지 않은 패착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