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남의 영화세상] 함께 사는 건 불가능할까
영화평론가
한국 재난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아파트에 숨은 상징적 의미 조명
시간이 지날수록 변해가는 인물들
황폐화한 디스토피아 묘사한 작품
보다 넓고 높은 곳에 대한 욕망을 잘 표현하는 것. 아파트 말고 또 있을까. 영화 오프닝은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아파트의 역사를 한순간에 훑는다. 이제 우리나라 전체 주거 공간의 60%를 차지하는 아파트는 단순히 사람이 사는 곳, 주거 공간만의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한국의 아파트에는 상징적인 의미가 숨어 있다. 타워힐, 힐스테이트, 로얄카운티 등등 감히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로 영어식 이름을 가진 아파트들은 이상적인 가족의 모습을 표상하거나 행복한 가족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처럼 포장돼 우리를 유혹한다. 하지만 아파트의 실상은 재산을 축적하거나 재테크 수단으로 이용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제 우리가 쉬어야 할 곳은 작은집이 아니라, 넓고 높은 곳이 된 지 오래다.
영화에서 굳건하고 견고하던 콘크리트가 와르르 무너지는 풍경은 희열 혹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하다. 내 집 장만이 유일한 꿈인 사람이나 이제 막 집을 장만한 중산층에게 말이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아파트라는 상징적인 공간을 두고 인간의 욕망, 집단에 가까운 광기를 고스란히 그려내고 있는 재난극이다. 엄태화 감독은 재난의 원인 따위 중요하지 않다는 듯 어느 날 닥쳐온 대지진으로 서울을 붕괴시킨다. 그리고 모든 것이 붕괴되고 남은 자리에 유일하게 무너지지 않은 황궁아파트 103동만이 기세등등 서 있다.
아파트 바깥은 죽음으로 가득 찼는데 아파트 입주민들 상황은 나쁘지 않다. 그들에게는 안전한 ‘집’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황궁아파트로 외부 생존자들이 몰려들면서 입주민들은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들과 함께 살아야 하는지, 살아남기 위해 내쫓아야 하는지 갈림길에 선다. 영화는 ‘영끌’로 아파트를 산 신혼부부 ‘민성’과 ‘명화’를 통해 이 균열을 섬세하게 드러난다. 공무원 남편 민성은 아내를 지키기 위한 결정을 내리면서 점점 변화해 가는 인물이다. 아내 명화는 모두 함께 잘살자는 신념을 몸소 실천하는 인물이다.
영화를 빛나게 하는 건 또 다른 인물 ‘영탁’이라는 존재다. 갑작스러운 화재 속에서 모두가 허둥댈 때 거침없이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 아파트를 지켜낸 영탁은 입주민들의 영웅으로 부상한다. 자신의 희생이 별 게 아닌 듯 말하는 영탁에 사람들은 감동하고, 그를 아파트 대표로 추대하면서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흘러간다. 영탁은 얼떨결에 대표가 됐음에도, 아파트를 지키기 위해 그 누구보다 외부인을 몰아내는 데 앞장선다. 그뿐만 아니라 방범대를 조직하고, 규칙을 세우는 등 리더 역할을 하며 진짜 영웅이 되어간다.
영화에서 영탁이 “저는 이 아파트가, 우리 주민들이 선택받았다, 그렇게 생각합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이 대사는 여러모로 의미심장하다. 선택받은 존재들이기에 그들은 누군가를 배제하고 함부로 해쳐도 된다고 믿는 극단의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신이라도 된 듯 행동하며 광기 어리게 변화해 간다. 게다가 방범대가 구해오는 식량도 공평하게 나누지 않고 성과제로 바뀌면서 입주민들 관계도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한다. 어느 순간부터 영탁은 입주민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독재자의 얼굴을 하고 있다. 유토피아처럼 보였던 황궁아파트는 집단 이기주의로 황폐해진 디스토피아와 다를 바 없어진다.
조도가 낮은 영화의 서늘한 화면은 1937년 피카소가 그린 ‘게르니카’를 닮았다. 전쟁의 참상과 인간적인 고통을 표현한 피카소처럼 엄태화 감독도 아파트라는 우리의 안락한 공간에서 벌어지는 참혹한 현실을 담아내고자 한 것이다. 그곳이 유일하게 남은 천국인지 발 딛고 싶지 않은 지옥인지 헷갈리게 만들면서 말이다. 이처럼 영화는 재난의 시간을 그리는 동시에 무너지지 않은 아파트라는 흥미로운 설정으로 접근한다. 그 안에서 재난을 대하는 인간들의 모습을 담아내며 인상적인 한국 재난영화라는 걸 증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