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남의 영화세상] 당신이 잠든 사이에
영화평론가
신혼부부가 등장하는 영화 ‘잠’
수면 중 이상 행동 다룬 공포물
서서히 변해가는 인물들 모습
정유미·이선균 연기력 돋보여
영화 ‘잠’ 스틸 컷.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가장 편안해야 할 공간인 ‘집’에서 내가 의식하지 못한 행동을 한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어느 순간부터 남편이 내가 아는 사람이 아니다. 어느 늦은 새벽 잘 자는 줄 알았던 남편이 침대에서 일어나 잠꼬대마냥 “누군가 들어왔어”라는 불길한 말을 한다. 자기 얼굴을 긁어 피투성이로 만들고, 냉장고에서 생고기를 꺼내먹는 기행을 일삼는다. 소름이 끼치는 건 다음 날 남편은 자기가 한 행동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모든 걸 지켜본 아내는 ‘병’이니까 괜찮다고 남편을 다독거리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운 마음을 지울 수 없다.
유재선 감독의 첫 번째 영화 ‘잠’은 행복한 신혼부부 ‘현수’와 ‘수진’이 잠으로 겪는 일을 다룬 공포물이다. 남편 현수는 갑작스럽게 시작된 수면 중 이상 행동으로 병원을 찾고, 의사는 렘수면행동장애라고 진단한다. 덧붙여 현대인들에게 쉽게 발병하는 ‘병’이니 걱정하지 말라며 도리어 부부를 안심시킨다. 현수는 식습관과 생활환경을 개선하며 병이 낫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지만, 몽유병 증상이 완화되기는커녕 위험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현수는 키우던 반려견까지 해치며 수진을 경악스럽게 만든다. 이제 수진은 남편이 잠드는 순간 시작되는 공포로 매일 밤 잠드는 게 두렵다.
영화는 3부로 진행된다. 1부가 현수의 수면장애로 발생하는 이상행동에 주목한다면, 2부는 임신 중이었던 수진이 아이를 낳은 이후에 겪게 되는 이야기에 집중한다. 수진은 무의식중에 남편이 자신의 아이까지 해치는 건 아닌지 공포심을 느끼며 그 아이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물론 현수도 자신을 믿을 수 없어 잠은 다른 곳에서 자겠다며 방을 구하려 하지만, 수진은 ‘둘이 함께라면 극복 못 할 일은 없다’는 부부의 가훈을 깨우치며 함께 해결하고자 한다. 수진은 이성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려 하지만, 심해지는 현수의 몽유병으로 점점 예민해져 간다. 결국 수진은 남편이 잠든 시간 동안 전혀 잠들지 못하게 된다.
수진은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점점 변해간다. 현수가 잠이 들어 고통스럽다면, 수진은 잠들 수 없어 일상이 피폐해져 가는 것이다. 하물며 수진은 남편이 아이와 자신을 해칠까 봐 문을 걸어 잠그고 욕실에서 쪽잠을 청하려 한다. 품에는 아이, 한 손에는 식칼을 들고 있다. 잠들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수진은 극단으로 치닫는다. 아이를 지키기 위한 ‘모성애’라는 명분이 있어도 그녀는 기괴해 보인다. 이때부터 부부 관계는 역전되어 현수가 수진에게 공포심을 느끼게 된다. 영화의 3부는 바로 관객이 상상할 수 없는 데까지 나아가는 수진의 광기 어린 모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잠을 자는 행위는 눈이 감기고 의식 활동이 정지되는 상태를 뜻한다. 모든 신체활동이 휴면에 들어가 자발적 무의식에 돌입한다. 수면 상태에서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고, 인간은 무방비해진다. 잠을 자면서 ‘사랑하는 내 가족을 해칠지도 모른다면’이란 가정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가족과 관련된 일이라 더 위협적으로 다가온다. 또 누구나 잠이 들기에 어떤 이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상적인 공포라 섬뜩함을 자아낸다.
유재선 감독 ‘잠’은 가장 기본적인 욕구, 집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발생하는 공포, 현대 의학과 무속 신앙의 대립 등을 미니멀한 연출로 풀어내고 있다. 현실적이던 이야기가 후반부로 가면 다소 억지스러울 수 있지만, 관객의 상상력을 충분히 불러일으킬 수 있어 일견 동의할 수 있는 흐름이다. 극단적 심리 변화를 디테일하게 풀어내는 이선균과 정유미의 연기력은 이 영화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