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문화 백스테이지] 2023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위너스 3인방 만나 보니
콩쿠르 이후 처음 만나 한국 투어 무대
각기 서는 무대 달라도 ‘음악 동료’ 든든
“너무나 아름다운 목소리” 주인공 김태한
희귀 콘트랄토로 독보적인 재스민 화이트
고음 처리 돋보인 리릭 율리아 무지첸코
김태한 스승도 부산까지 와서 직접 격려
‘따끈따끈’한 멤버로 꾸려진 매우 ‘학구적인’ 콘서트였다. 지난 5월 21일부터 6월 3일까지 한 달 가까이 벨기에에서 진행된 ‘2023 퀸 엘리자베스 국제 콩쿠르’ 성악 부문에서 우승을 차지한 바리톤 김태한(23)을 비롯해, 2위 콘트랄토 재스민 화이트(30)와 3위 소프라노 율리아 무지첸코(29)까지 3명을 한 자리에 모은 음악회가 지난 14일 부산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렸다. KNN방송교향악단(음악감독 겸 상임지휘자 서희태)과 부산마루국제음악제가 공동 주최했다. 연주 프로그램은 콩쿠르 곡 그대로였다.
세 명의 성악가도 콩쿠르 이후 다시 모인 것은 처음이라고 했다. 본공연 전날 오후 KNN방송국 스튜디오를 찾았을 때 세 사람은 리허설이 한창이었다. 세 사람 모두 지금은 독일과 빈에 거주하면서 유럽을 활동 무대로 삼기 시작했다. 콩쿠르 이후 무엇이 가장 달라졌을까 궁금해서 물었다.
“가장 큰 차이점은 전 세계의 다양한 관객을 만날 기회가 많아졌어요. 한국 방문도 처음이지만 더 많은 곳을 방문할 기회가 생겼고, 연주 일정이 아주 많이 늘었어요.”(율리아 무지첸코)
“저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입상 이후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린 ‘퀸 소냐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해 오페라 출연 제의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한국도 처음이지만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기회를 만들 수 있다는 게 굉장히 즐겁습니다.”(재스민 화이트)
“저도 두 분과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달라진 점이라면 연주 제의를 많이 받는 겁니다. 당장 이번 국내 투어 마치고 베를린 돌아가면 바로 짐 싸서 벨기에로 가서 3개의 연주를 하고, 다시 룩셈부르크로 이동하고, 다시 베를린에 왔다가 다시 벨기에로 가는 등으로 내년 초까지 연주 일정이 짜여 있습니다.”(김태한)
아무래도 연주 일정이 많아지다 보니 유럽에서 거주하는 게 여러모로 편리할 듯싶었다. 그중에서도 김태한의 변화가 가장 눈에 띈다. 그는 올해 2월 서울대를 졸업했다. 현재는 독일 베를린 국립오페라극장(슈타츠오퍼)의 젊은 성악가 육성 프로그램인 오페라 스튜디오 멤버(2년)로 일하고 있다.
“10월부터는 한스 아이슬러 국립음대에서도 공부할 예정입니다. 저는 원래 오페라 극장에서 활동하고 싶어서 학교보다 먼저 오페라 스튜디오 오디션을 넣었고, 합격하면서 한스 아이슬러에도 지원하게 된 것입니다. 공부도 계속하고 싶고, 극장과 학교도 5분 거리여서 굉장히 가깝습니다. 오페라 스튜디오 멤버로 활동하면서 차근차근 오페라 경력을 쌓아 나가고 싶습니다.”
세 사람은 지난 14일 공연에서 본인의 장기를 살려서 각자 노래를 불렀다. 콩쿠르 참가 곡이다 보니 프로그램 수준은 상당했다. 부산의 성악가 바리톤 최모세는 “워낙에 잘하는 성악가들인 데다 한국에선 좀처럼 듣기 힘든 레퍼토리여서 상당히 좋았다”면서 “이런 음악회가 부산에서 좀 더 많아지면 좋겠다”고 말했다.
실제로도 눈빛, 손짓, 감정선 하나하나를 살린 오페라 아리아를 들으면서 한 무대에서 마치 여러 편의 오페라를 감상하는 듯했다. 게다가 오케스트라와 합을 맞춘 공연이어서 그들의 진가는 더욱 빛이 났다. 오히려 세 사람이 함께 부르는 곡이 하나 정도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따로 또 같이’ 한 무대에 서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남다르다고 했다. 전날 재스민은 분명히 말했다. “우리 세대는 경쟁하면서도 서로 친구가 되고, 좋은 동료가 될 수 있어요. 콩쿠르를 통해 만났지만, 앞으로 다른 오페라 무대에 함께 서든 그렇지 않든 음악을 하는 멋진 동료가 생긴 거니까요. 이제 막 시작하는 음악 동반자로서 든든합니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싶었다. 한때는 경쟁자였지만, 동시대를 호흡하는 음악 동반자가 된 셈이니 이보다 더 멋진 인연이 어디 있겠는가 말이다. 그러면서도 각자 밝힌 포부나 목표는 조금씩 달랐다.
이번엔 김태한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는 오페라 쪽에서 계속 일하고 싶지만 콘서트를 할 때는 가곡 위주로 프로그램을 구성합니다. 제가 워낙 가곡을 좋아해서요. 가능하다면 가곡도 잘하고 오페라도 잘하는 가수가 되고 싶습니다.”
율리아는 “개인적으로 콘서트를 더 많이 하고 싶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이번 시즌에는 새로운 형식의 콘서트를 많이 시도하면서 독일어에 더 능숙해지고 싶다고 덧붙였다. 이 대목에서 셋은 크게 웃었다. 공교롭게도 세 사람은 태어나고 자란 나라를 떠나 더 나은 음악 여정을 위해 독일어권 나라에 정착 중이어서 독일어 섭렵이 무엇보다 급했다.
재스민은 “콘트랄토(여성 목소리 중 가장 낮은 음을 내는 여성 성악가 또는 그의 낮은 목소리)가 많이 사용되는 바그너와 로시니 오페라에 참여할 기회를 더 많이 얻어서 경력을 쌓아 가고 싶다”고 구체적인 계획을 밝혔다. 바그너와 로시니에 집중하는 이유도 결국은 콘트랄토라는 음역의 작품을 이들이 많이 썼기 때문이란다.
율리아와 재스민은 김태한과 달리 2015년과 2019년 오페라 데뷔를 마쳐 이미 여러 오페라 무대에서 선 경험이 있고, 예정된 오페라 공연 스케줄도 많았다. 재스민은 특히 지난해 5월 줄리아드음악원(오페라 아티스트 디플로마)을 졸업하고 오스트리아 빈 폴크스오퍼 오펀 스튜디오에서 1년을 보낸 후 이제 젊은 예술가가 아닌 전문 예술가로서 5년을 계약했다고 전했다. 올해 출연이 예정된 작품 외에도 연일 “콘트랄토가 필요하다”는 요청 이메일을 받고 있다고 밝혔다. 확실히 그의 목소리는 매력적이었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해 줄 수 있는 덕담 같은 게 있는지 물었다. 때마침 율리아는 리허설 차례여서 자리를 떠 김태한과 재스민만 서로 칭찬을 주고받았다.
재스민이 먼저 말했다. “매우 단순하지만 그는(김태한) 정말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지고 있어요. 레퍼토리가 풍부한 것도 굉장히 훌륭합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좋은 점은 그가 함께 있는 사람들을 굉장히 기분 좋게 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업계는 함께하는 일이 많고, 한번 공연했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 다시 만날 기회가 많은데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굉장한 장점이 될 겁니다.”
김태한이 말을 이었다. “일단은 콘트랄토 영역이 굉장히 희귀한 파트인데, 저는 사실 태어나서 콘트랄토는 처음 들었습니다. 그런데 (재스민 화이트의) 소리가 너무 좋고, 스킬도 훌륭하고, 음악도 잘 만들고, 특히나 놀랐던 점은 저음을 너무 편하게 낸다는 것입니다.”
한편 이들을 옆에서 지켜본 서희태 지휘자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서 지휘자는 김태한에 대해 “많은 성악도가 소리의 볼륨이나 고음 또는 저음에 집중하느라 음악적인 부분은 간과하는 경우가 많은데 김태한은 소리 빛깔, 볼륨감, 음역, 음악성 등등 어느 한 부분도 부족함이 없는 잘 갖춰진 바리톤으로 앞으로 세계적인 무대에서 좋은 경력을 쌓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극찬했다. 그는 또 재스민에 대해서는 “보기 드문 깊은 울림의 저음을 가진 콘트라 알토”라며 “미국 출신이지만 독일어 발음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정확하게 발음하며 앞으로 바그너 오페라에서 많은 러브콜을 받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율리아에겐 “무대에서 빛이 나는 소프라노”라며 “리릭한 소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콜로라투라의 고음 음역대를 쉽게 처리하는 능력이 돋보인다”고 평가했다.
부산 공연엔 김태한의 스승인 바리톤 나건용(서울대 출강) 교수도 참석해 제자를 격려했다. “훌륭한 제자를 둔 덕에 스승까지 덩달아 바빠졌다”고 농을 건네는 서 지휘자의 말에 나 교수는 “(태한이가)아직 시차 적응이 안 된 것 같다”며 제자의 컨디션을 걱정하기도 했다.
한편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위너스 콘서트는 부산 공연을 시작으로 제주 서귀포 예술의전당(17일), 서울 노원문화예술회관(19일), 대구 아양아트센터(21일), 세종예술의전당(22일), 부천아트센터(23일), 경주예술의전당(24일)으로 이어진다. 부산 이외의 공연에선 러시아 출신 피아니스트 일리야 라쉬코프스키가 반주를 맡는다.
김은영 기자 key66@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