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즈루가 지켜 온 우키시마호 역사… 이젠 우리 정부 나서야['8000원혼' 우키시마호의 비극]

이승훈 기자 lee88@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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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즈루모임’ 사진 등 사료 보존
본보 취재진 524명 사망 명부 확인
우키시마호 자료 캐비닛에 한가득
시민 모금으로 추모비 등 건립
한국 상징 무궁화 심고 추모제도
“부산 우키시마호 공간 조성 뜻깊어
자료 공유 등 기꺼이 협력하겠다”

78년 전 우키시마호가 침몰했던 일본 교토 마이즈루 앞바다 전경. 지난 24일 드론으로 촬영했다. 이곳은 항구 입구가 좁고 산으로 둘러싸여 물살이 잔잔한 ‘조용한 바다’로 불린다. 김보경 PD harufor@ 78년 전 우키시마호가 침몰했던 일본 교토 마이즈루 앞바다 전경. 지난 24일 드론으로 촬영했다. 이곳은 항구 입구가 좁고 산으로 둘러싸여 물살이 잔잔한 ‘조용한 바다’로 불린다. 김보경 PD harufor@

지난 24일 일본 마이즈루 시모사바가 추모 공원. 우키시마호 추모비 옆에 한 사진이 전시됐다. 침몰한 우키시마호의 레이더와 기관총 뒤로, 1954년 옛 소련에서 철수한 일본 귀국선의 모습이 담겼다. 배 난간에 줄지어 서서 돌아온 고향을 바라보는 일본인들도 보인다.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한국 귀국선과 고국에 무사히 돌아온 일본 귀국선이 함께 포착된 장면이다. 수천 명이 목숨을 잃으면서 한국인의 한이 맺힌 마이즈루 앞바다는 한때 일본에게는 광명의 장소였던 것이다.

1945년 8월 24일. 우키시마호를 탄 한국인 강제징용자들도 당시 “육지가 보인다”며 귀향의 기대를 품고 배 밖으로 나왔지만, 결국 대부분이 의문의 폭발과 함께 이곳 마이즈루 앞바다에 수장됐다.


일본 교토 마이즈루시 마이즈루모임 사무실에 보관돼 있는 우키시마호 공식 사망자 명부 원본. 김보경 PD 일본 교토 마이즈루시 마이즈루모임 사무실에 보관돼 있는 우키시마호 공식 사망자 명부 원본. 김보경 PD

■사망자 명부 원본 확인

일본 교토 마이즈루에는 귀중한 우키시마호 관련 사료들이 남아 있다. 지난 23일 〈부산일보〉와 자매지 〈서일본신문〉 취재진은 마이즈루에서 일본이 공식 발표한 우키시마호 사망자 524명의 명부 원본을 확인했다. 명부는 일본 시민단체 마이즈루모임이 1985년 교토 만수사라는 사찰로부터 넘겨받아 보관 중이다. 겉면에는 일본어로 ‘우키시마마루 사몰자 명부’라 적혔고, 곳곳에 색이 바래는 등 오랜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 있다.

이밖에 마이즈루모임은 1952년 1월 배가 인양돼 바로 서 있는 사진이 실린 옛 일본 신문 기사 등도 간직하고 있다. 우키시마호 관련 자료가 사무실 한 캐비닛을 가득 메울 정도다. 대부분이 우리나라 근대사 관련 유산으로, 현재 부산항 1부두에 추진 중인 우키시마호 역사·추모 공간 조성을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조사하고 기록해야 할 대상이다.

마이즈루모임 시나다 시게루 회장은 “부산의 우키시마호 역사 공간 조성은 매우 뜻깊은 소식”이라면서 “자료 공유 등에 기꺼이 협력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유네스코 세계기억유산 기록물이 보관된 마이즈루 ‘귀환기념관’에는 우키시마호 자료가 전무했다. 세계 2차 대전 패전 후 일본인들의 시베리아 억류 생활, 본국 귀환 과정만이 담겼을 뿐이다.


지난 24일 우키시마호 추모 공원에서 마이즈루모임 하시모토 에이지 사무국장이 추모비 제작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김보경 PD 지난 24일 우키시마호 추모 공원에서 마이즈루모임 하시모토 에이지 사무국장이 추모비 제작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김보경 PD

■곳곳에 흩뿌려진 그날의 흔적

수천 명의 한국인이 숨진 사건인 만큼 마이즈루 일대 곳곳이 우키시마호와 연결돼 있었다. 침몰 직후 시신이 매장된 주요 장소는 일본 해상자위대 마이즈루교육대 내부와 침몰지에서 약 5.3km 떨어진 한 공터다. 공터는 생존자들이 임시로 머물던 타이라 해병대 기지 창고가 있던 곳이기도 하다.

이 두 곳으로 옮겨진 시신은 바닥에 판 구덩이에 묻히거나 화장됐다. 이후 1950년 다시 발굴돼 현재 도쿄 유텐지로 옮겨졌으나, 아직 유해가 남아 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침몰지와 가까운 시모사바가 해변은 우키시마호 폭침 후 7~10일간 끊임없이 시신이 들어찼다. 이시카와현 출신 한 목격자 증언에 따르면 당시 일본 군인은 일부 시신을 태운 뒤 바다에 버렸다가, 문제가 될까 우려해 다시 바다에 들어가 유해를 건져내기도 했다.

시신은 침몰지와 상당히 떨어진 곳에서도 발견됐다. 2km가량 떨어진 치토세 마을에 유해 7구, 이보다 더 떨어진 카츠라 지역에서도 부패된 시신 1구가 목격됐다.


■마이즈루가 지켜온 대한민국 유산

마이즈루 시민들은 직접 우키시마호 역사를 알리고 보존했다. 대표적인 것이 침몰지와 600m가량 떨어진 우키시마호 추모비. 부지 매입부터 조각상 건립까지 당시 총 비용 700만 엔이 모두 시민 모금 운동을 통해 확보됐다. 개인 기부뿐 아니라 교토부와 마이즈루시에서도 각각 100만 엔을 쾌척했다.

추모비 조각도 유명 전문가가 아닌 지역 미술교사와 학부모가 함께 했다. 인근 조선학교 한국인 교사를 모델로 3개월 반 동안 밤낮을 세워가며 완성했다. 이 과정에서 철이나 나무로 된 학교 교구를 재료로 쓰기도 했다. 우키시마호 추모 노래도 마이즈루의 한 피아니스트가 작곡했다.

1978년 8월 24일 제막 이후에도 청소나 방명록 관리 등을 시민단체가 도맡아 한다. 추모비 제작에 참여한 하시모토 에이지 마이즈루모임 사무국장은 “주변에 한국을 상징하는 무궁화를 심고, 다른 잡초가 자라지 않도록 수시로 관리한다”면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위기 상황도 잦았다. 1999년에는 우키시마호를 설명하는 글에 누군가 빨간 페인트를 뿌리고, 이듬해에는 ‘식민지배’라는 단어를 따로 파냈다. 1995년에는 추모제 참가자가 크게 줄며, 행사가 폐지될 위기감까지 감돌았다. 다행히 당시 일본 영화 ‘아시안 블루-우키시마호 사건’이 개봉하면서 추모제 참가자는 다시 배 이상 늘었다. 최근에도 일부 마을 주민이 한국인 희생자를 위한 추모제를 여는 것에 부정적인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시나다 회장은 “우키시마호 추모 활동은 일본과 일본인의 책임으로서, 이를 통해 다시는 이런 아프고 슬픈 일이 되풀이되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교토 마이즈루=이승훈 기자·히라바루 나오코 서일본신문 기자 lee88@busan.com


이승훈 기자 lee88@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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