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MoCA, 오늘 만나는 미술] 2002년 프레스티지호가 남긴 단상들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알랜 세쿨라 ‘바다의 복권’ ‘검은 조류/바다로 유출된 증유’

미국의 사진가, 영화 제작자, 이론가이자 운동가로 활동한 알랜 세쿨라(1951~2013)는 거대한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변화하는 해양계의 정치·사회·경제·환경적 공간을 주목했다. 그는 극도로 추상화되는 자본주의를 사회 참여적 다큐멘터리 사진과 영화 매체를 통해 재현하는 방법론을 고민했다. 부산현대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전시 ‘자연에 대한 공상적 시나리오’에는 세쿨라의 주요 작품 ‘바다의 복권’과 ‘검은 조류/바다로 유출된 증유’가 국내 최초로 소개된다.

세 시간에 달하는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 ‘바다의 복권’(2006)은 일본, 파나마를 거쳐 바르셀로나 지중해 연안으로 이동하는 거대 선박의 이동 경로를 따라간다. 컨테이너 선박 화물 운송이 아웃소싱 생산과 세계 무역에 미치는 영향, 그로 인한 노동 형태의 변화를 다룬다. 환경오염의 가해자와 피해자를 불분명하게 함으로써 책임 소재를 물을 수 없는 국제운송법 등 다국적 사회의 국제 정세와 세계 금융, 각종 이해관계가 뒤얽힌 해양 자본주의 세계를 기록한 작품이다. 유조선 프레스티지호는 일본에서 만들어졌지만, 라이베리아 법인 소유로 바하마에 등록되었다. 그리스 회사가 이 선박의 운영을 담당하나 실질적인 사용자는 라트비아에서 싱가포르로 러시아 석유를 운송하는 스위스에 본사를 둔 석유 무역업자였다. 승무원은 필리핀인과 루마니아인이다.

‘검은 조류/바다로 유출된 증유’(2002/2003)는 한 편의 글과 열 점의 사진 연작으로 구성된다. 역사상 최악의 기름 유출 사고로 알려진, 2002년 11월 스페인 갈라시아 해안에서 발생한 유조선 프레스티지호의 침몰 이후 바르셀로나 신문 라 반구아르디아의 요청으로 제작된 작품이다. 세쿨라는 극적이고 명상적인, 전형적인 저널리즘 사진과는 거리를 둔다. 검은 기름으로 둘러싸여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도륙된 해안 풍경, 계속 번져나가는 석유의 물성, 검은 조류를 걷어내려 분투하는 지역 어민과 자원봉사자의 완수할 수 없는 노동 현장을 한데 모은다. 이를 통해 자연이 가장 투쟁적이며 논쟁적인 전쟁터가 되어버린 현실을 초점화한다.

세쿨라는 이 유성 물질이 이후 어떻게 처리되는지 확인하기 위해 자원봉사자과 함께 추적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것이 인근 렌도 지역의 벽돌 공장에서 가공돼 새 벽돌 재료로 쓰이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공장에는 기름 덩어리가 매립되는 두 개의 거대한 구덩이가 있었고, 그중 하나가 사진 연작 속에 등장한다. 지역 주민과 자원봉사자들이 고된 노력으로 검은 기름을 걷어 올리는 동안 지역 자본가와 정치인들은 이를 상품화하는 계획을 세웠던 사실을 대비시킨다. 세쿨라의 사진들은 저널리즘 사진이 담아내지 못하는 현실 세계의 복합성을 들춰내고, 이를 통해 자본의 낭만화가 은닉한 사실성을 구체화하는 비판적 리얼리즘의 기능을 수행한다. 이 일련의 사진 작업에 덧붙인 작가의 글 ‘오페라를 위한 단상들’(2003)에는 향후 30년간 이 바다에 머물러 있을 침묵이 함축되어 있다. 김태인 부산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