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하듯 선을 긋던… 단색화의 거장 박서보 화백 14일 별세(종합)

오금아 기자 chri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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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법’ 시리즈로 한국적 추상 확립
SNS에 직접 암 투병 소식 전하고
“캔버스 한 줄이라도 더 긋고 싶다”
9월 부산 개인전·미술관 현장 방문

“후학 양성 통해 많은 작가 배출”
“한국 현대미술 대표 작가” 평가
조현 전 대표, 박 화백 인연 소개

단색화의 거장 박서보 화백이 14일 오전 별세했다. 조현화랑 제공 단색화의 거장 박서보 화백이 14일 오전 별세했다. 조현화랑 제공

박서보 화백이 14일 별세했다. 향년 92세.

‘단색화의 기수’로 한국 현대미술의 흐름을 주도해 온 박서보(본명 박재홍) 화백이 14일 오전 9시 34분 영면에 들었다. 1931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난 고인은 1954년 홍익대 회화과를 졸업했다. 고인은 1962년부터 홍익대에서 후학을 양성하며 1963년 파리비엔날레, 1965년과 1975년 상파울루비엔날레에 참여하는 등 작가로서 활동 반경을 넓혀 나갔다.

고인은 1973년 일본 도쿄 무라마쓰화랑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묘법(描法) 시리즈를 발표했다. ‘그리는 방법’을 의미하는 묘법은 둘째 아들이 형의 공책 속 네모 칸에 글자를 써넣기 위해 그리고 지우기를 반복하던 모습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묘법 시리즈는 캔버스에 유백색의 밑칠을 하고 마르기 전에 연필로 선을 반복해서 긋는 ‘전기 묘법’, 캔버스에 한지를 여러 장 덧바르고 마르기 전에 손으로 문지르거나 긁으며 지그재그 같은 불연속적인 선을 보여준 ‘중기 묘법’, 덧바른 한지 위를 막대기나 자 같은 도구를 이용해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밀어내는 ‘후기 묘법’으로 나뉜다.

고인은 2010년 회고전 간담회에서 “묘법은 도(道) 닦듯이 하는 작업”이라며 “그림이란 작가의 생각을 토해내는 마당이 아니라 나를 비워내는 마당이며 내가 나를 비우기 위해 수없이 수련하는 과정이 바로 묘법”이라고 설명했다.

고인은 홍익대 미대 학장과 한국미술협회 이사장을 역임했으며 1979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1984년 국민훈장 석류상, 1994년 옥관문화훈장, 1999년 자랑스러운 미술인상, 2011년 은관문화훈장, 2019년 대한민국예술원상, 2021년 금관문화훈장을 받았다. 또 고인은 2019년 비영리 재단법인 기지재단을 세웠다. 기지재단은 박서보 화백의 작품 관리와 아카이브 구축, 영상과 출판 콘텐츠 제작과 젊은 창작자 지원 등의 일을 하고 있다.

아흔이 넘어서도 활발하게 작업을 이어가던 고인은 2023년 2월 23일 SNS에 직접 폐암 투병 사실을 공개했다. ‘폐암 3기 판정을 받았다’는 문장으로 시작한 글에서 고인은 ‘내 나이 아흔둘… 작업에 전념하며 더 의미 있게 시간을 보낼 것이다… 아직 그리고 싶은 것들이 남았다… 이 소식을 듣고 놀라서 연락하려는 사람들 많을 거다. 하지 마라. 내게는 이제 그 시간이 아깝다… 나는 캔버스에 한 줄이라도 더 긋고 싶다’라며 작업에 대한 의지를 표명했다.

현재 고인의 마지막 개인전이 부산에서 열리고 있다. 지난 8월 말부터 조현화랑 달맞이와 조현화랑 해운대 두 곳에서 열리고 있는 ‘박서보’전은 디지털로 고인의 묘법을 재해석한 비디오 작품 등까지 선보이고 있다. 디지털 묘법은 키아프 서울과 프리즈 서울이 열린 9월에 약 한 달간 코엑스 K팝스퀘어 전광판에서 송출되기도 했다.

지난 9월 21일부터 23일까지 고인은 가족과 함께 부산을 찾았다. 개인전이 열리는 조현화랑과 부산현대미술관을 찾아 전시장을 돌아봤고, 해운대와 이기대 등을 방문했다. 부산 방문 기록은 고인의 SNS 마지막 글을 장식했다.

부산현대미술관 강승완 관장은 “미술관 1층과 2층 전시를 다 돌아보고 가시면서 ‘이게(조현화랑 개인전) 내 마지막 개인전이다’라고 말씀하셨다”고 전했다. 강 관장은 “박서보 선생님은 후학 양성을 통해 많은 작가를 배출하셨고, 학교를 그만둔 뒤에도 한국 미술계에 기여를 하시기 위해 여러모로 노력하셨던 분”이라고 말했다.

공간화랑 신옥진 대표는 고인에 대해 “박서보 선생는 한국적 추상을 확립한 명실공히 한국 현대미술의 대표 작가”라고 했다. 신 대표는 1991년 고인의 전시회를 공간화랑에서 가졌다. 신 대표는 “박 선생이 한지를 재료로 택한 것도 탁월하지만, 누구나 봐도 한국적인 느낌을 받을 수 있는 작품을 제작해 세계 미술사에 들어가는 작가가 됐다”고 말했다.

정준모 미술평론가는 “한국 현대미술 운동의 선봉에 섰던 분”이라며 "아카데믹하고 전통적이었던 한국 현대미술의 기류를 바꿔놓았다"고 평했다. 또 국제갤러리 이현숙 회장은 “박서보 화백은 단색화의 거장이자 한국 미술계의 거목이셨다”며 “그가 온 생애를 바쳐 치열하게 이룬 화업은 한국 미술사에서 영원히 가치 있게 빛날 것”이라며 애도의 뜻을 전했다.

고 박서보 화백의 유족으로는 부인 윤명숙 씨와 아들 승조, 승호 씨 딸 승숙 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1호(조문시간 오전 7시~오후 10시). 장지는 분당 메모리얼파크. 발인은 17일 오전 7시.

지난 9월 21일부터 23일까지 부산을 방문한 고 박서보 화백이 조현(오른쪽) 조현화랑 전 대표와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 조현화랑 제공 지난 9월 21일부터 23일까지 부산을 방문한 고 박서보 화백이 조현(오른쪽) 조현화랑 전 대표와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 조현화랑 제공

■조현 전 대표가 기억하는 박서보 화백

“에너지가 정말 좋은 분이고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는 분이셨습니다. 사진을 한 장이라도 찍으면 꼭 몇 날 몇 시에 어떻게 찍었다고 기록해서 다 보내주셨습니다. 작은 일에도 큰 일에도 정말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조현 조현화랑 전 대표는 고 박서보 화백을 삶의 모든 순간에 최선을 다한 예술가로 기억했다.

조 전 대표는 1991년 갤러리 월드(현 조현화랑)에서 박 화백의 개인전을 가졌다. 조현화랑은 현재 진행 중인 전시까지 총 14번의 개인전을 열었다. 조 전 대표는 최근 박서보 화백 다큐멘터리 제작팀의 인터뷰에 응해 박 화백과의 특별한 인연을 소개하기도 했다.

“박서보 선생님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1990년 겨울입니다. 화랑을 처음 열었을 때 이강소 작가님께 ‘화랑을 하려는데 어떻게 할까요’를 어쭤보니 우리나라 최고의 작가가 박서보니까 일단 박서보 선생님을 만나서 전시회를 하면 현대미술에 대해 이끌어 줄거라고 이야기하셨습니다.” 조 전 대표는 서울 홍대 앞에 있는 박 화백 작업실을 찾아갔고, 1991년 광안리 갤러리 월드에서 박 화백 작품을 처음으로 전시했다.

“박서보 선생님의 작품은 이론에 대한 이해도 있어야 했기에 컬렉터에게 알리기 힘든 시간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박서보 선생님에 대해 자신이 있었습니다. 1993년 LA아트페어에서 박서보 개인전 부스를 선보였는데 그때 미국에서 반응이 정말 좋았습니다. 평론가들과 미술관장들이 보고 너무 좋은 작가라며 궁금해했습니다. 당시 LA에 있는 교포들이 많이 구입을 했습니다.”

조 전 대표는 1996년 프랑스 FIAC 아트페어에 나갔을 때 확신이 섰다고 했다. “젊은 외국인 문화부 장관이 와서 이렇게 좋은 작가가 아시아에 있냐면서, 작은 작품이 있다면 사고 싶다고 했습니다. 블랙 시리즈였는데 눈물이 날 장도로 아름답다면서 작품 앞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조 전 대표는 2014년 갤러리 페로탕 오프닝 파티 때를 떠올렸다. “퐁피두, 루브르박물관 등 미술관장들이 와서 찬사를 보냈습니다. 본인들끼리 ‘한국에 숨은 보배가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때 선생님이 80대였는데 만약 60대나 70대에 세계에 알려졌다면 더 대단했을 것입니다.”

조 전 대표는 한국의 현대미술과 단색화가 오늘날처럼 세계 시장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에는 박 화백의 힘이 크다고 생각했다. “박서보 선생님은 이끌어 가는 힘이 대단하십니다. 오늘날까지 조현화랑이 온 것도 선생님의 힘이 큽니다. 작은 전시, 큰 전시 할 것 없이 정말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전시를 할 때 ‘몇 cm 띄워서 이렇게 하겠다’라며 건축가가 설계하듯 전시를 구상하셨습니다. 1cm라도 틀리면 안 된다며 불평이 많으셨던 작가이기도 하셨습니다.”

조 전 대표는 생전 박 화백을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캔버스를 다 짜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저걸 다 하려면 10년도 더 걸리겠는데 생각을 하다가, (선생님에게는) 저게 신앙이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수행으로 작품을 하니 매일 같이 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봅니다.”


오금아 기자 chri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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